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왕하 5: 1 -14)
이야기의 힘
성경 말씀의 1/3이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엘리사와 나아만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인들이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겠거니 지레 짐작하여 " 안다치고 " 설교한다면 우리는 이야기의 큰 힘을 스스로 내팽개치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본문의 이야기를 많이 읽고 교인들에게 그 내용을 구수하고 실감나게 그림 언어로 잘 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로얄 박스가 없습니다.
엘리사는 아람왕의 친서를 가지고 온 아람의 큰 용사 나아만을 특별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항상 특별 대접을 받는 신분이었음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엘리사라는 이 약소국의 독특한 사람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마도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를 영접 할 것이라 " 고 생각 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초전박살 났습니다. 그렇다고 엘리사가 전에 없이 고자세를 취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접대한 것도 아닙니다. 엘리사의 이태도는 나아만이 아니라 아람 왕이 찾아와을지라도 그리하였을 것이며, 지극히 작은 종이 찾아왔을지라도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이 태도는 하나님 믿는 사람들의 특권이라고 생각 합니다. 약2:1-3의 말씀 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부자에 대한 태도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면 그건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 나 자신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아만을 대하는 엘리사의 태도에서 큰 교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만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여러 가지 위험이 뒤따를 것이란 점을 모르는 엘리사가 아닙니다만 그는 평소의 태도를 지켰습니다. 이것은 엘리사의 용기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확실한 자기 확인이었습니다. 비행기, 호텔, 연극장, 운동장, 등등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로얄박스가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집에는 로얄 박스가 없습니다.은혜가 은혜 됨의 오묘한 비밀본문10절을 보십시다.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여 지리라. 이 말을 듣고 나아만은 화를 냅니다. 우리가 나아만 입장이라면 어떨까요? 나아만이 화를 낸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不遠千里하고 이 곳 까지 왔는데, 엘리사라는 사람은 건방지게 집안에 앉아 나오지도 않고 그 하인을 시켜 이래라 저래라 하니 어찌 불쾌하지 않겠습니까? 목마른 사람이 샘 판다고 내 병을 고치려니 아니꼽고 다라와도 참을려고 하였는데 그 처방이라는 것이 도무지 말이 안되는 소리란 말입니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보다 낫지 아니하냐 !고 나아만이 분통을 터트린 것은 참 당연하다고 생각 합니다. 만약 엘리사의 처방전이 아주 구하기 어렵고, 값비싸고, 난해한 것이었다면 나아만은 그 약 구하다가 죽을지언정 엘리사의 모든 무례를 용서하고 흔쾌히 기쁜 마음으로 돌아 갔을 것입니다. 안 그럴까요?바로 여기가 인간의 오만과 하나님의 은혜 사이의 力學的 磁力場이 미묘하게 소용돌이 치는 대목입니다. 엘리사의 처방전이 300년 묵은 산삼 10뿌리 + 흰 사슴뿔10뿌리 + 히말라야 산꼭대기의 얼음물 100리터 였다면 나아만은 그 약 찾는 기쁨 속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네 몸을 일곱 번 씻으라! 이 간단하고 쉬운 처방이 오히려 나아만을 심히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왜 ? 나의 권세, 나의 실력, 나의 지혜를 과시 할 기회를 없애 버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죽을 수밖에 없으나 나는 나의 능력과 권세로 그 귀한 약을 구하여 내 힘으로 살아났다고 자랑 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는 데 대한 분노인 것입니다. 새벽부터 일한 사람들이 나중 온 사람과 똑 같은 삯을 받앗을 때 분통을 터트린 것과 같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인간의 오만과 허영이 있습니다. 여기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잘 나가는 상황 속에서 받지 못하고 절망과 극도의 불행 속에서 은혜가 은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자는 " 된장인지 x인지 " 꼭 찍어 먹어본 후, 경험 한 후에야 분별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척 보고도 아는 것입니다. 맞기 전에 알아 차리고 맞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금보다 귀한 지혜라고 한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아는 그 지혜 말입니다 !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톨스토이의 단편에 땅을 무척 좋아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님이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내가 네게 평당 10만원하는 땅을 이른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네 발로 걸어서 둘러온 땅을 모두 만원씩에 팔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새벽부터 걸었습니다. 조금 더 좋은 땅, 조금 더 비옥한 땅으로 거의 뛰다시피 걸었습니다. 전날 밤 흥분 때문에 잠을 설치고, 아침 식사도 먹히질 않았고, 점심 식사 할 여가도 없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갈 때, 아 저기 너무 아름다운 땅이 있습니다. 그는 드립다 뛰었습니다. 그 땅을 휘돌았습니다. 임금님이 성문 앞에 나와서 기다립니다. 해는 이제 막 지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죽을 힘을 다하여 뛰었습니다. 해가 꼴깍 하였을 때, 천만 다행스럽게 그 남자는 임금님 앞에 도착 할 수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말하였습니다. 수고 하였다. 약속대로 네가 돌아온 이 모든 땅을 네게 주겠다. 그런데 아무 소리가 없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나아만은 아람 나라의 큰 용사이나 문둥병자더라 " 이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톨스토이의 이야기에 나오는 마지막 말입니다. " 그 남자는 소원대로 넓은 땅을 얻었으나 기진하여 죽었더라 ". 이 말씀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큰 부자이나 문둥병자더라. 그는 큰 예술가이나 문둥병자더라. 그는 큰 목사이나 문둥병자더라. 그는 큰 장로이나 문둥병자더라. 그는 큰 과학자이나 문둥병자더라. 그는 큰 정치가이나 문둥병자더라. 그는 큰 문학자이나 문둥병자더라.
나는 나의 딸/아들이 큰 교수, 큰 예술가, 큰 목사, 큰 장로, 큰 재산가가 되어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내 딸/아들이 문둥병자가 된다면 차라리 그런 것 그만두고 건강 하기를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의인의 길, 악인의 길(잠 4 : 18 - 19)
의인과 악인
성경 말씀에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빛 아니면 어둠, 천국 아니면 지옥, 좁은 길 아니면 넓은 길, 육과 영, 위의 것과 땅의 것, 예와 아니오, 그리고 의인 아니면 악인입니다. 성경에서 의인은 누구인가 ? 경우 바르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인가? 성경은 그런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의인이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그 중심으로 믿고 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 하여 경외하고 예배하며 죄를 지으면 즉시 그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악인은 누구인가 ? 강도, 살인, 강간, 사기, 폭력, 배반, 시기, 거짓의 죄를 지은 사람인가 ? 성경은 그런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악인이란 하나님이 없다고 그 중심에 믿고 죄를 지어도 회개 할 줄 모르고 제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십자가 오른 편의 사람을 악인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믿었음으로. 그러나 그 왼편에 있었던 사람은 악인입니다.그는 회개 할 줄 몰랐고 끝까지 은혜를 거부하고 완악하게 제 뜻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길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다고 하였습니다. 즉 첫 새벽의 동터옴과 같다는 것입니다. 새벽이 시작되는 하늘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캄캄한 동편 하늘가에 새벽 기운이 서서히 서립니다. 희미한 밝음이 드러나고, 차츰 금빛 후광 같은 빛이 퍼지기 시작 합니다. 거기 서기로운 신비가 있고, 새 생명의 약동이 있고, 존재론적인 기쁨의 잉태가 있습니다. 의인의 길이란 그 새벽의 신비와 신선함과 투명한 맑음, 그리고 열려진 미래를 향한 희망의 분출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인의 길은 그 새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빛나서 정오의 빛 ! 원만한 광명에까지 이르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은 동터오는 새벽의 서기로운 빛이 점점 원만한 정오의 빛에까지 이르는 것 처럼 그 인생이, 그 인격이, 그 삶이 점점 풍성해지고, 품위가 있게되고, 고결하여져서 원만한 빛을 발하는 경지에 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을 나무에 비하여 말합니다. 나무가 자라듯 인격도 자라납니다.사람은 기성품이 아니라 되어져가는 존재입니다. 성경에는 < 될지어다 > 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어부가 되게 하리라, 믿은대로 되라, 사막에 샘이 솟으리라 곧 지금은 아니지만 되어질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지금 나의 인격, 인품이 졸렬하고, 천박하고, 더럽다고 할지라도 낙망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 시간부터 의인의 길을 간다면 그 보잘 것 없던 사람에게 새벽의 신비와 생명력이 흘러들어 갈것입니다.
악인의 길
악인의 길은 어둠 같다고 하셨습니다. 즉 그냥 어둠이 아니라 깊은 어둠입니다. 밤으로 향한 길목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깊은 어둠이란 어느 순간 갑짜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둑어둑한듯싶다가 어슴프레해지고 마침내 깊은 어둠으로 덮히게 됩니다.악인의 인생이 그와 꼭 같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의 공통점과 차이점
공통점은 의인이 되고, 악인이 되는 것은 어느날 갑짜기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빛나기도 하고 점점 어두워져 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점점이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정오의 빛도 새벽의 그 어슴프레한 빛에서부터 시작되고 깊은 어둠도 저녘의 희미한 어스름에서부터 시작 되는 것입니다. 어느날 아침 갑짜기가 아닙니다. 우연히 영약과 비급을 얻어서 짧은 시간 내에 무공이 높아져서 무림제패하는 무협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고매한 인품도 어느날 갑짜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 말종도 어느날 갑짜기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 점점 > 이라는 이 말씀에 함축된 희망과 절망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차이점은 그 방향성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의인의 방향은 빛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방향은 어둠을 향하고 있습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평상시의 생활을 보면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의인과 악인 모두 아침이면 세수하고, 변소갔다가, 밥 먹고, 차 타고, 일터에 가서 사람 만나고, 업무보고, 저녘에 일 마치고, 차타고, 집에와서, 몸 씻고, 밥 먹고, 신문보고, 텔레비젼 뉴스보고, 자리펴고 잡니다. 모양은 같은데 그 내적 방향이 다릅니다. 의인은 하루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고 회개 할 것은 회개하고, 감사 할 것은 감사하고, 새 지혜와 능력을 간구하고 삽니다마는 악인은 하나님이 없음으로 그냥 삽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을보면 별 차이가 없는듯합니다. 그러나 < 점점 > 그 하루하루가 지난 후에 보면 의인은 돋는 햇볕 같아 원만한 인격과 풍성한 삶을 이루고 악인은 깊은 어둠 같아서 도데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그 원인도 알 수 없게된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악인의 길은 육이 하자는대로 살아가는 길이요 의인의 길은 영이 하자는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육은 비본질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영은 본질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악인은 비본질적인 것들에 얽매어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갑니다. 의인은 그 비본질적인 것을 매일매일 벗어버리고자 힘쓰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 ? 그 답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분명히 새겨져 있습니다. 일일이 나열 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악인은 그 비본질적인 것들 속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요 의인은 그 비본질적인 것들을 하나하나 버려가는 사람입니다. 간단한 예를 든다면 열등의식입니다. 자기보다 조금만 하수라고 느껴지는 사람 앞에선 우월감에 희열을 느끼고, 조금만 상수라고 느끼는 사람앞에선 패배감에 주눅들어 " 별것도 아닌 것이 건방져 " 하면서 시기 질투하는 열등의식 말입니다. 악인은 그 비본질적인 열등의식 가운데 浮游 합니다마는 의인은 가난한 데 처 할 줄도, 부한 데 처 할 줄도 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비본질적인 열등의식에서 벗어나 남을 멸시하지도, 남에게 주눅 들지도 않는 참 자유의 빛을 내는 것입니다. 악인은 비본질적인 것들 속에서 자신과 남을 어둡게하고, 의인은 그 비본질적인 것들을 버리므로 자신과 남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빛이 점점 더 원숙하여 정오의 빛 같이 되는 것입니다.
찬양의 힘(시 108 : 1 - 5)
영성 생활의 세가지 근본 구조
문제의 제기 - 신앙인의 영성을 지켜주는 삼요소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입니다. 예수님의 최후만찬 현장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예수님의 말씀(막14:22-25, 요13-16장의 고별 설교)과 마지막 기도(막14:32-42, 요17장)그리고 찬양(막14:26)이 있습니다. 요즈음 미래 목회는 영성 목회라는 유행어가 있습니다. 영성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말을 아무리 바꾸어도 영성이란 < 말씀과 기도와 찬양 > 의 삶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말씀과 기도에 대한 설교는 많은데 찬양에 대한 설교는 비교적 적다 싶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찬양의 다양한 증거들
*노래로 찬양 - 여호와는 나의 힘과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시28:7)
*손벽치며 찬양 -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여호와께 외칠지어다 찬양하라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시47:1)
*지혜의 시로 찬양 - 찬양하라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시47:6-7)
*나의 혀로 찬양(간증으로) -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시35:27-28)
*소망을 품고 찬양 -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양하리이다(시71:14)
*손을 들고 찬양 -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34:2)
*춤을 추며 찬양 -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시149:3)
*온갖 악기로 찬양 -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 지어다 큰소리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시150:3-4)
*마음으로 찬양 -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5:19)
*감사함으로 찬양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위에 사례로 열거한 성경 말씀들을 보면 인간의 智, 情, 意, logos, ethos, pathos, 인간의 전존재를 다 바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골3:16을 보면 말씀과 찬양이 항상 동시적인 관계임을 잘 보여주고 있지않습니까! 마틴 루터와 찬송가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빌리그래함과 복음송 가수 아니타 브라이언트, 마틴 루터 킹 목사와 We shall over come, 위대한 말씀과 위대한 찬양이 항상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음악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향후 우리 교회가 이 찬양의 영성에 대하여 정성을 다하여 다듬어가야 할 것입니다.
찬양의 힘
"찬송을 부르세요, 찬송을 부르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라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정말 찬양에는 위대하고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전에 영락교회 학생 성가대를 인솔하고 가평 육군 야전병원에 위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경춘선 열차는 행락객들로 초만원이었습니다. 의자에 앉은 사람, 바닥에 신문지 깔고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 이곳저곳에서는 유행가, 팝송, 뽕작으로 시끌벅적하였습니다. 열차 안 맨 끝으머리에 둘러모인 우리 학생 성가대원들은 자연스럽게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나면서 묘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열차 안에서 따로따로 놀던 행락객 그룹이 어느덧 하나로 합쳐서 우리 학생 성가대와 대결하는 양상을 띠게 된것입니다. 저들은 신나고 템포 빠르고 높은음자리표가 많은 갖가지 유행가로 대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저들이 우세한 듯 싶었습니다. 저들은 연방 담에는 < 돌아와요 부산항 > 이다! 담에는 < 소양강 처녀 > 다! 담에는 < 윤수일의 아파트 > 다 ! 해가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한 20곡 쯤 부르고 난 후부터 점점 자중지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두 다 아는 노래가 그리 많지도 못하고 안다해도 유행가 1절이면 땡이지 유행가를 2절 3절까지 아는 사람이 어디있나요. 그런데 우리는 558장이나 되는 무진장한 레파토리에다가 그것도 3-4절이 보통이고 어떤 곡은 7절이나 되는 것도 있으니 저들이 까무라칠 일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20여곡을 악을 박박쓰면서 불렀을 때 우리는 한 7곡이나 불렀나요? 지금도 잊혀지 않는 것은 우리가 <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453장 > 일 절을 막 끝냈을 때 열차 안은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습니다. < 예쁜 새들 노래하는 아침과 노을 비끼는 고운 황혼에 >로 이어지는 2절의 찬양은 따사롭고, 온유한 성령의 바람처럼 온 열차 안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열차 안을 휩싸고 돌던 그 거룩한 찬송의 힘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니 놀라운 일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 학생 성가대의 힘있는 혼성4부 찬송이 끝나자 모두들 우뢰와 같은 박수로 화답하였습니다.
찬송에는 악한 생각을 깨트리는 힘이 있습니다. 찬송에는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흥회 때는 말씀 전에 열심히 손벽을 치며 찬양 인도를 합니다. 찬송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멀리 날려보내는 힘이 있습니다. 찬송 부르다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재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찬송을 부르면 성령의 기운이 운행하여 우리의 영혼이 신령한 영력을 얻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의 육체 오장육부까지 강건케 됩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 하루 적어도 10곡이상은 곡 불러야 합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찬송도 정성을 다하여 부를 때 그 힘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하루 10곡 이상 찬양 드리겠노라고 결심한 후 정성은 없이 하루 10곡 찬양하기로 했으니 아뭏튼 부르긴 불러야지 하는 율법적인 태도로 전락하여 하루 무조건 10곡을 불러치운다면 안 부르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태도를 가장 미워하셨습니다. 그런 신앙적 태도를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지성으로 드리는 찬송에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찬송 없는 말씀, 찬송 없는 기도는 삼위일체 가운데 하나가 빠진 격입니다. < 말씀 + 기도 + 찬송 > 이야말로 영성의 삼위일체입니다. 찬송을 부르십시오 진정으로 !
천국문의 비밀(계 21 : 18 -27)
門의 의미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문이 있습니다. 동대문이나 천안문 같은 성문, 대문, 현관문, 방문, 고속도로 출입문, 김포 공항 출입국문 등이 있습니다. 이런 실제의 문 말고 등용문, 은행문, 취직문, 대학문, 고생문 같이 상징적인 문도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는 문의 의미가 무엇인가 ? 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아무 생각없이 문을 여닫고 출입하고 있습니다마는 문에는 아주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문이란 < 자격 >을 말합니다.실제적인 문이든 상징적인 문이든 문이란 < 자격 >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열리는 것이지만 < 자격 > 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단코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집 대문을 낮이나 밤이나 가리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출입 할 수 있지만 타인은 안됩니다. 극장문은 표를 산 사람에게는 열리지만 표를 사지 않은 사람에게는 열리지 않습니다. 대학문은 입학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활짝 열리지만 불합격한 사람에게는 꽉 닫혀있습니다. 즉 문이란 그 문이 어떤 문이든지 그 문을 통과 할 수 있는 일정한 < 자격 >이 있느냐, 없느냐를 구별하는 구체적이고도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 문의 비밀
그런데 본문을 보면 천국에도 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 천국에도 문이 있다 ! > 는 이 엄숙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 그것은 두 말 필요 없이 < 자격 >이 있는 사람에게는 열리지만 < 자격 >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코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천국문을 통과 할 수 있는 < 자격 >은 무엇인가 ? 라는 물음이 나오게 됩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성경은 상징적으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천국문은 진주문이라는 것입니다. 천국문이 아름답고 값비싼 다이야몬드나 루비, 싸파이어 같은 보석이 아니라 진주로 만들어졌다는 데 그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더욱이 이 진주문이란 것이 어떻게 만들어졌기에 진주문입니까? 진주로 벽돌 쌓듯이 쌓아 놓았기에 진주문인가요? 아니면 타-일 붙이듯 진주로 다닥다닥 붙여 만들었기애 진주문인가요? 21절 본문을 유심히 읽어 보십시오. <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라고 하셨습니다. < 문마다 안 진주 >라 ! 즉 매 문마다 커다란 한 덩어리 진주를 파서 만든 문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그 진주의 크기가 어떻하겠습니까 ?
여기 비밀이 있습니다. 진주 보다 훨씬 귀하고 값비싸고 화려한 보석이 아니라 진주로 천국문을 만들어 두신 비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문을 통과 할 수 있는 사람의 < 자격 >을 이 진주 문으로 계시하여 주신것입니다.
진주문의 비밀 - 진주문으로 계시하신 그 자격은 무엇인가?
문이란 < 자격 >을 상징하고, 천국에도 문이 있다는 것은 < 자격 >이 있는 사람만 들어 갈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들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국문을 커다란 한 덩어리의 진주로 천국문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진주문으로써 무엇을 상징 하셨을까? 어떤 < 자격 >을 말씀하신 것일까? 그 비밀은 진주가 그 어떤 보석과도 철대적으로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비밀1. 진주는 고통, 고난, 자기 희생의 산물입니다. 다른 모든 보석은 이미 결정론적으로 수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마는 진주는 진주 조개의 눈물과 피와 고통의 산물입니다. 진주 조개의 피와 아픔이 진하면 진 할수록 그 진주는 더욱 영롱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침입한 저 수많은 슬픔과 부조리에 대하여 얼마나 나의 눈물과 피와 수고로 감싸안았는가? 즉, 인생의 여정에서 눈물과 고난과 아픔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았는가? 회피하였는가?에 그 < 자격 > 이 판가름 난다는 것입니다.( Agony = 고난, 눈물 )
비밀2. 진주는 양파 껍질 같이 무수히 감싸안는 막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모든 보석은 쪼으거나, 깍거나, 녹이거나, 잘라서 만들어집니다마는 진주는 자연 그대로입니다. 다른 보석은 불순물이나 흠집들을 깍아 없애는 과정에서 얻어집니다마는 진주는 오히려 그 흠집과 불순물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진주의 이런 특성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이나 교회나 사람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꼭 없어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것 없이 밥맛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눈물과 기도로 감싸안아서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라야 천국문을 통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얼마든지 천국 문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이지요. ( 통합, 인종차별폐지 )
비밀3. 진주가 다른 보석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다른 모든 보석은 생겨난 그래로 있지마는 진주만은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진주는 자라납니다. 단번에 자라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라나는 것입니다. 진주의 이 특성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믿음이 점점 자라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만한 그 믿음 자체로 산을 옮긴다는 것이 아니라 그 겨자씨가 자라날 것을 전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처음 믿음 그대로가 아니라, 줄어드는 믿음이 아니라, 자라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천국문을 통과 할 < 자격 >이 있다는 뜻입니다.( 점진적 성장 )
천국 문은 진주 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이 세상을 위하여 눈물을 흘린 사람, 이 세상을 화평케 한 사람, 그 믿음이 꾸준히 자라나는 사람이라야 그 문을 통과 할 수 있다고 한 덩어리 큰 진주 문으로 그 뜻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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