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현대중국 정치론] 제3부 제2장. 중국공산당의 역할 변화

지식창고지기 2009. 6. 30. 01:06

[현대중국 정치론] 제3부 제2장. 중국공산당의 역할 변화

 

Ⅰ. 서론

 

사회주의 정치체제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중의 하나는 당의 영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전체주의적 체제의 한 유형으로 파악하는 서구 학자들이 당지배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국가 지도자들 자신도 또 당의 영도권을 사회주의체제의 가장 중핵적인 특징 중에 하나로 들고 있다. 예를들면 수스로프(Suslov)와 같은 소련 공산당 이론가에 의하면 사회주의 국가의 특징은 노동계급의 전위대로서 공산당의 독재, 노동자 · 농민의 연대, 자본주의적 소유제의 철폐와 국유제의 확대, 그리고 계획경제 등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점에서는 정치체제의 개혁과 경제개혁을 주장한 등소평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등소평과 중국의 개혁지도자들은 사상해방과 사회주의체제의 민주화, 그리고 경제개혁을 강조하면서도 중국적 사회주의체제는 4가지 기본적인 조건을 견지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즉 사회주의노선의 견지, 마르크스 · 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의 견지, 중국공산당의 영도권의 견지, 프롤레타리아전정과 당의 지배는 사회주의 정치체제의 구조적인 특징이며, 따라서 사회주의체제의 정치개혁의 구조적인 제약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사회주의체제에서 당의 위치와 역할은 일반적인 정당과는 물론 다르고, 권위주의적인 일당지배체제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르토리(Sartori)와 같은 학자는 사회주의체제에서의 당은 그 자체가 하나의 체제(the party as a system)이며 당 자체가 모든 것(party a whole)이라고 하였다. 즉, 사회주의체제에서는 당이 곧 국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체제에서 공산당의 위치는 이론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당의 기능과 역할이 현실적으로 모든 역사적 상황과 모든 사회에서 동일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당의 역할과 기능은 역사적인 환경과 혁명과정의 특이성, 그리고 근대화`과정에서 끊임없이 대두되는 문제에 대응하여 변모되어 왔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전위대로서 공산당」의 위치와 역할은 이론적으로 공유하면서도 각 나라의 역사적 · 정치적 환경에 따라서, 그 역할의 특이성이 나타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소련의 공산당과 중국의 공산당의 성격과 기능이 다르며, 또한 혁명과정에서 공산당의 역할과 통치과정에서 공산당의 기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기서는 중국공산당이 중국혁명과 사회주의사회의 건설과정에서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어떻게 인식하였으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당노선과 정책으로 표현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위해 중국공산당의 당장과 당의 주요 정치결의안, 그리고 주요 당지도자의 논문 등을 분석하였으며 특히 중국공산당과 중국 사회의 여러 계급과 계층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중국공산당의 노선과 정책의 변화를 구명하였다.

 

Ⅱ. 중국공산당의 노선과 역할인식

 

1.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당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러시아의 볼셰비키운동은 중국을 비롯한 비서구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실현하고자 하는 변혁운동에 중대한 이론적인 영향을 주었다. 첫째로, 자본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중국과 같은 사회에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는 점이 인식되었다.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은 비서구사회일지라도 이미 세계체제적인 자본주의 침투로 계급구조와 사회경제구조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과 같은 사회에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로, 비서구사회에서 순수한 노동계급은 숫적으로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들만이 역사적 변혁을 관철시킬 수 있으며, 모든 피압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라는 논리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헤게모니를 주장했다. 중국의 마르크시스트들도 러시아의 마르크시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부르조아 계급의 동요성․이중성을 이유로 민주혁명 단계에서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셋째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전위당이 필요하며, 이 경우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체 이익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체제에서 억압받는 모든 계급과 계층의 진정한 이익을 대변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임무는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모든 혁명적 계급과 계층의 단결을 바탕으로 민주적 혁명을 완수하고 점차로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넷째로, 중국공산당은 레닌과 볼셰비키당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구축하여 반혁명세력에 대한 독재와 인민대중에 대한 민주를 구현한다는 소비에트 정권의 형태를 수립하고, 사회주의 사회에로의 이행작업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공산당운동은 레닌과 볼셰비키당의 경험에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의 특수한 역사적 · 사회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당의 역할에 대한 러시아의 경험은 부분적으로 수정 · 보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로, 중국에 있어서 혁명운동은 도시의 산업노동자가 주도했다기보다는 농촌지역의 광범위한 농민대중들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소위 인민대중에 대한 개념이 러시아에서보다 더욱 강조되었다. 더구나 러시아의 마르크시스트들과는 달리 인민주의자들과의 격렬한 논쟁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의 마르크시즘은 인민주의적 경향과 자연스럽게 결합됨으로써, 인민민주전정이라든가 대중노선과 같은 중국 특유의 이론과 실천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둘째로, 러시아의 볼셰비키당의 정치적 기반은 도시의 산업노동자, 특히 가장 현대적인 부문에 종사하는 산업노동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볼셰비키당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당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중국공산당의 경우에는 대부분 농민들로 구성되었으며 농촌지역에서 그 세력기반을 확충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노동자 계급의 정당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실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중국의 마르크시즘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확대 해석하려고 하거나 계급적인 기준보다 이데올로기적인 기준을 더욱 강조하는 경향이 있게 되었다.

 

끝으로, 중국혁명과정에서 ‘무장투쟁과 농민을 주체로 하는 군대는 중국혁명의 주요 투쟁형식이며, 조직형태’ 이고, ‘무장투쟁과 당의 지도 그리고 통일전선이야말로 중국혁명을 성공하게 한 세 가지 중요한 무기’라고 한 모택동의 평가에서 엿볼 수 있듯이, 중국공산당과 중국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중국혁명에 대한 독점적인 공헌을 주장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볼셰비키당과는 달리 군부에 대한 명확한 지도체계를 수립할 수 없었으며, 또한 여러 사회계급과 정치세력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오랫동안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데 신경을 더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중국공산당은 볼셰비키당을 모범으로하여 형성되고 발전해온 당’ 이지만 중국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과 혁명경험으로 말미암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당의 역할에 대하여 볼셰비키당과는 부분적으로 다른 인식을 하게 되었다.

 

2. 초기 공산주의운동과 중국공산당의 역할 인식

 

중국공산당은 군벌통치와 제국주의적 지배를 종식시키고 봉건적 사회질서를 개혁하여 신중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을 주도한 소수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1921년 7월에 창당 되었다.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실현하고 모든 계급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전정을 수립할 것을 최종목표로 하는 중국공산당의 창업(創業)은 중국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사회민주노동당과 마찬가지로 중국공산당도 창당 당시에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을 지닌 소수의 인텔리겐챠들의 조직체에 불과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기본 성격과 당면 과제에 대하여는 명확한 방향이 정립되지 못했다. 특히 중국공산당이 즉각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국민당과 같은 기존 정당과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격렬한 논쟁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창당 직후에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이 다른 대의원들이 탈당하게 되면서 중국공산당의 당면 과제와 역할에 대하여 보다 명확한 인식을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22년 7월에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2차전국대표대회의 시국선언문과 결의문은 다음과 같은 당의 인식을 잘 반영하였다. 즉,

 

(1)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당이며, 중국공산당의 최종목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조직하여, 노농동맹(勞農同盟)을 기초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전정의 수립과 사유재산제의 철폐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공산주의사회를 실현하는 것이다.

 

(2) 그러나 반봉건적 · 반식민지적인 상태에 있는 중국의 당면과제는 반군벌 · 반제투쟁을 전개하여 민주적 개혁을 성취하고 중국의 통일과 자주성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국민혁명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빈농 및 소자산계급과의 민주적 연합을 구축해야 하며, 자본가 계급과도 협력할 수 있다.

 

(3)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민주혁명과 국민혁명과정에서 부르조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민당과 협력할 수 있지만, 중국공산당의 독자성은 유지해야 하며,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운동을 주도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인식에서 중국공산당은 손문(孫文)의 국민당과 대등한 입장에서 합작을 추진하면서, 민중운동, 특히 대도시에서 노동운동과의 접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있어서 국민혁명의 주도세력은 국민당이 되어야 한다는 코민테른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중국공산당은 당(黨) 대 당(黨)의 합작을 포기하고 국민당에 개별적으로 입당하는 당내합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당과의 당내합작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지원하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되며, 노동자와 농민에게 선전과 조직활동을 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의 특수한 과제라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제 1 차 국공합작시기(1924~1927)에 민중운동부문을 확대 · 조직하는데 총력을 경주하였고, 그 결과 민중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국민당내의 반공세력을 자극하여, 마침내 1927년 4월 장개석(蔣介石)의 상해쿠테타를 계기로 국공합작은 결렬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개석의 상해 쿠테타 직후에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 5 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여전히 국민당 좌파와의 합작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제 5 차 대회에서 통과된 결의문에 의하면, 혁명운동이 급속하게 발전함에 따라서 대(大)자산계급과 봉건적 반동세력, 군벌세력 그리고 제국주의세력이 반혁명동맹을 결성하고 공개적으로 국민혁명을 배반했으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였다고 규정하면서도, 중국공산당은 노동자, 농민 및 도시의 소자산계급과의 연합을 견지하기 위해서 급진적인 계급투쟁을 억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좌파정권마저도 반공정책을 선포하자, 중국공산당은 1927년 8월 7일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국공합작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진독수를 퇴진시키고, 당노선을 정리하였다. 즉,

 

(1) 진독수가 중심이 된 과거의 당지도부는 계급투쟁과 민족해방투쟁을 서로 상반되는 모순관계로 파악하였고, 국민혁명의 성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 농민들의 혁명적 계급투쟁이 억제되어야 한다고 인식한 것은 잘못이다.

 

(2) 민주혁명단계에서 브로조아 계급의 동요성과, 봉건세력과 군벌세력 그리고 제국주의세력의 유착 가능성을 간과했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적 배반을 예측하지 못했다.

 

(3) 중국의 민주혁명과 국민혁명은 노동자와 농민계급의 계급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 · 조직함으로써 완수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임무는 노동자계급의 무장과 농민 봉기를 계획하여 반(反)혁명정권을 타도하는 데 총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8·7긴급회의 결의에 따라서 구추백(瞿秋白)을 중심으로 한 당중앙은 남창(南昌)봉기와 호남(湖南), 호북(湖北), 강서(江西), 광동성(廣東省)에서의 추수(秋收)폭동, 그리고 광동콤뮨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1928년 6차당대회는 8·7긴급회의에서 결정된 기본노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구추백의 과오를 객관적인 정세와 조건에 대한 판단착오의 결과이기 때문에 전술적 과오에 불과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8·7긴급회의에서의 인식을 재확인하였다.

 

그리하여 이입삼(李立三)은 1929년에 세계적 경제위기가 확산되고 국민당정권의 내분이 촉발되자, 혁명의 고조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수개의 지방에서 무장봉기를 추진하라고 지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장봉기는 대중들의 무관심과 반혁명세력의 역량에 대한 과소평가, 그리고 홍군의 준비부족 등으로 무참히 좌절되었고, 대도시에서 공산당의 조직은 거의 전멸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같은 구추백 · 이입삼노선의 실패에 대하여 모택동은 이들이 중국혁명의 장기성과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성급하게 혁명의 승리를 획득하려고 한 데에 원인이 있다고 비난하면서, 농촌사회에서 혁명근거지를 확보하고 점차로 농촌의 혁명근거를 확대하여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택동은 중국사회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인민대중의 진정한 이익을 대변하는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중국혁명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입삼 · 구추백 등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낙관주의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제국주의세력과 반동적 연합세력이 강고하기 때문에 중국혁명은 장기적인 투쟁과정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도시에서 반혁명세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의 도시혁명경험을 기계적으로 중국에서 반복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중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혁명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가? 모택동에 의하면, 그것은 농촌혁명근거지의 확보와 무장투쟁, 그리고 대중노선의 발전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하였다. 첫째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앙정부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중국의 농촌사회에서 혁명근거지를 확보하고 점차로 확대한다는 것이며, 둘째로 지주와 자산계급의 무장역량을 고려할 때, 중국에서의 혁명은 스탈린이 지적한 것처럼 ‘무장한 혁명세력과 무장한 반혁명세력’의 투쟁이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농민을 주체로 하는 군대를 혁명의 주요 투쟁형식으로 삼지 않을 수 없고, 셋째로 홍군(紅軍)과 혁명근거지를 바탕으로 건설된 소비에트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계급투쟁보다는 광범위한 인민 대중의 연합을 강조하는 대중노선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략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중국공산당은 1931년 11월에 강서성 서금에서 모택동을 주석으로 하는 중앙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중국혁명은 산업노동자를 주체세력으로 하는 도시의 민중혁명의 성격으로부터,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농촌혁명의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3. 항일통일전선과 중국공산당의 역할 인식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국공산당은 도시혁명에서 농촌혁명에로의 노선전환을 통하여 1927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1931년에는 강서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하여 농촌지역에서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공산당의 세력확대는 국민당정부의 대규모 소공전을 촉발함으로써, 1934년에 강서소비에트정권을 포기하고 대장정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공산당은 또 다시 존망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국공산당은 일대 국면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의 중국침략과 항일운동의 확대가 중국공산당에게 새로운 출구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31년 9월에 발생한 만주사변은 중국 국민들의 민족주의적인 항일운동을 촉발하였다. 특히, 대도시 부르조아 계급과 지식인, 학생들 사이에는 내전종식과 항일투쟁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부르조아 계급을 제외한 민중들이 중심이된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을 제창하였다. 즉, 중국공산당은 항일투쟁을 위하여 국민당과의 타협과 공존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공산당의 태도는 1934년에 개최된 전국 소비에트 대표 대회선언과 모택동의 보고에 반영되었다. 즉 국민당정권은 제국주의 세력과 야합하여 중국공산당의 소비에트 정권을 말살하고 중국을 식민지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국민당정권과 소비에트정권 사이에는 평화와 공존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였다. 이때에 모택동도 “올바른 민족혁명전쟁을 진전시키고, 제국주의의 중국분할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국주의의 중국분할을 돕고, 민족혁명전쟁을 압박하는 국민당 통치를 전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은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한 코민테른의 위협감 증가, 광범위한 국민적 항일운동의 전개, 그리고 국민당정권의 군사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공산당의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적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같은 중국공산당의 인식 변화는 대장정 도중인 1935년 8월 1일에 발표된 「항일구국을 위해 전국동포에게 고하는 글」과, 1935년 12월에 합북(陜北) 와요보(瓦요堡)에서 개최된 중앙정치국 결의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중국공산당은 항일(抗日)을 전제조건으로 국민당정권의 타도를 요구하던 과거의 입장에서 벗어나, 항일투쟁을 위해 모든 정치집단과 사회계층이 단합할 것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즉, 아직도 반장개석(反蔣介石)의 입장을 명백히 하면서도, 중국공산당은 항일구국을 쟁취하기 위하여 각당파나 각단체가 공동으로 국방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공산당의 태도 변화는 1935년 12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회의에서 통과 발표된 「목전(目前)의 정치형세와 당의 임무에 관한 결의」에서 더욱 명백히 제시되었다. 중국공산당은 이 결의문에서

 

(1) 일본의 중국침략으로 말미암아 정치정세의 기본적인 변화가 있게 되었다고 전제하면서,

 

(2) 정치정세가 변화하게 된 것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하여 중국의 각 계급과 계층, 정당과 무장세력간의 관계가 변화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3) 특히 광범위한 소자산계급과 일부 민족자산계급, 그리고 심지어는 일부 군벌의 정치적 태도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여, 중국공산당은 이들을 항일전선에 합류하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4) 반일(反日) · 반(反)매국적의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서, 중국공산당은 소비에트 공농(工農)공화국을 인민공화국의 형태로 변경함으로써, 노동자와 농민을 대표하는 정권이 아니라 중화민족을 대표하는 정권임을 선언하고, (

 

5) 계급투쟁을 격발할 수 있는 정책, 특히 농촌사회에서의 토지정책을 변경함으로써, 부농과 중농의 지지를 획득하고, 도시지역에서 민족공상업자본가의 활동과 참여를 확대해 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중국공산당은 광범위한 중산계급과 중간세력을 항일통일전선에 규합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점차로 반장(反蔣)노선에서 연장(聯蔣)노선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모스크바의 영향을 받은 왕명(王明)과 같은 당내 지도자들은 ‘현재 중국에 있어서의 반제국주의적 통일전선의 문제는 제 1 의적으로 중요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것’ 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공산당의 인식변화는 지식인과 학생들, 그리고 장학량(張學良)과 같은 일부 군벌세력들이 주장하는 ‘내전중지, 일치항일’ 의 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1936년 12월의 서안사건(西安事件)을 계기로 장개석과 국민당정권은 제 2 차 국공합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을 시작으로 중 · 일의 전면전쟁이 개시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합작은 더욱 신속히 구체화되었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1945년까지 국공합작이 계속되었다.

 

제 2 차 국공합작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맞설 수 있는 전국적인 규모의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강서소비에트의 붕괴와 대장정으로 거의 전멸의 위기에 봉착했던 중국공산당이 1945년 월에 제 7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면서 121만명의 당원과 91만명의 홍군을 보유하게 되었고 중국 전역에서 19개의 혁명근거지를 수립하여 9,550만명의 인구를 통치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공산당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달성한 이유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중국공산당이 중국혁명의 기본적인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사회혁명의 요구와, 계급협력을 강조하는 민족혁명의 요구를 통일전선전략으로 수용 · 발전 시켰다는 점이다. 사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중국공산당은 1935년의 ‘8·1 선언’ 이후, 특히 1937년의 제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이후, 중국혁명의 두가지 갈등적인 측면, 즉 계급투쟁과 계급협력의 요구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종합하려는 노력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발표된 거의 모든 모택동의 저작과 정책문건은 중국사회와 중국혁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1) 중국사회는 반(半)봉건 · 반(半)식민지사회이다. 따라서 중국사회는 두 가지 기본적인 모순이 있다. 즉 중국민족과 제국주의 사이의 모순과, 봉건세력과 인민대중 사이의 모순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사회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중국공산당의 과제는 반제(反帝)운동으로 민족모순을 해결하고, 반(反)봉건투쟁을 통해서 계급모순을 해결하는 ‘신민주주의 혁명’을 실현하는 것이다.

 

(2) 일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중국사회의 두 가지 모순 중에서 민족모순이 주요한 모순이 되며, 중국 사회 내부 계급간의 모순은 부차적인 모순이 된다. 따라서 항일전쟁 시기 동안에 중국공산당의 과제는 주요한 모순과 부차적인 모순을 명확히 구별하고, 주요 모순의 주요한 적에 대하여 그것과 대립하는 모든 계급세력을 동원하고 단결하여 주요한 적을 격멸하는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한다.

 

(3) 비록 현 단계에서 민족모순이 주요 모순이 되었다고 하지만, 계급모순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계급모순은 여전히 존재하며, 계급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통일전선은 계급투쟁의 포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형식을 조정할 것을 요구한다.

 

(4) 통일전선은 단순한 대동단결은 아니다. 통일전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계급동맹에서 어떤 계급이 기본적 대중이며, 혁명의 지도권을 누가 장악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신민주주의 단계에서 계급독재나 일당독재를 실시하지 않을 것을 명백히 하면서도 중국사회의 절대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노동자와 농민이 기본대중이며, 이들의 기본이익을 대변하는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통해서 신민주주의혁명의 과제를 완수하여 중국혁명의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에로 이행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신민주주의 단계에서 중국공산당의 역할과 과제에 대한 인식은 1945년 6월 11일에 제 7 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통과된 당장(黨章)에 반영되었다. 즉, 중국공산당은 ‘중국노동계급의 조직화된 권위’이지만 노동계급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민족과 인민대중의 이익을 대변하여 중국에서 신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점차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다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중국공산당의 과제는 노동자와 농민, 소자산계급과 민족자산계급 등 모든 민주세력을 단결시켜 중국민족의 해방을 달성하고 봉건적 압제를 청산함으로써,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부강한 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중국공산당은 모든 혁명적인 세력과 긴밀한 협력을 확대해야 하며, 중국인민의 이익을 반영하도록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4. 인민민주전정과 중국공산당의 역할 인식

 

중국공산당은 항일통일전선 시기에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1945년의 제 7 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모택동은 인류역사의 동력은 인민뿐이라고 선언하면서, 중국공산당만이 중국인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였다. 모택동에 의하면 국민정권은 대지주와 금융자본가 및 매판자본가들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항일전쟁에 대해서는 열의가 없고 인민의 억압만을 일삼기 때문에, 중국공산당만이 중국의 진정한 독립과 민주화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정부와의 합작을 정면으로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모택동에 의하면, 중국인민을 일본침략자의 압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고 중국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국민당 정부의 개조와 더불어 모든 정당 · 사회단체 및 무소속대표들로 구성되는 ‘과도연합정부’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모택동의 연합정부론을 바탕으로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민족자본가와 지식인 등이 주도하는 도시지역에서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공산당의 주요 과제는 홍군과 농촌혁명 근거지를 공고히 함으로써, 국민당과의 군사대결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국의 중개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진행되었던 평화협상이 결렬되고 내전에 돌입하게 되자, 중국공산당은 농촌지역에서 지주계급을 축출하고 빈농 및 중농의 지지를 확대하고자 급진적인 토지혁명을 추진하는 동시에, 도시지역에서는 모든 진보세력을 규합하여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장개석 정권을 타도하는 것을 목표로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 군사적 공세는 국민당정권의 급속한 붕괴를 가져왔고, 마침내 1949년 중국공산당은 천하통일을 달성하였다. 모택동은 국공내전에서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진 1949년 7월, 중국공산당 창당 28주년 기념식에서 새로이 탄생할 중화인민공화국은 ‘인민민주전정’이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인민민주전정이란 인민에 대해서는 민주주의를 실시하지만, 인민이 아닌 반동계급에 대해서는 전정을 시행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인민인가? 모택동에 의하면 현단계에서 인민은 노동계급과 농민, 도시 소자산계급과 민족자산계급들이며, 이들은 노동계급과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서 단결하여 자기들의 국가를 건립하고, 지주 · 관료자본가 및 국민당 반동파에 대하여 독재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민주전정 시기에 중국공산당의 과제는

(1) 인민의 이익을 지키고 적대계급을 억제하기 위하여 국가기관을 더욱 강화하고,

(2) 반동계급에 대하여는 강제적 사상개조를 그리고 인민내부에서는 자발적인 자기교육을 실시하여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하고,

(3) 민족자본가를 이용하여 인민들의 협력을 얻어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에로, 신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사회로 확실히 전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949년 9월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통과 · 공포된 공동강령과 1954년 9월에 공포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에서도 재확인 되었다. 즉, 1949년의 공동강령과 1954년의 헌법에서 중국은 노동자계급이 지도하고 노농동맹을 기초로하여, 노동자 · 농민 · 소자산계급과 민족자산계급을 결합하는 인민민주통일전선을 견지하는 인민민주전정의 국가이며, 이와같은 인민민주전정은 신민주주의 단계에서 사회주의 단계로 이전하는 과도기의 국가 형태이란 점, 그리고 이러한 과도기에 당과 국가의 기본임무는 인민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일체의 반(反)혁명분자를 숙청하며, 사회주의공업화를 실현하고 농업 · 수공업 및 자본주의적 공상업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를 완성하는데 있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과도기의 총노선에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강력한 인민정부를 조직하고, 토지개혁, 항미원조(抗美援朝) · 반혁명분자진압 · 3반5반(三反五反)운동 · 사상개조운동과 같은 대규모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53년부터 제 1 차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농업과 수공업, 도시상공업부문에 대한 사회주의 개조운동을 적극화하였다. 이러한 질풍노도와 같은 대중운동으로 말미암아 중국사회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1956년 9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 8 차 전당대회에서 모택동, 유소기, 등소평 등에 의하면,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진행된 사회주의 건설과 사회주의 개조운동으로 중국사회의 계급관계에 기본적인 변화가 있게 되었다. 즉, (1) 대만을 제외하고 중국에서 모든 제국주의 세력은 축출되었고, 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였던 관료 · 매판계급은 소멸되었고, (2)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지주와 부농계급이 계급으로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으며, (3) 민족자산계급은 노동대중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있으며, (4) 대부분의 농민은 합작사에 가입하여 집단노동에 종사하게 됨으로써 사회주의적 노동대중이 되었으며, (5) 노동계급은 명실공히 지도적 계급이 되었고, 노동계급의 양적 팽창과 더불어 의식과 문화수준의 괄목할만한 향상이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중국사회의 계급관계가 변화되면서, 중국공산당의 역할과 기능도 놀랄만큼 변모하게 되었다. 등소평이 지적한 것처럼 “중국공산당은 집권당이 되었고 모든 국가활동영역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조직이 모든 도시와 진 · 현 · 구 등에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주요 기업체에도 확산되었고······ 대부분의 당원은 국가기관과 경제기관, 문화기관과 각종 사회단체의 모든 직급에서 책임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사회와 국가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당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따라서 유소기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해서부터 노동자계급이 농민과 동맹하여 전국적인 지배권력을 확립하였고, 노동자계급의 정당인 중국공산당이 전국의 권력을 지도하는 정당이 됨으로써, 인민민주전정은 실질적으로 이미 프롤레타리아전정의 한 형태가 되었으며,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성질을 가진 중국혁명은 평화적인 길을 통해서 직접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의 성질을 가진 혁명으로 전화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사회주의혁명단계에서 중국공산당의 과제는 무엇인가?

 

1956년 제 8 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통과된 당장에 의하면 ‘모든 분야에서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결정적인 승리’가 이미 획득된 현 단계에서 중국공산당의 주요 임무는 첫째로,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소유제를 전민소유제로 전환시키고, 노동과 능력에 따르는 사회주의적 분배원칙을 점진적으로 실현하며, 정치 · 경제 · 사상 분야에서 자본주의적 영향력을 배제하는 데 계속 노력한다. 둘째로, 이와 같은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는 사회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과제는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중국의 공업화를 실현하고,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중국경제의 기술개혁을 달성하여 현대화된 공업, 현대화된 농업, 현대화된 교통통신, 현대화된 국방을 발전시키는 것이며, 최대 한도로 인민의 물질적 ·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인민들의 생활조건을 향상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5. 문화혁명과 중국공산당의 역할 인식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에게 ‘대재난’을 가져다 준 문화혁명에 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단순한 권력투쟁의 성격만을 가진 것이 아니고, 사회주의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결된 중국사회의 모순구조,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인식의 차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모택동은 사회주의적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결된 1956년과 1957년에 각각 「10대관계론」과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한 연설에서 사회주의 사회에도 모순은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특히, 「인민내부의 모순」에 관한 연설에서 모택동은, (1) 부르조아 민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로 말미암아 중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결되어 있으며, 중국의 인민들 사이에는 기본적인 이익의 일치가 있다. (2) 그러나 사회주의사회에서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사회주의사회에서도 적대적인 모순과 비적대적인 모순은 여전히 존재한다. (3) 사회주의사회에서의 모순은 대체로 비적대적인 인민내부의 모순의 성격을 가지며, 이러한 인민내부의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는 사회주의제도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수립되었지만 완전하지 않으며, 아직도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관료주의적 요소가 남아 있고, 국가제도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4) 따라서 과거와 같은 격렬한 대규모의 계급투쟁은 종결되었지만, 계급투쟁이 완전히 종언을 고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투쟁의 성패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계급투쟁은 장기간 계속될 것이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때로는 격렬한 형태를 띨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인민내부의 비적대적인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지 못하면, 적대적인 모순으로 전화되어 격렬한 계급투쟁이 재연될 수도 있다고 암시함으로써, 모택동은 이미 문화혁명을 예고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당시의 모택동은 사회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가 있다는 가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의 해결은 강압적인 방법보다는 민주적이며 설득적인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인식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의 방침을 추진하였다. 또한 모택동은 사회주의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당과 국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장기공존, 상호감독’, 그리고 대중노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의 이와같은 방침은 본래의 의도와는 엄청나게 거리가 먼 결과를 가져왔다. 즉,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사회주의와 공산당에 대한 생산적인 비판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사회주의 건설에 더욱 협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사회주의와 공산당의 지배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장기공존과 상호감독’의 방침은 당의 특권화와 관료화를 방지한다는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이에 대한 당관료의 반발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좌절로 말미암아 모택동의 지식인과 자산계급에 대한 불신, 그리고 당과 국가의 관료화 · 보수화에 대한 경각심은 더욱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57년에는 격렬한 반(反)우파운동이 전개되었고, 1958년에는 지식인과 전문관료계층을 배제하고 기본 대중인 노동자와 농민의 힘을 동원하여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려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의 권위를 실추시켰으며, 당과 국가관료의 역할과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따라서 정치적 · 이데올로기적인 가치보다는 물질적이고 실질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유소기 · 등소평 등이 중심이 되는 실권파(實權派)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대중의 혁명적인 자발성과 당의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강조한 모택동파와는 달리, 대중의 물질적 욕구의 충족과 당 기능의 합리화와 제도화를 강조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지도층은 당의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그리고 중국이 지향할 목표와 그 실천방법에 대하여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문화혁명은 바로 이와 같이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더욱 첨예화된 노선투쟁과 정책논쟁 및 권력투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실권파의 등장과 함께 현재화(顯在化)한 혁명적 이데올로기의 퇴색, 당과 국가의 보수화 · 관료화경향, 그리고 ‘자본주의적 성향’의 대두에 대한 모택동의 대반격이 문화대혁명을 촉발하게 했다. 모택동은 실권파의 정책과 노선이 지배적인 1962년 9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 8 기 10중전회에서, 사회주의사회에서도 계급과 계급투쟁은 계속되어야 하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노선 사이에 투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자본주의 부활의 위험성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만일 이런 문제를 올바르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국가는 변색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문화혁명을 예고하였다.

 

이와같은 모택동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실권파는 여전히 계급간의 협력을 강조하고 자유화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모택동의 사회주의 교육운동과 문예계에 대한 사상개조운동을 왜곡하자 모택동은 마침내 인민해방군과 홍위병(紅衛兵), 그리고 혁명적 대중을 동원하여 당에 대한 대대적인 정풍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모택동은 중국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부르조아 반동사상이 필연적으로 당내에 침투하여 노선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자본주의노선을 걷는 당권파」에 대한 과감한 투쟁과 각급 당부의 철저한 개조를 요구했다. 따라서 문화혁명 과정에서 모택동은 ‘조반유리 · 혁명무죄(造反有理· 革命無罪: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합당하며,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죄가 아니다)’,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등의 과격한 구호를 제창하면서 군과 혁명대중을 동원하여 당의 실권파를 제거하고 당조직을 개편 ·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극심한 혼란과 충돌을 야기하자, 모택동은 문화혁명 좌파의 급진적 당개편 요구를 억제하고, 군과 구간부, 그리고 혁명적 대중들의 3결합과 노 · 중 · 청 3결합에 따라서 파괴된 당조직을 재건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와 같은 방침에 따라서 당조직은 혁명위원회 체제로 개편 · 정리되면서 1969년에 제 9 차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서 획득한 위대한 승리’를 바탕으로 인민 대중들의 단결을 촉구하고 프롤레타리아 전정 시대에 당의 역할과 과제를 재정립하기 위하여 소집된 9전대회를 1956년의 8전대회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국사회와 당의 역할에 대하여 상이한 인식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 9전대회에서 발표된 임표(林彪)의 정치보고나 당장에서는 인민민주주의와 인민민주통일전선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사실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과정에서 모택동과 좌파지도자들은 중국이 사회주의 단계로 들어섰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계급은 계속 존재하며, 자본주의 부활 위험은 계속되기 때문에 계급투쟁은 장기간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2) 부르조아 계급은 이미 타도되었고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 개조를 이룩하였지만, 부르조아 계급의 구사상 · 구문화 · 구풍속 · 구습관은 여전히 남아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부르조아 사상이 당내에 방영되어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투쟁과 정치투쟁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문화혁명의 목적은 당내에서 수정주의 노선을 분쇄하고, 부르조아에 의하여 찬탈된 정치권력을 쟁취하여 프롤레타리아 전정을 전면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3) 이와 같은 정치투쟁 · 사상투쟁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조아를 구별하는 기준은 ‘마르크스 · 레닌주의의 보편적 진리를 중국혁명의 구체적 실천과 결부시켜 마르크스 · 레닌주의를 계승 · 발전시킨’ 모택동사상에 대한 정치적 · 이데올로기적인 태도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택동 개인과 모택동사상의 권위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었다.

 

(4) 따라서 1969년 당장은 “모택동주석을 지도자로 모시고 있는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을 지도하는 중핵”이라고 규정하고, “전당은 마르크스 · 레닌 ·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홍기를 높이 들고······계급투쟁, 생산투쟁, 과학실험의 3대혁명을 수행하며 프롤레타리아 전정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이데올로기와 정치투쟁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의 권위가 당의 제도적 권위보다 우선적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1969년의 당장은 1956년의 당장과는 달리, 당의 조직체계와 기능에 대하여는 별로 상세한 규정을 두지 않음으로써, 모택동 개인과 모택동 사상에 의한 당지배가 가능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1969년 당장은 모택동 사상으로 무장한 당에 의한 전면적인 프롤레타리아전정을 지향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당의 지배영역을 그 어느 때보다도 확장하였다고 하겠다. 즉, 당정합일, 당사합일(黨政合一 · 黨社合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중국 사회의 자율성은 최소한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있다. 따라서 문화혁명 이후 당의 조직과 당의 기능은 실질적으로 약화되었으면서도,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의 당의 전면적 · 일원적 지배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혁명적 · 봉건적 전체주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6. 4개현대화와 중국공산당의 역할 인식

 

1969년 당장에서 명문화된 중국사회와 당이 역할에 관한 인식, 즉 프롤레타리아 전정하의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속혁명의 필요성과 당의 일원화 영도원칙, 그리고 모택동 사상의 견지에 대한 인식은 1973년의 10전대회의 당장과, 1975년 헌법, 그리고 화국봉 시대에 개최된 1977년의 11전대회에서 통과된 당장 등에서 반복 강조되었다.

 

예를들면 1977년 11전대회의 당장에서도 (1)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당이며, 중국인민의 영도핵심이고, (2) 사회주의의 전체 역사단계에서 당의 기본강령은 프롤레타리아 전정하의 계속혁명을 견지하여, 점차로 부르조아 계급과 모든 착취계급을 소멸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며, (3) 모택동은 당대에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 · 레닌주의자이고, 모택동 사상은 마르크스 · 레닌주의의 보편적 진리와 중국혁명의 구체적 실천의 상호 결합의 산물이기 때문에 모택동 사상의 깃발 아래서 단결하여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혁명 이후 중국공산당은 계급협력과 계급조화보다는 계급투쟁과 사상투쟁을, 경제발전과 인민생활의 개선보다는 사회주의적 제도의 확대를, 당기능의 제도화와 합리화보다는 당의 일원적 영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 과정에서 당의 과제와 역할에 대하여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즉 계급투쟁과 사상투쟁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경제발전과 현대화의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내부의 노선대립은 모택동의 후계자에 관한 문제와, 정당(정당)과 당조직재건의 방법과 범위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 권력투쟁으로 말미암아 더욱 첨예한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과 중국사회는 임표의 몰락과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 그리고 등소평의 등장과 재몰락, 문화혁명 4인방의 숙청과 등소평의 재등장 등 격렬하고도 복잡한 정치변화의 과정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 11 기 3중전회를 계기로 문화혁명 이후 계속되었던 좌파와 실용주의파 사이의 노선투쟁과 권력투쟁은 실용주의파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따라서 1978년의 3중전회에서는 (1) 중국 사회에서 대규모의 격렬한 계급투쟁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며, (2) 4개 현대화 경제발전, 그리고 인민생활의 개선은 당과 국가의 최고 · 최대 과제가 될 것이고, (3) 이와 같은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상해방과 정치 · 경제제도의 광범위한 체제개혁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등소평 세력은 문화혁명 4인방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의 세력을 모든 영역에서 배제하고,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을 비판적으로 정리하여,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정책과 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1978년의 3중전회 이후 중국공산당은 지방과 중앙의 각급 당 지도체제에 대한 개편을 단행하여 좌파적인 성향을 가진 당간부를 정리하고, 문화혁명 과정에 숙청되었던 구간부와 실용주의노선을 지지하는 신간부 계층을 대규모로 등장시켰다. 이와 같은 각급 당조직의 지도체제에 대한 정풍운동으로 말미암아, 1982년 9월에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 12 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등소평 세력은 정치적 승리를 선언할 수 있었다. 사실 당의 주요 당조직에서 좌파는 물론이거니와 화국봉과 같은 소위 범시파의 영향력도 거의 완전히 배제되었고, 문화혁명 이후에 비대해졌던 군부의 영향력도 현저히 감소되었다. 특히, 1985년에 소집된 임시당대회를 계기로 엽검영(葉劍英)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 보수세력이 더욱 퇴조되었고, 신진간부들의 등장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등소평 세력의 정치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등소평이 추진하는 4개현대화와 경제발전, 그리고 체제개혁에 대하여 당내의 모든 지도자들의 의견이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당내에는 보수세력이 아직도 잔존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세력은 당과 국가기관에서 좌파세력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좌파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철저한 비판운동을 전개하였다. 등소평은 ‘실사구시와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슬로건을 제창하면서, 모택동과 좌파에 의하여 강조되었던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계급투쟁과 계속혁명, 그리고 평등주의적 경향 등을 모두 과학적인 마르크시즘과 위배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다시 말해서 등소평은 계급투쟁보다는 계급간의 협력과 단결을 강조했으며, 정치와 사상투쟁보다는 사회생산력의 발전과 인민의 물질생활의 개선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경제제일주의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좌파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운동과 함께,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에 대한 재평가를 추진하여, 1981년 6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 11 기 6중전회에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여기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은 모택동 개인과 모택동사상을 분리함으로써, 모택동 개인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여진히 모택동사상은 마르크스 · 레닌주의와 더불어 중국공산당의 지도이념이라고 하였다. 즉, 모택동사상은 마르크스 · 레닌주의를 중국혁명에 구체적 실천과 창조적으로 결합 · 적용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모택동 개인의 사상이라기보다는 당의 집단적 지혜의 결정체라고 규정했다. 이와 같이 모택동 개인과 모택동사상을 구별한 이유는 모택동사상을 부정하는 경우에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되며, 당내외의 사상적인 혼란을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1978년 이후 중국공산당의 새로운 지도층은 4개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대담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인민공사를 폐지하고 농업생산책임제를 실시하였고, 1984년에는 도시기업으로 개혁을 확대시행하는 등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세력은 당과 국가제도의 합리화 · 법제화를 통하여 사회주의적 민주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등소평은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면 사회생산력을 신속히 발전시켜 인민의 물질 · 문화생활을 개선하는 일과 정치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여 인민민주를 충분히 발전시켜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도록 계속 노력하는 것이 당의 불변의 목표”라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1980년 8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당과 국가의 정치생활의 민주화, 경제관리의 민주화, 그리고 모든 사회생활의 민주화를 제도적으로 보증하기 위해서 당과 국가의 제도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권력집중과 관료주의를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고,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하고, 당과 국가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세력은 급진적인 민주화 요구와 사회주의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을 반대하는 보수적 견해를 수용하여, 1982년 9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 12 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새로운 당장을 만들게 되었다. 1982년 12전대회에서 공식화된 개혁의 기본방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개혁정책을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급진적인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즉, 사회생산력의 신속한 발전을 자극하고, 사회주의적 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정치제도와 경제체제의 보다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급진적인 개혁파의 주장에 대하여, 사회주의제도의 보완이란 차원에서 개혁을 핵석하려는 보수적 견해가 대립하였다. 따라서 1982년 12전대회 이후 개혁의 범위가 점차로 확대되면서 보수파의 반발도 현재화되었다. 특히 이들은 문호개방정책과 경제체제에 대한 급진적인 개혁정책으로 말미암아 ‘자산계급 자유화사상’의 오염 위험성이 증대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개혁의 속도를 조정하고 사회주의체제의 기본적 성격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에서 경제체제와 정치체제의 개혁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시장경제와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경험을 원용하여 사회주의제도의 경직성과 비효율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개혁의 대두를 경계하고 ‘당내의 일부 동지들이 자산계급의 자유화사상에 대하여 불투명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보수파의 반발로 말미암아 1986년 9월에 개최된 제 12 기 6중전회에서는 「사회주의 정신문명에 대한 결의안」이 통과되었으며, 지난 1987년 1월에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급진적 개혁파를 대변하는 총서기 호요방의 퇴진과 민주화운동을 자극한 방려지(方勵之)와 같은 개혁이론가들의 숙청 등을 초래했던 것이다.

 

이같은 보수파의 반발은 개혁정책으로 인하여 그 권력과 기능이 약화된 당과 국가관료들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당정분리와 정경분리를 강조하는 개혁파의 체제개혁은 당의 역할을 대폭적으로 축소시키고 있다는 지적은 자명한 것이었다. 당의 일원화 영도가 부정되고, 개인과 집단의 정치적 · 경제적 자율권이 확대되면서 당의 실질적인 권한은 대폭적으로 축소 · 조정되었으며, 정치우선과 사상투쟁의 중요성이 부정되면서 당의 위신과 권위는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4개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전문적인 신진간부의 역할이 강조되자 정치투쟁과 사상투쟁에 익숙한 기존간부들이 반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천안문에서 대규모 시위가 조직화되면서 당내 개혁파에 대한 보수파들의 반발은 극도에 달하였으며, 결국 천안문 사태는 무력진압과 조자양의 사퇴라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되면서 종결되었으며, 중국은 다시금 정치적 냉각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등소평의 후계자로 지목된 강택민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들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에 대항하고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하여 용납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면서 사상성을 강화할 것을 천명하였다.

 

당정분리의 요구는 비판을 받았으며, 한때 이를 주장하였던 등소평 조차도 이를 부정하고 보수파들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당은 국가와 기업에 대한 지도력을 강화하였으며, ‘교차겸직’을 통해 이당영정(以黨領政: 당이 정치(국가)를 영도한다)이 재연되었다.

 

14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보수파들이 대거 퇴진하면서 개혁파가 당과 국가의 지도부를 장악함에 따라 개혁에 대한 전망은 밝아졌다. 그러나 등소평의 사후를 전후로하여 여전히 체제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당의 역할이 중시되었으며, 사회주의를 고수하기 위한 당의 전위적 역할은 당국가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Ⅲ. 결언 :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

 

1921년 7월, 57명의 당원을 대표하는 12명의 대의원이 모여 창당한 중국공산당은 소수의 혁명적 지신인의 정치단체로부터 출발하여 마침내 천하통일을 성취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통치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지배하는 정당으로 성장하기까지에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굴곡이 있었다. 최소한 두 차례, 즉 1927년 4월의 상해에서 있었던 장개석의 반공쿠테타와, 1934년 국민당군의 군사적 압력으로 서금(瑞金) 소비에트정부가 붕괴되고 장정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을 때에는 중국공산당은 그야말로 존망의 기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위기와는 성질이 다르기는 하지만, 1966년의 문화혁명은 다른 각도에서 중국공산당에게는 심각한 시련을 가져다 주었다. 모택동의 카리스마적 권위가 당의 권위보다 우선했을 뿐만 아니라, 홍위병이나 군과 같은 당외세력에 의하여 당조직이 파괴되는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또 다른 차원에서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공산당은 중국혁명과정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정에서 끊임없는 도전과 위기에 직면하였고, 그때마다 중국공산당의 노선과 역할을 재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같은 당의 노선과 역할에 대한 인식변화는 중국공산당이 추구하는 목표와 구체적인 중국사회의 현실 사이의 갈등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주도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중국공산당의 목표와 중국의 국체적인 사회조건의 괴리로부터 중국공산당의 노선변화와 당의 역할에 대한 인식변화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창당 초기에 중국공산당을 프롤레타리아의 정당이며, 그 목적은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하고 계급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노농독재정치(勞農獨裁政治)를 수립하며, 사유재산제도를 소멸하여 점차로 공산주의 사회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와같은 당의 성격과 목표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변경되지 않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그 표현에는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지만, 중국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정당이며, 프롤레타리아 전정의 수립과 사회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목표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사유재산제도의 철폐와 같은 사회주의적 개조가 필요하다는 점 등은 계속 재확인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중국공산당은 기본적인 당의 성격과 목표에 대해서는 일관된 인식을 견지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으로 인식된 당의 성격과 목표는 처음부터 중국혁명의 구체적인 실천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중국혁명의 초기단계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노동자계급이 중국혁명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에서 노동자 계급이 점유하는 비중이 극히 미약했다는 사실은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구체적인 계급성분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강조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서 중국공산당은 구체적인 노동자계급에 의해서 구성된 정당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대변하는 정당이며, 이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이란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하려는 의식이기 때문에 노동자계급 뿐만 아니라 농민과 같은 피착취계급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27년 상해쿠테타 이후에 도시지역에서 공산당운동이 괴멸되고 농촌지역에서 농민들에 의하여 재건된 후에도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의 정당이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공산당은 중국 사회의 어떤 특정 계급에 의하여 조직된 정당이라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가진 소수의 혁명적인 계층들의 정치조직체이며, 이들은 중국사회의 각 계급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교육 · 개발 · 조직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창출해내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사회에서 어떤 계급과 계층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920년대초 장동손 · 진독수 · 이대교 사이에서 있었던 중국에서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논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때 장동손은 중국사회는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으며 노동자계급에 의한 계급투쟁은 적합하지도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진독수는 중국사회의 경제적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방법보다는 사회주의적 방법에 의한 산업화가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노동계급은 단순히 도시지역의 산업노동자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빈곤한 농민들도 노동계급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이대교는 진독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만을 보면 중국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세계의 경제적인 조건은 현재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으며, 중국의 경제적 조건은 세계경제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운동의 조건이 성숙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대교에 의하면 중국인민 전체가 세계 자본주의의 지배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민은 모두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포괄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은 그후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이론가들에 의하여 계승되어, 도시와 농촌을 구별하지 않고 경제적 지위와 정치적 태도에 따라 계급과 인민을 구별함으로써, 중국혁명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지지하는 인민이 항상 압도적인 다수를 점유하고 적대계급은 가능한 한 축소하려는 전략적 이론이 개발되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처음부터 계급연합적인 통일전선과 대중노선을 실천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창출해 낼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공산당은 통일전선과 대중노선이 비교적 효과적으로 실행되었던 시기에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록하였고, 그렇지 못하고 단순한 계급투쟁을 강조했던 시기에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였다. 제 1 차 국공합작기(1924~1927)와 제 2 차 국공합작기(1937~1945)에 중국공산당은 비약적인성장을 기록하였고, 집권정당이 된 후에도 인민민주통일전선이 강조되었던 시기(1949~1956)에는 비교적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공산당의 계급연합적 통일전선과 대중노선은 단순히 중국사회의 각 계급들간의 협력과 단결을 모색하거나, 또는 대중들의 직접적 이익추구에 영합하는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당으로서 중국공산당은 대중들이 의식하지 못한 그들의 장기적인 이익을 의식할 수 있도록 교육하며, 이와 같은 공동이익을 바탕으로 인민을 구성하는 계급의 단결을 도출하는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중국혁명의 방향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확산하게 하는 계급투쟁과, 인민대중의 단결을 확보하려는 계급연합을 결합하여 프롤레타리아 정당으로서의 선도성과 대중성을 모두 획득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톨일전선 기간 동안에 계급간의 협력과 단결을 강조하면서도 중국공산당의 독자성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신민주주의 또는 인민민주주의시대에 중국공산당이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했으면서도 중국공산당의 일원적 · 전면적 영도권을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항상 계급투쟁과 계급연합, 선도성과 대중성을 결합하는데 성공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이 두 가지 측면은 중국공산당과 다른 정치단체들, 그리고 당과 중국인민들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을 산출했으며, 그것은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노선투쟁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즉, 계급엽합과 대중성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경험주의적 노선과, 그와는 반대로 당의 선도성과 계급투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조주의적 노선의 대립 · 갈등이 그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공산당이 중국혁명 과정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곧 중국공산당이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는 동안, 교조주의적 편향성이나 경험주의적 편향성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거의 모든 당장에서 교조주의와 경험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을 항상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특히 1956년 8전대회 이후에는 지나치게 중국공산당의 선도성을 강조하고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의식한 나머지 문화혁명과 같은 대재난이 초래되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중국사회의 현실적 제약조건을 무시하고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란 목표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중국공산당의 일원적 · 전면적 지도하에서 중국사회를 개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대중들의 물질적 · 직접적 이익보다는 대중의 보편적 · 이념적 이익을 강조하였고, 중국사회의 각 계급간의 협력과 단결보다는 계급투쟁의 과정을 통하여 이데올로기적인 통일성을 획득하려고 했으며, 당과 국가와 사회의 통합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좌파적 노선으로 말미암아 중국공산당의 역할은 극대화되고 일원화되었으며 국가와 사회의 자율성은 위축되었다. 그 결과, 중국공산당은 아이로니칼하게도 국가와 사회부분과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중국사회 내부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모순을 그대로 당내에 받아들임으로써 당의 영도권을 오히려 마비시켰다고 하겠다.

 

따라서 등소평시대 이후 중국공산당은 당과 국가, 당과 사회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당의 대중성과 인민민주주의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정치체제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과연 중국공산당이 4개 현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중국혁명 과정에서와 같이, 계급투쟁과 계급연합을 결합하고 선도성과 대중성을 모두 획득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