사람을 찾습니다(창세기 37장 )
< 天下萬事皆人事 > 라고 합니다. 천하 모든 일의 성패가 사람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도,나라도, 기업도, 어떤 사람을 쓰느냐? 어떤 사람을 길러 내느냐? 에 따라 그 승패가 결정 됩니다. 우리가 만나고 싶고, 쓰고 싶고, 찾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은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시지요.
꿈 꾸는 사람
< 꿈이 있는 사람은 빵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빵으로는 꿈을 만들 수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꿈 이야기가 많습니다. 요셉의 꿈, 기드온의 꿈. 에스겔의 꿈, 이사야의 꿈, 사도 요한의 꿈 등 말입니다. 성경 가운데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꿈, 現夢, 幻想, 啓示, 異像, 같은 단어가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그 분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현실의 영적, 정신적, 물질적 차원을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가신 분들입니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에대한 증거라 > 는 말씀도 깊이 묵상한다면 The vision 과 연결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전혀 그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 나도 꿈을 꿉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
Trafalgar 海戰의 영웅 Horatio Nelson (1758-1805) 提督이 全 대영제국 해군 장병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한가지, < 네 자리를 죽음으로 지키라 ! > 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리를 잘 지키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실력 없는 사람이 요령과 아부로 자리 지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 임무, 업무, 직업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입니다. 匠人精神, 프로精神 말입니다. 주의 종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가?하는 물음은 시시때때로 우리 자신에게 던져져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전문가라고 간판 내건 사람이 일 처리가 미숙하거나 때우는 식으로 일 처리를 해 줄 때 얼마나 실망스럽고, 화가 납니까? < 자리를 죽음으로 지키는 사람 >을 찾습니다. 이젠 나도 내 자리를 一死覺悟로 지켜야 겠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사람
Joy는 기쁨이란 뜻이지요. 그런데 Joy가 기쁨을 의미 할 수 있는 것은 Joy라는 단어가 < Jesus the first, Others the second, Yourself the last >의 준말이기 때문이라는 재미있는 해석을 들었습니다. 깊은 함축이 있습니다.그런데 더불어 살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닙니다.더불어 살고 싶어도 더불어 살기 싫다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마음 문을 꼭 닫고 들여 보내주지를 않기 때문이지요. 더불어 살기를 원한다는 사람도 실은 진짜 자기는 뚜꺼운 이불로 폭 씌워 놓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더불어 산다는 의미가 불우이웃돕기 성금 모금에 참여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감정의 차원을 가지고 우리 이웃과 나누며 산다는 뜻이라고 생각 합니다. I.Q.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E.Q.가 높은 사람을 만나고 싶고 찾고 싶다는 뜻입니다.
창세기37장 이하 요셉이 이런 사람 아닐까요?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가?(창12, 15, 22 장)
우리는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꼽고 있습니다. 왜 에녹, 노아, 모세가 아니라 아브라함인가? 성경 속에 수많은 믿음의 모델이 있는데 왜 하필 아브라함을 최고의 믿음의 사람으로 치는가? 한번쯤 집고 넘어가야 할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有에서 無에에로 나가는 믿음 ( 창12장 )
인간의 최우선 욕구는 안정성의 욕구입니다. 현재 아무런 안정성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필연입니다. 그러나 현재 확고히 보장되어있는 안정성을 버리고 ( 더욱이 그 안정성이 사회적으로, 물질적으로 누구나 부러워 하는 최고의 것일 때 )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나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 " 富者 몸조심 한다 " 고 합니다. 현재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믿음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나선 것이 아브라함 이었습니다.
無에서 有에로의 믿음 ( 창15장 )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란 " 바라는 것의 實狀 " 이며 "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證據 " 라고 갈파 하였습니다. 바라는 것이나 보지 못하는 것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 현재로는 全無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全無가 全無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實狀으로 나타날 것이며,움직일 수 없는 證據로 드러날 것이란 뜻아닙니까 ? 즉 全無가 아니라 全有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24년 동안 기다렸고, 이제 나이 99세가 되었음에도 약속 받은 아들은 全無하였으나 꼭 全有할 것임을 믿은 것이 아브라함 이었습니다.
有 / 無 자체를 넘어서는 믿음 ( 창 22 장 )
아브라함이 有를 버리고 無를 향해나간 것. 현재는 無이나 有 할 것을 의심치 않은 것. 이 두 가지 믿음의 결정체가 이삭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의 실상이며,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칠 것을 명령 하셨습니다. 그 명령은 하나님의 自家撞着이며 自己 矛盾 이었습니다. 이삭의 죽음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絶對 虛無 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삭의 죽음을 受容 합니다. 그는 絶對 虛無 그 자체 건너편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믿음의 유형을 (1) 有에서 無로 향한 믿음,(2) 無에서 有로 향한 믿음,(3) 有/無 그 자체를 超越하는 믿음 이라고 볼 때 아브라함은 뚜렷한 본보기가 되는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혼란스러워질 때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새기면서 우리 믿음을 새롭게 다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祖上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눈물의 메시야(히5:7<참고/ 롬12:15, 눅19:41,마23:37-39, 요11:35 >)
눈물을 흘리며 울어본 때가 언제입니까?
지난 주 금요일 아침 성령께서 기도하라고 강권하시는 음성을 듣고 성전에 올라가 엎드렸습니다. 찬양을 드리고 말씀을 정독한 후 기도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이제 시작한 우리 교회를 위하여, 나 자신의 목회를 위하여, 우리 성도 각 가정 가정을 위하여, 그리고 요즈음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동료 목회자들을 위하여,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 하였습니다. 한참 기도하다보니 어느덧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나 자신을 또 하나의 내가 물끄럼이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친구들도 알다시피 내가 그렇게 눈물을 흘려가며 기도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나 스스로도 놀랄만큼 통곡으로 기도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내 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기도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 것입니다. 눈물의 기도를 올린 후 나의 영혼은 이 세상의 모든 아침 처럼 맑고 투명함을 체험 할 수 있었습니다. < 비누가 몸의 때를 씻어내듯 눈물은 마음의 때를 씻어낸다 >는 金言의 현실화였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친구들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 입니까?
눈물의 화학적 성분
얼마전 뉴욕 타임스誌에 눈물의 화학 성분 보고가 게제 되었습니다.
눈물 = H2O + 라이소림 + 로이시닌게팔린, 라이소림 = 눈에 침입하는 온갖 잡균을 제거하는 항균 작용. 로이시닌게팔린 = 이 성분의 화학적 작용은 밝히지 못함. 그러나 특이한 것은 양파를 썰 때, 최류탄 가스의 침입, 演技를 위한 가짜 눈물, 자기 분에 못이겨서 울 때흘리는 눈물 등의 눈물에는 이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고, 위대한 예술에 감동하여 흘리는 눈물, 사랑하기에 흘리는 눈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흘리는 눈물, 진리와 진실이 통하여 너무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 등 이런 경우에 흘러나온 눈물 속에서만 이 성분이 검출 되었다는 것입니다.
타임즈 기자는 결론에서 < 이 로이시닌게팔린이라 명명된 이 성분의 화학적 작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이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 눈물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하늘을 감동케 하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 고 하였습니다.
눈물의 메시야
본문 히5:7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늘 아버지께 올렸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참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셨고 , 민망히 여기셨고 , 굶주린 백성을 그저 보낼 수 없으셨고 , 간음한 여인을 위로 하셨고 ,고민하고 슬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 속에는 로이시닌게팔린으로 가득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물의 메시야 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완악한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의 죽음 아니면 살릴 수 없는 인간의 罪性을 불쌍히 여기사 통곡 하셨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눈물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눈물이 없습니다. 미움 속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눈물이 없습니다. 인색한 사람에게는 눈물이 없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눈물이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눈물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니 예수님은 통곡과 눈물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눈물의 힘
모니카는 그 아들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혼을 위하여 15년 동안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만 그 아들은 주님께 돌아오기는커녕 더욱 타락의 那落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모니카에게 암부로시우스 목사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 그토록 많은 눈물과 기도의 자식은 결코 멸망치 않습니다 ! >. 그게 눈물의 힘입니다. 옛글에 三軍之師可奪 匹夫之心不可奪也 ( 삼군지사가탈 필부지심불가탈야 ) 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좌군, 중군, 우군의 장수들을 모두 사로잡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하나 그래도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한갓 보잘 것 없는 필부라 할지라도 그 마음을 빼앗기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항복 받는 길은 금력이나 권력이나 폭력이 아니라 눈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훗날 주님의 영광에 참예 할 것이라는 약속과 소망 때문이라기보다는 나를 위하여 흘리신 그 분의 통곡과 눈물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사람을 감동케 하고 진정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진정한 눈물입니다. 바로 그것이 눈물의 힘입니다.
사람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
늙고, 병든, 부모를 내다 버리는 우리들, 내 뜻에 맞지 않으면 언제라도 돌아서는 우리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때문에 방황하는 우리들,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교회의 은혜에 감사 할 줄 모르는 우리들, 빗나가는 우리 아이들, 이와같이 살벌한 우리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싸매주고 위로하여 온전한 삶으로 회복 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via-do-lo-ro-sa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죽음의 길을 걸어 가시던 우리 주님은 < 그 길이 무엇이냐고? 그 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눈물의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 처럼 너희도 너희 시대를 위하여 너희 자녀를 위하여 이 눈물의 길을 걷는 것이야 ! >라고 하십니다.
오! 거짓과 오만과 허영의 시대를 사는 기독자들이여 !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이제 우리와 우리 자녀가 살 길은 우리 모두가 진정한 눈물을 흘리는 길 밖에 없습니다. 눈물의 회개, 눈물의 감사, 눈물의 간구, 눈물의 사랑, 눈물의 감격, 눈물의 봉사 바로 그 길 뿐이라고 하십니다.
오! 주여 우리 모두의 삶 가운데 눈물의 강물이 흐르는 축복을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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