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현대중국 정치학]제4부 제1장 중국의 개혁과 개방: 이념과 정책

지식창고지기 2009. 6. 30. 01:09

[현대중국 정치학]
제4부 제1장 중국의 개혁과 개방: 이념과 정책

 

 

Ⅰ. 사회주의 국가의 개혁과 개방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는 소련․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추진되고 있는 개혁과 개방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은 모택동이 사망하고 등소평이 집권한 1978년 이후, 소련은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1985년 3월 이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혁명적인 개혁과 개방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사회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있으며 새로운 차원에서 사회주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명제를 제기하였다. 사실 소련과 중국의 현대사에서 개혁과 개방은 고르바초프와 등소평에 의하여 처음으로 제기 실천된 것은 아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격하운동과 경제체제의 개혁, 그리고 1958년 대약진운동이 실패한 후 중국에서 실시되었던 신경제정책 등은 모두 사회주의에 대한 경직화된 이념과 제도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소련과 중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개혁․개방정책과 기본적으로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치열한 노선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의 경우, 1978년 이후 등소평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개혁과 개방정책은 과거 실용주의파가 주장하였던 정책노선을 집대성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개혁과 개방정책이 부분적인 변화, 특히 경제정책의 변화만을 주로 강조한 것이며 그것도 기존의 사회주의체제를 보완한다는 차원에 머문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등소평과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노선이 중국과 소련사회의 모든 부문에서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모택동과 스탈린시대에 형성된 사회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차원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며 역사적인 변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등소평과 고르바초프는 사상해방과 경제발전, 인민생활의 개선과 정치적 민주화 등을 표방하면서 ‘발상의 대전환’과 ‘제 2의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소련과 중국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에 대한 재해석이 강조되고, 과거에는 금기시 되었던 자본주의적 요소가 대폭적으로 수용되는가 하면, 정치제도의 민주화가 확대되고 있다.

 

이와같은 혁명적 변혁운동에 대하여 일부 서방세계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개혁파 지도자들이 사회주의제도의 한계를 인식하고 암묵적으로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사실 소련과 중국의 급진적 개혁파들과 반체제 인사들 중에는 사회주의제도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냉소주의가 만연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소련과 중국에서 추구하고 있는 개혁과 개방정책을 사회주의의 포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란 차원에서 분석할 때, 비로소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혁의 역사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1978년 이후 등소평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의 실체와 성격을 분석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과 개방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Ⅱ. 중국의 개혁정치: 배경과 논리

 

중국의 개혁파 지도자들은 중국인민에게 일대 재난을 가져다주었던 문화대혁명 10년(1966~76)의 경험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혁명적인 개혁과 개방정책을 시행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등소평정권과 개혁노선의 등장은 문화혁명 기간동안 박해를 받았던 관료와 당간부, 지식인 등 광범위한 사회계층이 1976년 모택동의 사망을 계기로 결집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66년 모택동과 임표, 그리고 강청과 같은 좌파 지도자들이 혁명의 일상화와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새로운 계급질서의 형성문제에 주목하여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계급투쟁론과 계속혁명론을 제기함으로써 폭발한 문화대혁명은, 초기에는 혁명적 이상주의와 평등주의로 말미암아 신중국과 신문화의 건설이란 목표에 대한 청년․학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창출했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문화혁명의 혁명적 이상주의가 권력투쟁과 냉엄한 현실적 제약조건에 의해 왜곡되면서 엄청난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첫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에 대한 단순하고도 교조적인 해석이 강요되었다. 둘째, 중국의 현실적인 조건을 무시하고 계급투쟁과 혁명사상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경제적 위축과 침체를 초래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생활개선을 요구하는 대중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였다. 세째, 무분별한 반(反)자본주의․반(反)수정주의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광범위한 관료, 당간부, 지식인 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문화혁명은 역설적으로 문화혁명을 부정할 다양한 세력과 계층을 스스로 배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문화혁명 과정에서 형성된 반좌파세력은 모택동의 사망을 계기로 등소평을 중심으로 집결되어 1978년 12월에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 11기 중앙위원회 제 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에서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사상개방과 경제발전, 그리고 경제구조와 정치체제의 개혁을 표방하면서 모택동시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중국적 사회주의의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반좌파세력은 모택동사상을 절대화 신비화하였던 좌파의 교조주의를 비판하면서, 실사구시와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입장에서 좌파사상과 모택동사상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등소평은 1978년 6월 6일자 인민일보에 게재된 「전군정치공작회의에서의 강화」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도 실제의 상황에 맞지 않을 때 그것은 생명력을 상실하는 것이며, 모든 이론․정책․계획․방법이 정확한가의 여부는 실천을 통해서 검증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중국의 실제와 맞지 않는 모택동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 반좌파세력에 의하면 중국의 구체적인 실제상황, 또는 중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주요 모순은 “사회주의적 건설이 기본적으로 달성된 이후에 나날이 증대하는 인민대중의 물질적 문화적 욕구와 낙후된 사회적 생산과의 모순”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당과 국가의 최대․최고의 과제가 사회적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다시 말해서 중국사회에서 대규모의 계급투쟁은 1956년 사회주의 개조의 완성과 함께 사실상 종식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당면과제는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켜 인민의 물질적 문화적 생활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도 계급이 존재하며 계급투쟁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모택동사상은 중국의 구체적 실제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정신과도 위배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개혁파 이론가들에 의하면 “생산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생산력”이란 관점에서, 생산력의 발전으로 물질적 기초가 형성되기 이전에 계급투쟁과 사상혁명만을 강조하여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모택동의 계급투쟁론은 유토피아주의라는 것이다.

 

세째,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결된 후 중국의 최대․최고의 과제가 경제발전이란 관점에서 모든 정치사상, 모든 정치운동, 그리고 모든 정치․경제제도와 정책의 재검토가 필요하며,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서 생산관계와 상부구조의 다양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개인과 집단의 경제활동에 대한 자율권 확대와 평등주의적 분배정책의 지양, 그리고 획일적인 경제구조의 경직성 극복을 강조하였고, 문화혁명으로 파괴된 당과 국가제도의 재건과 정치제도의 합리화, 그리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는 정치체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1978년 중공당 11기 3중전회에서 등소평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좌파연합세력은 유생산력론(唯生産力論)의 관점에서 해방(1949)후 중국 역사 과정에서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의 역할을 재평가하고, 과거의 모든 정책과 제도를 재검토하여 경제발전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발전이란 차원에서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봄으로써, 1978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견지되고 있는 개혁정치의 기본노선을 확립하였다.

 

Ⅲ. 중국적 사회주의의 구체적 내용 : 경제개혁과 정치개혁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권이 등장한 이후 중국사회는 엄청난 변모를 거듭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특히 경제분야에서 등소평의 개혁과 개방정책은 모택동 시대와는 거의 정반대의 논리에 입각하여 중국사회를 혁명적으로 변모시켰다.

 

첫째, 1978년 중공당 11기 3중전회 이후 개혁파들은 모택동 시대의 자력갱생과 같은 폐쇄적인 쇄국정책이 중국의 경제적 낙후와 국제적 고립을 초래했다고 비난하면서 적극적인 대외개방정책으로 전환하였다. 특히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선진기술과 외국자본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서구 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제교류와 경제협력을 적극적으로 확대하였다.

 

1979년 7월 중국은 외국자본과 기술의 중국 유치를 촉진하기 위하여 중외합자경영기업법을 비롯하여 각종 법령을 제정하였고, 무역관리체제를 분권화하여 지방정부와 개별기업들에게 외화사용권과 외자도입의 심사 및 인가 권한을 상당한 정도로 위임하였으며, 경제특구를 설립 확대하여 외국기업의 직접투자를 장려하였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대외경제 개방정책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대외무역은 급신장하였다. 중국의 총교역량은 약 673억 달러로, 이는 대외개방정책이 공식화되었던 1979년과 대비하여 약 130%가 증가하였으며, 그것은 대부분 서방 자본주의 국가와의 교역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 현재 소련 및 사회주의 국가와의 교역량은 중국 총교역량의 약 15%에 불과하다. 이같이 일본 및 서방국가와의 교역량이 계속 증가되는 추세이며, 동시에 외국자본과의 직접투자도 활발히 확대되고 있다. 특히 경제특구가 설립된 이후 이 지역에서의 외국기업의 직접투자와 대외교역이 더욱 증가되고 있다. 1979년에는 광동성의 심수를 비롯하여 4개 경제특구가 설치된 이후 14개의 연해 항구도시와 해남도의 개방이 확정되었고, 최근에는 요동과 산동반도 등에 대한 개방이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1987년 이후 중국의 개혁파들은 소위 ‘국제대순환론’을 제창하면서 중국의 연해지구에 밀집된 풍부한 노동력을 외국의 자본․기술과 결합하여 노동집약적 공업을 발전시킴으로써 일본, 한국, 대만 등이 달성한 수출주도형 경제발전의 계기를 찾을 수 있다고 가정하고, 이 지역의 개방을 더욱 서두르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경제개방은 그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점(点)에서 선(線)으로, 선에서 면(面)으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4월 중국정부는 연해지구에 위치한 총 284개의 현을 개방지구로 공고하였는데, 그것은 총면적 32만 ㎢이며 여기에 거주하는 총인구는 약 1억 6천만 명이나 된다. 물론 대부분의 내륙지방은 아직도 외국기업에 개방되지 않은 상태이며, 연해지구의 개방도 중국의 개혁파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만큼의 경제적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인지는 아직 의문이지만, 이와 같이 경제개방 지역이 확대되면서 외국, 특히 서방국가의 경제적 문화적 영향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둘째, 대외개방정책과 함께 중국사회에 가장 심각한 변화를 초래한 경제개혁정책은 농업생산책임제의 실시와 인민공사제도의 해체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3중전회에서 개혁파들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를 침체된 농촌경제를 활성화하여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고 중국경제의 전반적인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2개의 정책문건을 통과시켰다. 즉 「농촌인민공사공작조례」와 「농업발전을 가속화하기 위한 약간의 문제에 관한 결정」이 그것이다. 이 당시의 농촌경제 정책은 인민공사제도를 전면적으로 철폐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개별 농가와 소규모 생산집단의 경제적 자율권을 확대함으로써 농촌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정한 경작지와 책임생산량을 개별 농가에게 할당하고, 책임량을 초과생산한 부문에 대하여 개별농가가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농업생산책임제가 점차로 확대 실시되면서 인민공사제도는 근본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농업생산책임제는 토지와 주요 생산수단 등에 대한 집체소유권을 변경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용권을 개별 농가에게 장기적으로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농촌사회의 경제활동을 통제해왔던 인민공사의 기능은 실질적으로 무력화되었다. 게다가 1982년의 신헌법이 인민공사제도와 관련하여 정경분리․정사분리의 원칙을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1958년 대약진운동 과정에서 ‘농․공․상․학․병의 합일’과 ‘정사합일(政社合一)’의 종합적인 단위로 설립되어 오랫동안 중국의 농촌사회를 지배해왔던 인민공사제도가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와 같이 농업생산책임제의 실시와 인민공사의 해체로 말미암아 중국의 농촌사회는 실질적으로 1950년대초, 농업협동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이전의 상태로 환원되었다. 비록 토지의 개인소유권은 인정되고 있지 않지만, 토지에 대한 개인의 사용권을 장기간(일반 토지의 경우는 15년 이상, 그리고 과수원 등은 50년 이상)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토지사용권을 매매할 수 있게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농촌사회에서 집체경제의 역할은 극소화되었고, 개체경제가 급속히 확장되었다. 더구나 농가의 개인부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전업농가에 대한 지원을 확대함으로써 농촌사회에서 소상품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일부 지역, 일부 농민이 우선적으로 발전함으로써 모든 지역, 모든 농민 계층이 점차로 공동 부유의 길로 발전해 갈 수 있다”는 논리에서 출발하여, 농민들의 ‘자본주의적 성향’을 최대한도로 활용함으로서 농촌경제를 활성화한다는 개혁파의 농촌경제정책은 해방 이후 천신만고 끝에 건설한 사회주의적 농촌경제구조를 하루아침에 파괴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농촌경제를 발전시키고 농민들의 생활개선에 기여함으로써 장기적인 국가정책으로 정착되었다.

 

이와같은 개혁파의 농촌경제정책은 여러가지 부작용, 특히 계층간․지역간 소득의 불평등과 ‘자본주의적 요소’의 확산으로 파생되는 농촌사회의 부정과 부패현상의 급증 등 심각한 사회적 갈등요인을 산출했지만, 1950년대 이후 정체되었던 농업생산의 성장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실 중국의 농업생산량은 1978년 이후 전례없는 속도로 성장하였다. 이를테면 1978년에서 1984년 사이의 곡물산출고는 연평균 5%의 비율로 증가되었는데, 이것은 1957년부터 1978년까지의 평균 성장율 2%를 두 배 이상 초과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농업생산율이 급성장하면서 실질농가소득도 대폭적으로 증가되었다. 1978년 1인당 평균농가소득은 134원에 불과했지만, 1983년에는 310원으로 증가되었다.

 

이와 같은 농업생산율과 농가소득의 증가가 모두 개혁정책의 결과라고는 할 수 없으며, 그리고 농촌경제의 발전속도는 1984년 이후 둔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개혁노선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농촌경제가 다양해지고 활력을 되찾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개혁파 지도자들은 이와같은 농촌경제개혁의 성공에 힘입어 1984년부터 본격적인 도시경제의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세째, 1984년 10월 중공당 제 12기 3중전회는 ‘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고 본격적인 경제체제개혁에 착수하였다.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를 중국의 실제에 결부시켜 중국적 특색을 지닌 활력에 넘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시된 경제체제 개혁안은 무엇보다도 ‘가치법칙에 입각한 계획적 상품경제’의 발달을 강조하였다.

 

개혁파 경제이론가들에 의하면 계획경제와 상품경제를 대립적으로 파악했던 과거의 통념은 잘못된 것이며, 사회주의경제는 공유제를 기초로 하는 계획적인 상품경제라고 주장하였다. 즉 계획경제의 실현과 가치법칙의 운용 및 상품경제의 발전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혁파들은 1984년 이후, 첫째, 계획경제의 영역을 합리적으로 축소 조정하고 완전한 시장메카니즘에 의하여 조절되는 경제활동 영역을 확대하려고 하였고, 둘째,합리적 가격체제를 확립하고, 국가의 경제활동에 대한 행적적 간섭을 극소화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민소유제의 대․중형 기업이 경제적 활력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기업의 자주권을 대폭적으로 확대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경제체제의 개혁방안이 모두 철저하게 실천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계획경제와 시장경제가 개혁파들이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상호보완적인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개혁정책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개혁파의 경제체제 개혁은 중국사회를 급진적으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첫째 경제개혁이 추진되면서 국민경제의 상품경제화가 지속적으로 증가되고 있다는 점, 둘째 전민소유제 경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어느 정도 개인 소유의 범위가 확대됨으로써 다양한 소유제 구조가 공존하게 되었다는 점, 세째 전민소유제의 기업에 있어서 소유권과 경영권이 분리되고 기업의 자주권이 대폭적으로 확대됨으로써 기업이 독립된 경제적 실체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 끝으로 기업과 노동자의 이익 및 분배문제에 있어서 평균주의에서 탈피하여 국가․기업․개인 노동자의 이익을 공동적으로 고려하고, 엄격한 노동에 의한 분배를 실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경제의 질적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등소평정권은 대외개방과 국내경제의 활성화를 표방하여 대규모의 경제개혁을 단행하면서 과거 모택동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요소를 수용하여 사회주의 경제구조의 경직성과 획일성을 극복하려고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같은 대담한 경제개혁이 단순히 경제분야에서 고립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제체제의 개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이 타파되어야 하며, 동시에 생산력의 발전을 구속하는 생산관계와 상층구조의 변혁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개혁파들은 정치체제의 개혁을 동시에 요구하였다. 더구나 중국의 경우, 문화혁명기간에 당과 국가의 민주적 전통과 제도가 파괴 왜곡되었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개혁파들은 사회주의 정치제도의 민주화와 법제화를 경제개혁 못지 않게 중요한 당의 과제라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1978년 이후 개혁파들은 문화혁명기간에 파괴되었던 각종 당기구와 국가기구를 재정비하고 당과 국가기구의 민주화와 합리화를 확대하려고 노력하였다. 이같은 정치개혁의 기본방향은 1982년에 새로 제정 공포된 신당장(新党章)과 신헌법에 반영되어 최근까지 다음과 같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문화혁명 좌파에 의해 강조되었던 당의 일원적 영도원칙이 수정되었다. 1982년의 신당장에 의하면 당은 모든 부문에서 포괄적인 영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상, 그리고 조직의 영도”에만 책임이 있으며, “반드시 헌법과 법률의 범위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제한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서 1987년 13전대회에서 조자양은 당과 정권기관, 그리고 각종 사회조직은 각각 그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마땅히 당정분리와 정경분리의 원칙을 제도화함으로써 정권기구와 사회조직의 자율적 활동영역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정권기구와 각종 사회조직, 그리고 경제단위의 고유업무와 활동에 대한 당의 지나친 간섭은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방침에 의거하여 이들 정부기관과 사회조직체내에 설립되었던 각급 당위원회와 당조의 기능이 대폭적으로 축소되었다.

 

둘째, 1980년 8월 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등소평은 “당과 국가의 영도제도개혁”을 요구하면서, 정치개혁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를 권력집중의 방지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등소평에 의하면 “권력의 지나친 집중현상은 당의 일원적 영도를 강화한다는 구호 아래 부적절하게도 모든 권력을 당위원회에 집중시킴으로써 비롯되었다”고 지적하고, “당위원회의 권력은 몇몇의 서기, 특히 제 1서기에 집중”됨으로써 개인영도와 가부장적 작풍(作風)을 산출했다고 비난하였다. 따라서 당과 국가기구에서 개인영도와 가부장적 작풍을 극복하기 위하여 집단지도의 원칙과 권력의 분권화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등소평의 견해는 1982년 헌법과 당헌에 반영되었으며, 권력집중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개혁이 추진되었다. 즉, 국가주석과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 당 총서기, 그리고 국무원 총리 등의 직권을 재조정하여 당과 국가의 권력이 어느 한 기구와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방지하려고 하였다.

 

세째, 당과 국가의 각급 단위에서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토론을 활성화하고 선거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당의 중앙위원 선출과정에서까지 차액선거제(선출되어야 할 정원보다 더 많은 후보자를 제시하는 방식)를 도입함으로써, 과거와 같은 형식적인 선거의 개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치개혁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비하여 당의 기능과 권한이 상당히 축소되었고, 권력집중의 현상도 부분적이나마 해소되었으며, 어느 정도 민주적 정치질서가 제도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체제의 개혁은 기존의 사회주의 정치제도의 기본골격을 계속 유지하면서 부분적인 결함, 즉 과도한 권력집중과 불합리한 조직형태, 그리고 심각한 관료주의 등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경제개혁과는 달리 상당히 조심스럽고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하겠다.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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