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 정치학]
제4부 제3장 : 중국의 개혁정치와 신권위주의론
Ⅰ. 문제의 제기
지난 10여년간 중국은 개혁, 개방을 표방하면서 모택동시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중국적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특히, 경제발전 제일주의의 입장에서 중국은 대담한 경제체제의 개혁을 단행하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도입함으로써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1979년이후 농촌사회에서 추진되었던 농촌경제구조의 개편작업에서부터 시작한 경제체제의 개혁은 1984년의 계획적인 상품경제론, 그리고 지난 14차 당대회에서 제기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론에 따라서 기존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거의 전면적으로 개혁, 개편함으로써 중국사회를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변화시켰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자본주의적인 요소, 이를테면 개인과 집단의 사적 경제활동이 용인되고 있으며, 시장경제의 영역이 확대됨으로써 중국을 과연 사회주의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경제개혁과 중국사회의 구조적 성격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개혁정치의 속도와 방향과 관련한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논쟁이 심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상호관계에 관한 개혁파 내부의 논쟁도 촉발되었다. 1980년대 후반, 특히 1989년의 천안문사태 직전에 중국의 개혁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신권위주의 논쟁도 바로 개혁정치의 목표와 방향에 대한 중국의 개혁적 지식인들의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정치적 미래와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신권위주의 논쟁은 1989년의 천안문사태 이후 잠복하였지만, 현재 중국의 개혁파 지도자들이 추구하고 있는 중국의 정치적 장래가 신권위주의 논자들이 주장하였던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첫째, 1988년부터 1989년 5월까지 중국의 지식인사회에서 전개되었던 신권위주의론의 주요 내용과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개괄적으로 소개한 다음, 둘째, 경제개혁의 성과와 문제점을 분석하면서 중국의 정치체제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규명함으로써, 셋째, 중국의 정치적 장래와 관련하여 신권위주의 논쟁이 던져 주고 있는 함의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려고 하였다.
Ⅱ. ‘신권위주의론’이란 무엇인가
신권위주의론이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학자들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신권위주의론은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혁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사회, 경제적 개혁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새로운 형태의 권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강력한 개혁적인 정치적 리더쉽이나 정치권력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사회경제 질서를 재편해야 하며, 경제개혁과 경제발전이 어느 정도 추진된 이후에야 비로서 정치적 개혁, 즉 정치적 민주화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신권위주의론자들의 견해는 일견 정치적 안정과 중앙집권적인 통제를 강조하는 보수파의 견해와 표면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권위주의론자들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계획경제와 당국가제도를 개혁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이들이 추구하는 사회경제의 개혁은 시장경제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들이 강조하는 ‘신권위’도 당국가 제도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당국가 제도에서 비롯되는 ‘구권위’를 타파하고 개혁적인 지도자나 새로운 형태의 정치권력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파와 뚜렷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권위주의론은 강력한 개혁적인 리더쉽에 입각한 개혁과 개방의 확대와 심화를 강조하는 개혁파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민주화보다는 경제개혁이 먼저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권위주의론은 경제개혁과 정치적 민주화의 동시적 실현을 주장하는 급진적 개혁파와도 구별된다고 하겠다.
대표적인 신권위주의론자로 알려진 오가상(吳稼祥)에 의하면, 신권위주의론은 1986년에 상해의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동아시아 제국의 발전경험과, 정치안정과 근대화의 문제를 다룬 미국의 정치학자 헌팅턴 (Samuel Huntington)의 이론 등에 영향을 받아, 중국에 있어서도 정치적 안정과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강력한 권력의 집중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예를들면,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 국제정치학 교수이었던 왕오호영(王吳扈寧)에 의하면, 개혁과정에서 경제와 정치의 분권화로 말미암아 지방이익이 국가이익을 압도하고, 정치적 혼란이 초래될 위험성이 증가되었고, 불완전한 시장메카니즘의 발전과 사회문화적 낙후성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불안등으로 개혁이 좌절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경제발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효율적인 권력구조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경제개혁과 더불어 정치적 민주화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는 민주화론자들의 정치적 낭만주의를 비판하면서, 선(先)경제발전 후(後)민주화론을 강조하였다. 왕오호영에 의하면, “정치형식, 민주형식은 일정한 사회, 역사, 경제, 문화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이 당면한 과제는 강력한 리더쉽에 입각하여 경제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는 경제발전과 사회문화적인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상해의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개발독재론이 제창되는 분위기에서 북경에서도 당시 북경대학 박사과정 연구생이었던 장병구(張炳九)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주장하면서 상품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과도적인 체제로서 반집권적(半集權的) 정치체제의 수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장병구에 의하면, 개혁과정은 대체로 3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친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통적인 계획경제와 집권적 정치체제에서부터 상품경제와 반집권적 정치체제의 과도기를 거쳐 성숙한 상품경제와 분권적인 정치체제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장병구가 말하는 집권적 정치체제는 정치와 경제가 결합되어 있는 당국가체제를 의미하는 것이며, 半집권적인 정치체제는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면서 정치적 권위는 집중되고 경제적 자유화가 추진되는 그런 과도적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시장경제와 다원적 민주정치에로 이행하기 이전에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에 의한 상품경제와 시장경제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개혁과 개방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당국가체제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적 권위가 필요하다는 신권위주의론자들의 견해는 처음부터 보수파와 민주파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개혁의 축소와 기존의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신권위주의론은 당국가체제를 부정하고 위로부터의 개혁 방식으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추진하려는 것이었으며, 경제개혁과 더불어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민주파의 입장에서도 신권위주의론은 개발독재를 지향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개혁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86년 당내에서 보수파들이 중심이 되어 反자산계급 자유화운동이 전개되면서 신권위주의론은 일시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7년 13차 당대회에서 조자양이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창하면서 개혁의 심화를 주장하고, 특히 1988년 개혁정치의 부작용이 노골화되면서 지식인사회를 중심으로 ‘구국의 방안’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전개되면서 신권위주의론에 대한 관심이 재연되었다. 사실 천안문사태가 발생하기 직전인 1988년경에 중국의 개혁정치는 심각한 기로에 직면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1984년 ‘경제체제의 개혁’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기존의 계획경제와 새로운 상품경제의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물가불안과 관료들의 부패, 그리고 사회경제적인 혼란이 극심한 형태로 표출되었으며, 동시에 개혁과 개방과 더불어 기존의 가치에 대한 회의가 심화되었고,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요구도 증대되었다.
따라서 지식인 사회에서도 이와같은 사회경제적 위기의 근원과 그것의 해결방안에 대하여 다양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특히, 일부 급진적인 개혁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중국의 전통문명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국제화시대에 대비할 수 있는 새로운 서구적인 가치와 제도의 도입이 강조되었다. 예를들면, 1988년 6월에 중국에서 방영되어 많은 논란을 빚은 텔레비젼 다큐먼타리 「하상(河殤)」은 황하로 상징되는 내륙지향형 전통적 중국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하였으며, 방여지, 엄가기(嚴家其)등 개혁파 지식인들은 서구적 정치체제를 수용하여 경제개혁과 더불어 과감한 정치개혁을 단행하는 것만이 중국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보수파들을 자극하였다.
이처럼 보수파와 급진적인 개혁파 간에 현 위기에 대한 성격규정과 위기 극복 방안에 대하여 날카로운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호요방이 퇴진한 이후 새로운 당총서기로 취임한 조자양을 지지하는 지식인 그룹들을 중심으로 재차 신권위주의론이 제기됨으로써 신권주의론자들과 민주파들간의 논쟁이 확산하게 되었다. 조자양의 브레인으로 알려진 경제체제개혁 연구소 소장이었던 진일자(陳一諮)가 후에 술회한 바에 따르면, 당시 지도부 내부의 혼선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사회적 모순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위기적 국면이 초래된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중에서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집단이 등장하여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에로 평화적인 이행을 실현하기를 희망하는 신권위주의적 사고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신권위주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상해 사범대학 역사학 부교수였던 숙공진(肅功秦)에 의하면, 구제도의 구속력이 이완되었으면서도 새로운 제도가 아직 정착되지 않고 있는 중국사회에서 아노미적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사회경제적 조건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중국사회에서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함으로써 이와같은 과도기적 혼란과 무질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민주화론자들의 주장은 ‘정치적 낭만주의’라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숙공진은 전통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선진 과학기술과 문화를 수용하고 경제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형태, 즉 신권위주의적 정치체제는 개발도상의 제3세계국가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중국에서도 개혁정치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신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경대학의 경제학 교수이며 등소평과 조자양의 주요 경제 브레인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오가상에 의하면, ‘신권위’와 ‘구권위’의 차이점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혹은 박탈하는가에 따라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구권위주의는 기본적으로 모든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인데 비하여, 신권위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시장경제의 발전을 촉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정치적 민주화가 실현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오가상에 의하면 시장경제의 발전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촉진하는 것이며, 개인의 이익과 위험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여 개인들로 하여금 민주적 권리와 책임감을 배우게 하고, 점차로 경제적 이익이 다원화되면서 중산계급을 배출함으로써 민주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가상은 시장의 발전없이 민주는 없다는 전제하에서 시장경제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가 먼저 확보된 이후, 점진적으로 정치적 민주화도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중국에서 필요한 것은 민주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시장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신권위의 수립이라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논리를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하여 오가상도 역시 앞서 지적한 장병구등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단계적 발전론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역사는 대체로 다음의 <표-1>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전제주의-신권위주의-민주주의의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는 것이다.
<표-1> 민주화의 역사적 과정
변수 전제주의 신권위주의 민주주의 |
경제 자급자족 半시장경제 시장경제 합법성의 기초 신권정치/전통 투표 투표 정당 없음 1개 or 수개 2개 or 수개 개인의 자유 없음 약간 법에 의한 보호 국가권력 기반 전제주의 합법적 전제주의 헌법 분권화의 정도 없음 半독립적 의회 분권화 |
출처: Wu Jiaxiang, "A Study of Neo-Authoritarianism," in Mark P. Petracca and Mong Xiong, "The Concept of Chinese Neo-Authoritarianism," Asian Survey 33:11 (November 1990), p. 1108에서 재인용
이와같이 오가상을 비롯한 신권위주의자들은 정치와 경제가 혼합되어 있으며,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전제주의에서 민주화로 가는 과정에서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고, 개인의 자유를 점진적으로 확대하면서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는 과도적인 단계로서 신권위주의의 단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전제주의가 쇠락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는 권력이 중간수준인 관료들에게 분산됨으로써 개인수준에서 자유도 없고, 중앙수준에서 권위와 질서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정치사회적 혼란과 무질서가 초래될 수 있으며, 관료들의 부패도 심각한 문제로 제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시장경제의 발전이 왜곡되거나 저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권위주의자들은 전제주의에서 민주주의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과도기적 혼란을 극복하고 관료들의 부패를 척결하면서 강력하게 현대화를 추진하고, 개인들의 경제적 자유를 확대함으로써 시장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신권위주의의 단계를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신권주의주의자들은 대만이나 한국과 같은 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고 알려진 신흥공업국가들의 경험을 원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서구의 역사적 경험도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예를들면, 오가상은 손문의 ‘군정, 훈정, 헌정’의 단계론을 인용하면서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에 신권위주의 단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고, 동시에 영국을 비롯한 서구국가들의 근대화 과정도 이같은 단계론을 입증하는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오가상에 의하면, 영국의 근대화 혁명은 크롬웰의 군사독재시기를 경험하면서 일종의 장기간의 ‘훈정기’를 거쳐 점진적으로 민주주의제도가 정착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재청(載晴)을 비롯한 많은 신권위주의자들은 대만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발전을 가져온 장경국(蔣慶國)총통체제를 재평가하면서, 장경국을 전통적인 전제주의를 근절할 수 있었던 최후의 전제자이며, 동시에 대만의 경제발전과 현대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대만의 민주화를 가능하게한 개명된 전제자였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박정희 정권도 같은 맥락에서 강력한 권위주의 정치를 통하여 시장경제와 현대화에 성공했다고 높이 평가하면서, 중국에서도 전통적인 계획경제와 당국가체제의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정치질서와 안정을 보장하면서도 시장경제와 현대화를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개명전제 정치, 또는 신권위주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진일자를 비롯한 일부 신권위주의론자들은 현대사회에서 정치와 경제체제의 특징을 중심으로 현대국가들을 분류하면 대체로
(1) 스탈린체제와 같은 경정부, 경경제(硬政府, 硬經濟);
(2) 의회민주주의와 계획경제를 실행하고 있는 인도와 같은 연정부, 경경제(軟政府, 硬經濟);
(3) 동아시아의 4마리 용과 같은 경정부, 연경제(硬政府, 軟經濟);
(4) 선진 서방국가들의 연정부, 연경제(軟政府, 軟經濟)의 4가지 유형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2차대전이후 세계역사는 경정부, 연경제(硬政府, 軟經濟)의 유형이 가장 성공적이고 효율적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신권위주의자들이 지향하는 것도 바로 이같은 硬政府, 軟經濟의 유형이라는 것이다.
Ⅲ. 신권위주의론에 대한 반론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전통적인 당국가체제와 계획경제의 집권적인 체제에서 다원적인 민주정치와 시장경제에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강력한 ‘신권위’가 필요하고, 신권위에 입각하여 시장경제와 경제발전이 추진된 이후 점진적으로 민주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급진적인 개혁파 지식인들은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중국의 저명한 시인인 소연상(邵燕祥)은 1988년말에 「경제학주보(經濟學週報)」에 「중국은 황제가 필요한가?」라는 글을 발표하고, 중국의 현실적 여건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신권위주의자들의 가설을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는 민주화가 없는 현대화란 불가능하며, ‘신권위’의 추구는 오히려 사회적 모순을 격화할 것이며, 악성 사변을 발생시킬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이와같이 신권위주의론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중국이 당면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권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담한 정치개혁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당시 사회과학원 정치연구소 소장이었던 저명한 정치학자인 엄가기에 의하면, 개혁의 딜렘마는 경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있으며, 경제개혁과 더불어 정치개혁을 실시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의 개혁정치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엄가기는 1956년 헝거리사건의 경험도 바로 정치개혁이 없는 경제개혁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의 실현만이 중국이 당면한 사회경제적 혼란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하였다.
사회과학원의 맑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이었던 소소지도 역시 중국의 현실에서 권위의 수립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권위는 민주적 권위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소소지는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정부만이 권위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역설하면서 민주화와 현대화가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대만의 발전경험을 중국에 원용하는 신권위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이론(異論)을 제기하였다. 소소지에 의하면, 대만에서도 장개석의 독재가 시행되었던 1960년대까지 경제적 낙후성을 벗어 나지 못했지만, 1970년대에 장경국에 의한 부분적 민주화가 실천되면서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대만이나 한국의 경제발전에는 자유시장경제, 독립적인 기업가 계층의 형성, 그리고 지식인들의 역할이란 3대 전제조건이 작용하였는데, 중국은 이러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의 경험은 중국에 별로 적실성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저명한 법학자인 우호성(于浩成)도 신권위주의론을 새로운 이론이라기 보다는 성군현상(聖君賢相)의 통치를 소망하는 진부하고 낡은 봉건적 사상의 반영이라고 혹평을 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과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신권위주의론자들의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즉, 서구에서는 절대군주시대를 경과하면서 왕권의 옹호와 민족 통일의 실현, 봉건적 잔재의 타파 등을 실현하면서 전제와 자유의 밀월기를 가질 수 있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진시황(秦始皇)이래 전제군주시대를 거치면서 한번도 전제와 자유의 밀월기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서구의 역사를 기계적으로 중국에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서 보더라도 먼저 민주적 정치제도가 확립되었고, 그후 경제발전과 경제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先신권위주의와 시장경제의 발전, 後민주화를 강조하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민주화론자들은 신권위주의자들을 개혁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권력과 위풍을 상실한 사람들이나, 개혁의 기득권 세력, 또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매도하였다. 다시 말해서 신권위주의는 경제개혁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반대하면서 기본적으로 기존의 당국가체제와 계획경제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파들의 논리이거나 또는 개혁정치시대에 이미 당과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기득권세력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동시에 과거 문화혁명 시기에 범람했던 이른바 ‘대민주(大民主)’를 민주주의와 혼동하여, 민주주의의 실현을 곧 정치적 무질서와 혼란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의 동시적 실천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민주파 지식인들은 신권위주의자들의 도구적 사고, 즉, 민주주의를 목표로 설정하기 보다는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민주파 지식인들에 의하면 민주주의의 추구는 목표적 가치이며, 사회원리이며, 따라서 중국의 현대화는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 때만이 의미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와같이 신권위주의론자들과 민주론자들은 여러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의견대립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최소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었다. 첫째, 신권위주의자들이나 민주론자들은 과거의 사회주의체제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민주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신권위주의자들도 정치와 경제의 구분이 불명확하고, 모든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현실 사회주의체제에 대하여 지극히 비판적이었다. 신권위주의자들은 과거의 사회주의체제를 전제주의체제, 또는 전체주의체제에 비유하고 있으며, 중국의 경제적 낙후성도 이러한 집권적 체제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 민주론자들이나 신권위주의론자들은 모두 중국이 추구해야 할 최종적인 목표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특히, 시장경제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론이 없었다. 신권위주의론이나 민주론자들은 모두 시장경제의 발전을 통하여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으며,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다원화도 촉진된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민주론자들은 시장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경제개혁을 과감히 추진하기 위해서도 정치적 민주화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비하여, 신권위주의론자들은 시장경제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신권위주의’라는 정치적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따라서 신권위주의론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시장경제의 발전을 억압하는 ‘구권위’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시장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신권위’를 구별하고 있으며, ‘신권위’는 점진적, 단계적으로 민주적 권위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물론, 신권위주의론자들도 경제발전과 더불어 민주화가 자동적으로 실현된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천안문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에 오가상은 민간수준의 민주적 역량이 부단히 증가하여 당에 대한 압력을 가중하는 것이 ‘신권위’가 ‘구권위’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신권위주의가 전통적인 의미의 전제주의나 독재체제와는 구별된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셋째, 신권위주의론자들이나 민주론자들은 모두 서구의 근대화과정이나 대만이나 한국 등 동아시아의 발전경험에 대하여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이와같은 다른 나라의 역사적 경험을 중국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의견의 대립을 보여주었지만, 이들 모두가 전통적인 맑스주의적인 관점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들 동아시아와 서구의 발전경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신권위주의론자들과 민주론자들의 논쟁중에서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맑스주의적 역사관이 거의 전적으로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이들에게 있어서 맑시즘이나 사회주의체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Ⅳ.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와 신권위주의
1개의 중심 (현대화와 경제발전)과 2개의 기본점 (개혁, 개방과 4항 기본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는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모택동시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중국의 변화와 개혁을 실현하였다. 따라서 당국가체제의 기본적인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상품경제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론을 제창하면서 중국사회를 엄청나게 변화시키고 있는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를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사실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여러가지 차원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주의체제와 다르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고전적 사회주의체제에서는 첫째, 맑스-레닌주의, 또는 그것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모택동사상과 같은 공식적 이데올로기의 독점적인 위치가 견지되고 있으며, 둘째, 당의 일원적 지도권의 원칙에 입각한 당국가체제가 모든 사회의 영역을 관리하고 있으며, 셋째,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적인 계획경제체제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이데올로기와 당국가체제, 그리고 계획경제의 삼위일체 특징을 가지고 있는 고전적 사회주의체제는 신권위주의론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정치와 경제가 일원적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개인의 사상적, 정치적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 자유도 허용되지 않고 있는 그야말로 집권체제, 또는 전체주의적인 체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비록 4개 기본원칙, 즉 맑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의 견지, 당의 영도권 견지, 무산계급 독재의 견지, 사회주의 총로선의 견지 등을 강조하면서도 첫째, 과거와는 달리 이데올로기의 규정성이 현저하게 감소하였으며, 부분적이나마 개인의 자유화가 허용되고 있으며, 둘째, 당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당정분리가 강조되면서 당의 역할이 점차로 축소 조정되고 있으며, 셋째, 경제개혁이 진행되면서 대폭적으로 경제적 자율성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특히,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대담한 경제구조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놀랄만한 경제적 성과를 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경제와 사회의 구조적 다원화, 개방화, 자율화를 촉진하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중국경제는 아래의 <표-2>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도성장을 기록하였다. 물론, 1989년을 전후로 하여 중국경제는 개혁과 개방의 부작용이 노출되면서 고도의 인플레이션과 관료들의 부정부패 등으로 사회적 정치적 불안을 조성하였고, 그것은 마침내 1989년의 천안문사태로 폭발되면서 중국경제도 심각한 위기국면에 돌입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1989년이후 이른바 경제적 안정화를 강조하는‘치리정돈’정책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의외로 빠르게 회복하였고, 중국경제는 다시 개혁과 개방을 심화 확대하면서 세계에서 제일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가 되었다.
<표-2> 중국의 주요경제 지표 (1980-1992)
80년 84년 88년 89년 90년 91년 92년 |
실질 GNP 성장율 7.9 14.7 11.0 4.9 5.2 7.0 12.8 공업생산 증가율 9.3 16.3 20.8 8.5 7.8 14.2 20.8 농업생산 증가율 1.4 12.3 3.9 3.1 7.6 3.0 3.7 소매물가 상승율 6.0 2.8 18.5 17.5 2.1 2.9 5.4 무역수지(억달러) -13.7 -12.7 -77.5 -66.0 87.5 81.2 44.0 |
자료출처: 㰡”中國統計年鑑㰡• (國家統計局, 各年度版)
三菱總合硏究所 編, 㰡”中國情報 ハドブック 1992年版㰡• (蒼蒼社,1992)㰡”地域經濟㰡•
(1993년 3월), pp. 4-9
이처럼 중국경제는 개혁과 개방으로 놀랄만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사회 전반에 중요한 구조적 변화를 동시에 가져왔다. 흔히 지적되는 것이지만, 중국경제에서 국가부문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으며, 비국가부문의 비중이 증대되고 있다. 특히, 경제구조의 개혁과 더불어 다양한 소유구조가 등장하고 있으며, 비국영부문이 중국경제의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의 <표-3>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지난 10여년 동안 경제구조의 개혁과 더불어 전민소유제의 비중은 현저하게 축소되고 있으며, 향진기업과 같은 집단소유의 기업, 개인소유의 기업, 그리고 합작기업 및 외자 독립기업등 다양한 소유형태의 경제단위들의 비중이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증가하면서 중국경제의 활력과 성장을 선도하고 있다.
<표-3>공업생산액의 소유별 구성비와 신장율 (1978-1990)
( )안은 전년대비 신장율 %
연도 전민소유제 집단소유제 개인소유제 기타 경제유형 |
1978 77.63(14.4) 22.37(10.6) 1980 75.97(5.6) 23.54(19.2) 0.02 1982 74.44(7.1) 24.82(9.5) 0.06(79.0) 0.68(27.73) 1984 69.09(8.9) 29.71(34.9) 0.19(97.5) 1.01(56.81) 1986 62.27(6.2) 33.51(18.0) 2.76(67.6) 1.46(34.16) 1988 56.80(12.6) 36.15(28.2) 4.34(47.3) 2.72(61.53) 1990 54.60(3.0) 35.62(9.0) 5.39(21.1) 4.38(39.33) |
자료출처: 三菱總合硏究所 編, 㰡”中國情報 ハドブック 1992 年版㰡• (蒼蒼社,1992), p. 158
물론 이와같은 중국경제의 구조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국가부문이 중국경제의 ‘사령탑 (commanding height)'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민소유제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중국경제에서 사기업과 사적 경제영역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와같은 추세로 비국가부문이 발전, 성장한다면, 곧 중국경제는 사유경제나 준(準)사유경제가 주도하게 될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 하겠다. 이미 일부 지역에서는 사적 경제부문이 국가부문을 능가하고 있다. 이를테면, 전국에서 사영기업이 가장 빨리 발전한 절강성(浙江省) 온주(溫州)의 경우, 1980년도 총공업생산중에서 국영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31.44%이었지만, 1985년에는 18.45%에 불과하게 됨으로써, 사적 경제가 지역경제를 주도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와같이 중국경제의 구조개혁은 소유형식의 다원화와 더불어 사적 경제영역의 확대와 발전을 촉진하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경제의 ‘시장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것은 국가의 통제품목의 감소, 공업생산액에서 차지하는 지령성 계획의 비중 축소, 그리고 가격조정의 감소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공업생산에서 국가계획위원회의 지령계획 제품은 1978년에 120종이었지만, 1986년에는 60종으로 축소되었고, 지령계획 제품이 공업생산액중에서 점유하는 비율도 40%에서 20%로 감소하였다. 상업부문에서도 지령계획의 통제를 받는 상품이 188종에서 25종으로 대폭 감소하였다.
이처럼 국가의 통제영역이 축소되고 시장메카니즘이 작용하는 부문이 확대되면서 중국경제의 ‘시장화’가 점차로 확대되고 있다. 물론 ‘시장화’의 정도는 앞에서 지적한 지령성 계획 품목의 축소가 암시하는 것처럼 대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또 히로유끼의 분석에 의하면, 중국의 사회노동자수에서 시장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1년에 4.69%에 불과했지만 1991년 현재 16.93%로 증가하였다. 다시 말해서 노동분야의 ‘시장화’는 지난 10년간 거의 4배로 증가했지만, 1991년도 현재 아직도 전통부문이 60%, 계획부문이 23.07%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경제에서 시장의 역할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특히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하면서 중국경제의 시장화는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고 하겠다.
이와같이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당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하여 기존의 계획경제체제를 대담하게 변혁시킴으로써 경제발전과 시장경제의 확대를 촉진하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부분적인 자유화와 다원화를 허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체제는 고전적 사회주의체제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으며, 경제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린츠가 권위주의체제의 특징으로 지적하고 있는 ‘제한적 다원주의 (limited pluralism)’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즉, 중국적 사회주의는 다른 권위주의체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권력의 집중성을 유지하면서도 이데올로기와 경제 및 사회영역에서 어느정도의 자유화와 다원화를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고전적인 현실 사회주의로부터 보다 이완된 형태의 권위주의체제에로 이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적 사회주의를 일반적인 권위주의와 구별하여 ‘신권위주의’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반적 권위주의체제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첫째, 자본주의적 권위주의체제와는 달리 여전히 당국가체제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 개발독재론적 권위주의체제와 마찬가지로 구질서를 유지하려는 ‘구권위주의체제’와는 달리, 중국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통하여 경제발전과 현대화를 달성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체제에서 당국가는 경제발전과 현대화를 촉진하는 ‘사회주의 발전국가’, 또는 ‘신권위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Ⅴ. 결언: 신권위주의와 중국의 미래
신권위주의론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간의 논쟁은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보수파의 득세와 더불어 일단 종결되었다. 특히, 천안문사태가 진전되면서 민주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신권위주의론자들도 대부분 조자양과 마찬가지로 민주화 시위에 대한 보수파의 강경대응에 불만을 표시하였고, 일부는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함으로써 당국에 의하여 체포 구금되거나 해외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권위주의론은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내에서는 더이상 공식적으로 재론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홍콩을 비롯한 해외에서 일부 망명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천안문사태의 경험을 반성하면서 신권위주의론을 부분적으로 재평가하려는 경향이 대두됨으로써 새로운 논쟁점을 제공하고 있다. 이를테면,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자처하고 있는 망명 지식인 오국광(吳國光)은 신권위주의론에서 인정할 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오국광에 의하면 민주론자들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도 그것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과정론을 경시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신권위주의론은 민주화에 대한 과정론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신권위주의는 공산주의 계획경제에서 탈피하는 첫번째의 조치로서 경제적 자유화와 사유화에 촛점을 맞추고 있고, 이와같은 경제적 자유화와 사유화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구체제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의 저항은 물론이거니와, 구사회주의적 제도의 혜택에 대하여 집착하고 있는 일부 민중부문으로부터도 저항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에 강력한 개혁 지향적 ‘신권위’가 필요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적 상황에서 신권위주의는 일종의 변형된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국광은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변혁과정에서 신권위주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경제적 자유화를 먼저 실행함으로써 점진적으로 민주화로 발전해 가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권위주의론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개혁과 개방과정에서 나타나는 지역적 이기주의와 지방할거주의의 위험성, 특히 소련에서와 같이 당국가체제가 붕괴된 이후 전개될 수 있는 정치적 혼란과 무질서의 위험성에 주목하여, 일부 지식인들은 중앙정부의 권력집중과 통제력을 어느 정도 용인하면서 경제적, 사회적 자유화를 확대하자는 신권위주의론이나, 또는 민주화에 이르는 제3의 길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언진(顔眞)은 민주주의가 절대적 역사적 요구이지만, 동시에 중국민족의 생존도 역시 절대적인 현실 요구라고 전제하면서, 중국의 비극은 이 두 가지 요구가 이율배반적이란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중국은 전제주의를 접수할 수도 없지만, 동시에 소련이나 동구에서처럼 서방의 정치제도를 수입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현실에서 서방적인 민주정치를 실천한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여 중국민족의 통일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화민족의 이성적 선택’은 제 3의 길, 즉 점진적인 개량의 방식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대 논쟁을 유발하였다.
이처럼 해외에서 신권위주의론에 대한 논쟁이 부분적으로 재연되는 가운데, 중국에서는 천안문사건과 동구및 소련의 몰락이 준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신권위주의론적 관점에서 개혁과 개방을 더욱 심화, 확대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즉,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려면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공산당 지배하의 정치권력의 집중과 독점을 유지하면서도 제한적인 범위에서 경제적, 사회적 자유화와 다원화, 자율화를 인정하려고 한다. 이와같은 신권위주의적 발상은 지난 14차 당대회에서 결정된 중국의 미래에 대한 구상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하겠다.
지난 1992년 10월에 개최된 14차 당대회에서 강택민이 발표한 보고에서 당 지도부는 제2의 천안문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적극적인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앞으로 중국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지향한다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14차 당대회에서는 지난 1987년에 개최된 13차 당대회에서 결정된 ‘계획적인 상품경제론’보다 한걸음 더 진전된 경제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공유제를 더욱 완화하고 국가의 간섭과 규제를 대폭 축소할 것이며, 전면적인 개방을 선언함으로써 개혁, 개방의 심화와 확대란 방침을 명확히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4차 당대회는 이와같이 경제적인 자유화, 개방화를 강조하면서도, 정치적인 개혁에 대해서는 13차 당대회보다 보수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는 데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즉, 13차 당대회에서 당시 총서기였던 조자양은 당정분리를 주장하였고, 기업내부에서 당조직의 역할 축소를 강조했지만, 14차 당대회에서 총서기인 강택민은 적극적인 경제개혁을 제안하면서도 국영기업내의 당조직을 ‘정치핵심’이라고 주장하면서 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14차 당대회에서 결정된 당의 정책정향은 경제의 자유화와 정치적 통제의 강화란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현 중국 지도부의 신권주의론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당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시장경제를 확대하면서 부분적인 자유화와 다원화를 허용하고 있으며, 이와같은 신권위주의론적 전략은 어느 정도 적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신권위주의적 전략의 성공, 즉 시장경제의 발전과 자유화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민주화의 요구를 또한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권위주의론과 민주론간의 갈등과 긴장은 오히려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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