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 정치론]
제4부 제4장 중국적 사회주의의 딜레마 : 천안문사건을 중심으로
Ⅰ. 서론
우리는 사회주의권의 대변혁을 통하여 다시 한번 민주화는 역사의 불가역적인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록 중국에서는 1989년의 천안문사건으로 알려진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보수적 지도자들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비극적인 결과를 낳고 좌절되었지만, 동구와 소련에서는 공산당의 일당독재로 특징되는 기존의 사회주의체제가 몰락되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변혁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우리의 시야를 넓혀 보면 이와 같은 민주화운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1987년의 국민적 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에서도 5.16군사 쿠데타이후 우리나라의 정치를 지배해 왔던 군사독재체제를 붕괴시켰으며, 필리핀, 대만,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도 권위주의체제의 몰락과 민주주주의에로의 역사적 진보가 실현되었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와 90년대는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민주주의에로의 역사적인 변혁운동이 전개되는 시기라고 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동일한 속도로 동일한 경로를 따라서 민주화의 과정을 밟아 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민주주의가 범세계적이고 불가역적인 시대정신을 표출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구체화되는 과정과 형태는 나라마다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 나라의 정치적 조건, 사회경제적 발전정도, 문화전통에 따라서 민주화의 과정은 각기 다른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와 같은 조건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 과정이 중국의 민주화 과정과 같을 수 없고, 또한 같은 사회주의체제를 견지하고 있는 나라들 사이에서도 민주화의 과정은 각국의 사정과 역사적 전통에 따라서 상이한 경로와 상이한 형태로 진행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든 나라들이 마침내 사회-경제적 다원화와 자유화, 그리고 민주화의 과정을 밟아 갈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때문에 권위주의체제의 해체를 불가역적인 역사적 조류라고 인식하게 하는 것인가. 이 모든 변화의 동력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다양하고 논쟁적일 수 밖에 없다. 혹자는 맑스-레닌주의의 전체주의적인 이념과 체제가 인류 보편의 가치인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면적인 붕괴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기도 하고, 또는 일당지배의 원칙에 입각한 당국가제도의 획일성과 중앙집권적인 계획경제의 비효율성등이 사회주의국가의 몰락을 자초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설명은 그런대로 사회주의체제의 위기를 설명하는데 어느 정도 적실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소련과 동구에서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이란 현상은 맑스-레닌주의의 종국적 몰락을 증명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로는 非사회주의적 권위주의 정권의 해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근대화론의 연장선상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 변화라는 관점에서 민주화운동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근대화의 일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등장한 국가주도의 동원체제는 그런대로 정치-사회적 안정과 경제발전을 추진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의 ‘성공’이 아이로니칼하게도 국가주도의 동원체제의 취약점과 한계를 노출시킴으로써 체제적 위기를 조성했다. 이와같은 논점에 따르면 사회주의체제는 초기단계에서 당국가체제와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 입각하여 국가부문의 사회적 침투와 동원, 그리고 경제발전에 상당한 정도로 성공했지만, 근대화와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당국가체제의 경직성과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이 노출되면서 사회경제적 정체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치-이념적 냉소주의가 팽배하게 됨으로써, 정치체제와 경제제도의 개혁과 개방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개혁과 개방정책은 사회-경제구조의 다원화를 더욱 촉진시키고, 이른바 ‘사회주의적 시민사회’의 요소를 등장시킴으로써 당-국가부문에 대한 시민사회의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지배관계에 변화가 발생하게 했다. 즉, 사회부문의 성장은 개혁과 개방을 촉발시키고, 개혁과 개방은 다시 사회-경제적 다원화를 촉진하면서 정치와 이념부문에서 자유화와 민주화의 요구가 제기된다.
물론 모든 나라에서 다원화-자유화-민주화가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자유화와 민주화과정이 순탄하게 발전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유화와 민주화가 동시병행적으로 진행될 수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실현될 수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국제환경과 통치 엘리트들의 성향과 태도, 그리고 주요 이익집단들간의 관계 등 다양한 요인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적 요소’들이 성숙함에 따라 자유화와 민주화에의 요구가 제기됨으로써,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권위주의적 지배를 견지할 수 없게 된다는 명제는 부정할 수 없다고 하겠다.
Ⅱ. 천안문사건와 중국사회주의의 딜레마
1. 천안문 민주화운동의 사회-경제적 배경
오늘날 중국의 보수적 지도자들에 의하여 ‘동란’으로 규정되고 있는 1989년 천안문사건은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그것은 등소평도 인정한 것처럼 ‘국제적 대기류와 국내적 소기류가 합치된’ 사건이며, ‘반드시 올 것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등소평이 말하는 국제적 대기류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촉발된 사회주의권의 변혁운동과 서방세계의 이른바 ‘화평연변(和平演變),’ 즉 평화적 방식으로 사회주의체제의 변질을 획책하는 외부의 압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국내적 소기류란 개혁, 개방정책과정에서 제기되고 있는 자유화와 민주화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천안문사건이란 지난 10여년간 등소평이 주도한 개혁과 개방정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등소평은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경제발전 제일주의를 표방하면서 모택동식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과감한 개혁과 개방정책을 단행함으로써, 중국사회를 엄청나게 변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등소평은 농촌와 도시지역에서 기존의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대담한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자본주의국가에 대한 전면적인 문호개방정책을 단행함으로써 중국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실현하였다.
실제로, 몇가지 경제지표만을 보더라도 등소평의 개혁, 개방정책의 성과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중국은 개혁, 개방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1979년부터 1988년까지 10년간 년평균 GNP 성장율 9.6%의 고도성장을 기록했으며, 무역총액도 1978년의 200억 달러선에서 1988년에는 1030.3억 달러에 달하였다. 또한 도시와 농촌지역에서 일인당 평균수입도 현저하게 증가되었다. 특히, 농촌지역에서는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1980년에서 1989년사이에 일인당 평균 순수입 증가율이 215.2%에 달하였고, 도시노동자의 경우도 같은 기간에 65.5%의 소득증가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등소평의 개혁, 개방정책의 결과로 중국경제의 규모는 엄청나게 증대되었고,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과거보다 현저하게 향상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같은 외형적 변화와 발전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의 경제와 사회의 질적 변화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등소평의 경제발전 제일주의에 입각한 개혁과 개방정책은 중국사회의 다원화를 촉진시켰으며, 당국가체제의 지배로 부터 자율적인 영역과 집단을 산출했다. 지난 10여년동안 중국의 지도부는 자유화와 민주화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경제-사회영역에서는 상품경제의 발전, 시장경제에로의 개혁, 경제개방정책등을 꾸준히 추진함으로써 중국경제와 중국사회의 다원화와 자율화의 영역을 확대했다.
첫째, 지난 10여년간의 개혁, 개방정책으로 말미암아 상품경제화가 진행되고 경제구조의 변화가 발생하면서 사회․경제적 유동성이 현저하게 증가되었다. 산업구조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1차산업의 비중이 감소되고 2차, 3차산업의 비중이 증가되면서 유동인구가 증가되었으며, 상품화와 더불어 개인들의 경제활동 영역과 이동성이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계획경제의 영역이 축소되고 시장경제로 이행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소유제와 경제운영 형태가 등장하였다. 상품경제화와 시장경제화의 결과로 소유제와 경제운영 원리의 다원화가 촉진되고 있다. 예를들면, 농촌지역에서는 인민공사의 해체와 더불어 집단경영원칙이 사실상 포기되었으며, 개별농가가 경제적 주체가 되었으며, 도시와 농촌지역에서 자영업부문이 급속하게 증가되었고, 국영부문이 축소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소유제와 경제운영에 있어서 개인, 집단, 국가부문이 공존하는 다종경제의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
셋째, 이와같은 소유제와 경영원리의 다원화는 대대적인 개방정책으로 더욱 촉진되고 있다고 하겠다. 경제특구와 경제개발구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지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외자기업들이 등장함으로써 국가의 통제와 계획의 영역이 축소되면서 민간부문이 현저하게 확대되고 있다.
경제-사회의 다원화와 자율화는 중국경제의 활력을 불러 일으킨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당국가의 통제력 약화와 더불어 사회-경제적 긴장의 심화, 그리고 정치개혁에 대한 압력 증가라는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도 산출했다. 특히, 상품경제화와 시장경제화가 확대되고 다양한 형태의 경제주체가 등장하면서 이들 사이의 마찰과 갈등이 증가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경제주체가 등장하면서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계층간, 지역간의 경제적 격차가 발생하여 사회적인 긴장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도시와 농촌지역에서 새롭게 등장한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신흥 부농과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보통사람들이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부를 축적하였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질시가 확산되면서 공동체의 동질성이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개혁, 개방정책이 대도시와 연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도시와 농촌, 연해안지역과 내륙지역간의 지역적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예를 들어, 1987년의 1인당 국민소득이 평균 872원이었을 때, 대도시인 상해는 3,816원, 천진은 2,264원이었고, 광동성(廣東省)의 평균 국민소득은 1,098원인데 비하여 내륙지방인 강서성(江西省)과 귀주성(貴州省)은 각각 619원과 465원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보더라도 지역적 격차가 얼마나 심각한 현상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개혁과 개방정책은 계층간, 지역간의 불평등을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관료들의 부정과 부패도 확대시켰다. 특히, 가격개혁이 추진되면서 공정가격과 시장가격이라는 가격의 2중구조가 발생함으로써 관료 브로커가 암약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고, 가격의 자유화와 더불어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촉발됨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이 더욱 증폭되었다.
2. 개혁-개방과 더불어 확산되는 자유화-민주화 운동
이른바 1개의 중심(경제발전), 2개의 기본(개혁·개방과 4항 기본노선의 견지)을 표방하는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의 특징은 경제발전을 촉진하기위한 경제체제 개혁에는 적극적이면서도, 당국가체제와 사회주의 이념에 도전하는 자유화와 민주화의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등소평은 문화혁명과 모택동사상의 이념적,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사상해방과 정치개혁을 주장하고, 부분적으로 일부 지식인들의 자유화와 민주화운동을 용인하면서도, 이같은 자유화와 민주화운동이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과 체제를 위협하거나 부정하는 경우에는 주저하지 않고 이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등소평의 정책노선은 지난 10여년간에 있었던 3차례에 걸친 민주화운동에 대한 강경 대응을 낳게 하였다.
개혁 정치 10년간에 있었던 첫번째 민주화운동은 1979년에서 1980년사이에 사상해방과 문호개방, 그리고 과감한 체제개혁을 표방하는 등소평정권의 개혁, 개방정책에 힘입어 일부 당내의 개혁파와 당외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대담한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이른바 ‘북경의 봄’이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당시 정치학자 오가린(吳家麟)이나 당시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연구원이던 엄가기(嚴家其)와 같은 지식인들은 문화혁명 이후 중국의 정치체제를 봉건적 전제체제라고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에서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제도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공산당 당사연구실 연구원인 요개륭(寥蓋隆)은 3권분립제도를 부분적으로 도입하여 기존의 당국가체제에 대한 혁신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위경생과 같은 반체제적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서구적인 민주정치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민주화운동은 대부분 개혁적인 소수의 지식인과 반체제인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대중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산되지 못했다. 따라서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당지도부가 위경생 등 소수의 반체제 지식인들을 구속하고, 4항 기본원칙의 견지를 강조하자, 민주화운동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4년말 도시지역의 경제체제 개혁이 추진되면서 당내의 급진 개혁파를 중심으로 정치개혁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고, 경제개혁의 심화와 더불어 정치개혁도 추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986년경에 담건(譚健)과 같은 행정학자들은 정치권력의 독점은 경제권력의 독점과 마찬가지로 개혁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하면서, 정치의 민주화, 공개화, 법제화를 주장하였으며, 당시 당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 연구소 소장이었던 소소지(蘇紹智)는 사회주의에서 자유의 확대와 인권의 문제를 중시하고, 폴란드의 ‘연대노조’운동과 헝가리의 복수주의체제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86년 안휘성 합비(安徽省 合肥)의 과학기술대학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이에 대하여 당시 과학기술대학 부학장 방여지(方勵之), 인민일보 기자 유빈안(劉賓雁), 문학이론가 왕약망(王若莽) 등이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면서 중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게 되자, 등소평과 당내의 보수파들은 이러한 자유화와 민주화운동에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결정하였다. 따라서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대처한 총서기 호요방을 비판하고, 그의 사임을 요구, 관철시키고, 방여지, 유빈안, 왕약망, 소소지등의 직위해제와 출당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당내의 보수파들은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반자산계급 자유화운동을 전개하면서 당내외에서 점차로 확산되어가고 있는 자유화 ·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87년 13전대회에서 조자양 총서기를 중심으로 당내의 개혁파들이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창하고 개혁과 개방의 심화, 확대를 추진하면서 정치개혁에 대한 압력이 가중되었다. 특히 엄가기와 같은 당내 개혁파 지식인들은 ‘전통 왕조적 권력개념’에 대하여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당내 민주주의와 권력교체의 제도화를 주장하였고, 조사원(曺思源)과 같은 법학자들은 ‘사회주의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헌법 개정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급진적인 당내 개혁파들의 정치개혁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천안문 사건가 폭발하였다.
1989년 천안문사건의 특징은 과거의 민주화운동과 달리, 당내외의 개혁파 지식인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으면서도 광범위한 도시 민중들이 합세함으로써, 5 · 4운동과 같은 대규모의 ‘밑으로부터의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천안문시위에 참가한 대중들이 모두 민주화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관도(官倒)라고 하는 관료의 부정과 부패, 경제개혁의 부작용으로 나타난 엄청난 물가고와 경제-사회적 혼란 등에 대한 불만이 천안문사건을 계기로 폭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들의 불만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한 것은 역시 지식인들의 민주화운동이었다.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부정과 부패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개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민주주의의 실현만이 관료주의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변하였다. 특히, 당내의 노선투쟁에서 조자양을 지지하던 개혁파 지식인들은 보수파에 의한 조자양의 정치적 패배가 분명해 지자, ‘노인정치의 종언,’ ‘독재와 전제정치의 매장’을 주장하면서, 등소평과 보수적인 원로들을 직접 공격하였으며, 일부 급진적인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공산당 타도를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천안문의 민주화운동이 급진적인 정권타도운동으로 발전해 가자 등소평을 비롯한 당내의 보수파들은 잘 알려진 바와같이 무력진압을 단행함으로써 중국에서 민주화운동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Ⅲ. 천안문사건이후 중국의 생존전략
돌이켜보면 1989년은 중국적 사회주의에게도 운명적인 전환기였다. 1978년 이후 10여년동안 추진해 왔던 개혁과 개방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산출했으면서도 그 부작용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대대적인 체제변혁적인 민주화운동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후 더욱 활발해 진 사회주의권의 변혁운동도 경제체제의 개혁 개방에는 적극적이면서도 기존의 당국가체제에 대한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중국적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써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그야말로 안과 밖으로부터 변화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천안문사건는 등소평의 표현을 빌린다면, ‘국제상의 대기류와 국내의 소기류가 합치된’ 사건이며, ‘반드시 올 것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도 공산당의 영도를 포함하여 기존의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는 내용의 이른바 4개의 기본원칙 견지를 강조하는 중국적 사회주의에 대한 국내외의 변화 압력에 대하여 등소평을 비롯하여 중공당의 원로지도부는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즉 천안문 민주화시위를 ‘반혁명 폭란’이라고 규정하고, 무자비한 무력진압을 단행하였고, 이에 대하여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 조자양 총서기를 비롯한 당내의 급진개혁파를 제거함으로써 기존의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려는 의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처럼 천안문사건을 계기로 당내의 보수 강경세력이 등장하여 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가운데, 중국은 ‘안정과 단결, 그리고 사회주의 가치의 수호’가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고 강조하면서 체제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자구책을 다음과 같이 모색하였다.
첫째, 정치적인 차원에서 중국의 지도부는 실추된 당과 국가기구의 위신을 다시 세우고,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테면, 부정, 부패의 척결과 고질적인 관료주의의 병폐에 대한 비판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군중노선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면서 인민대중과의 유대 강화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산당의 영도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여러 정파와 정치세력의 참여를 촉진하는 다당합작과 정치협상제도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국의 지도부는 당의 이념적, 정치적 단결과 영도성을 강조하면서 각급 행정기관, 군, 사회단체, 그리고 기업등 모든 분야에서 당의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당지도부는 지난 10여년의 개혁과 개방으로 이완된 당의 조직적, 이데올로기적 역량을 재건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당원에 대한 재등록 사업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고, 각급 기관에서 당조직을 건설하는 작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특히, 군대에 대한 당의 절대적 지도원칙을 강조하면서 군에서의 정치교육을 강화하고, 군부 내부의 불만세력을 제거하면서 군부에 대한 당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의 통제력을 확보하려는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를테면, 천안문 사건이후 軍區(군구) 사령관들에 대한 인사이동을 단행하였고, 최근에는 전통적인 지방 군구제도의 개편을 모색하였다. 이처럼 군대에 대한 당의 통제력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국방예산을 10년만에 처음으로 증액하여 군인들의 연금과 생활개선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처럼 군에 대한 당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것은 중국적 사회주의의 최후에 보루가 결국 군부일 수 밖에 없다는 당지도부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둘째, 이와같이 정치적 안정을 담보하기 위한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조치와 더불어 중국의 보수적 지도부는 사회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정치, 사상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였다. 특히, ‘부르조아 자유화’와 ‘화평연변’에 대한 비판운동을 강화하였다. 동구의 몰락과 소련사건등을 목도하면서 중국적 사회주의의 특이성과 강고성을 강조하면서 ‘국제반동파들의 사회주의국가에 대한 화평연변 음모’에 대한 ‘계급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사실, 동구와 소련사태는 중국의 지도부에게 충격을 주었고, 중국 국내외에서 중국적 사회주의의 장래에 대해 깊은 불안과 회의를 가지게 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사회주의의 장래에 대한 불안과 회의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중공당의 지도부는 중국적 사회주의와 동구나 소련의 그것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고수 결의를 다짐하였다.
이를테면, 동구사태 직후 강택민 신임 총서기는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포기를 결코 예상할 수 없다고 역설하면서, 그 이유로서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국은 동구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즉, 중국공산당은 오랜 혁명과정에서 인민대중과 혈육의 관계를 형성,유지해 왔으며, 중국의 군대는 시종일관 당의 절대적 지도하에 있었고, 동구에서와는 달리 중국에서 사회주의정권은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적 산물이며, 문화전통과 역사, 그리고 지리적인 조건등도 동구와 다르기 때문에 중국에서 동구식의 변혁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소련의 쿠테타가 실패한 직후 중공당 정치국회의는 이른바 서구의 화평연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5개의 견지, 5개의 반대’정책을 관철할 것을 결정하였다. 즉, 공산당의 영도을 견지하고 다당제를 반대하며, 군에 대한 당의 절대 영도를 견지하고, 군의 정치참여를 반대하며, 무산계급 독재를 견지하고 의회주의를 반대하며, 사회주의노선을 견지하고 사회민주주의를 반대하며, 공유제를 기초로 하는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사유제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보수적 지도부는 사회주의권의 대변혁에서 파생되는 사상적 혼란과 동요를 경계하면서 중국적 사회주의를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택동시대에 전개되었던 뇌봉(雷鋒)운동과 같은 사상학습운동을 부활시켜 사회주의 이념과 가치에 대한 선전, 교육활동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셋째, 천안문사건이후 중국의 지도부는 1988년에 결정된 이른바 ‘치리정돈’의 정책노선에 따라서 경제환경의 안정과 경제질서의 정돈을 추진하였다. 특히 경제 성장보다 경제 안정에 역점을 두면서 경기과열에서 빚어진 통화팽창과 인플레이션의 억제, 개혁과 개방과정에서 이완된 중앙의 거시적 경제 통제력의 재강화, 그리고 자원 분배상의 혼란의 극복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또한 대외무역에서도 수출의 장려와 수입의 억제등을 통하여 무역수지를 개선하려는 정책을 추구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은 지난 10여년동안 경제체제 개혁의 부작용으로 나타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안정과 긴축재정정책을 실시하고,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면서도 제한된 범위에서 경제개혁과 개방의 심화를 실천하였다. 즉, 일부 상품에 대하여 가격조정과 가격 자유화를 단행하여 가격메카니즘의 적용범위를 점차로 확대하는 가격개혁을 계속 추진하였고, 금융시장과 노동시장을 부분적으로 허용하여 시장경제의 영역을 더욱 넓히는가 하면, 조자양이 제기했던 연해지역의 경제발전전략을 다시 강조하면서 외국자본의 투자환경 개선을 위한 제도 개선도 실천하였다. 이를테면, ‘외자기업에 의한 토지 종합 개발 경영’에 관한 잠정규정등을 제정하였고, 사회주의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증권거래소를 상해와 심천에 개설하였으며, 상해의 포동지구와 해남성의 양포 개발구등을 건설하여 외향형 경제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의욕을 과시하였다.
끝으로 천안문사건이후 중국의 ‘인권과 민주화’문제를 제기하면서 경제제재를 위협하고 있는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압력에 대하여 중국은 ‘반(反)화평연변, 반(反)패권주의, 내정불간섭원칙’등을 강조하면서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천안문 사건이후 훼손된 중국의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고, 중국의 국제적 입지를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중국은 이념적으로 불편한 존재이었던 고르바초프의 소련이나 엘친의 러시아 공화국과의 관계개선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베트남과 몽골등과의 국교정상화를 실현하였으며,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시아등 아세안국가들을 비롯하여 인접 아시아국가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Ⅳ. 생존과 안정을 위한 전략의 성과와 문제점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천안문사건이후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는 중국적 사회주의의 생존과 안정을 위한 다각적인 정책과 전략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생존과 안정전략은 어느 정도 적중한 것처럼 보인다. 1989년 이후 소련과 동구에서 사회주의체제가 몰락하는 대변혁이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은 천안문사건의 충격을 비교적 짧은 시간안에 수습하고, 표면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단 중국적 사회주의의 생존능력을 입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중국이 서방세계가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천안문사건의 후유증에서 벗어 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공산당과 당국가체제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아직도 강고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변혁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너무나 취약하였고, 민주화운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수준이 아직도 낮았기 때문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중국사회에서 사회주의 이념과 제도에 대한 지지기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광대한 내륙지방의 농민들과 지방간부들이 민주화운동과 대담한 체제개혁과 개방정책에 대하여 냉담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은 기존의 사회주의체제를 수호하려는 보수, 강경노선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를 표시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의 정통성과 대중적 지지가 과거와 비교하면 상당한 정도로 훼손되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중국의 지도자들도 인정하고 우려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사회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신심의 위기는 심각한 정도로까지 심화, 확산되고 있다. 특히 개혁과 개방으로 실리주의적 사고와 황금만능사조가 팽배하면서 일반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당원들로부터도 더 이상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과 이상주의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사상, 정치교육을 강조하고, 당조직의 재건과 당의 지도적 역할을 강화하려고 할지라도 이미 훼손된 사회주의체제의 도덕적, 정치적 정통성을 회복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과제가 되었다. 그것은 천안문 사건이후 당의 이념적 단결과 조직적 통일성을 복원하려는 정책이 별다른 효과를 산출하지 못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고 하겠다.
더구나 지난 10여간의 개혁, 개방정책이 진행되면서 기존의 당국가체제의 통제력의 범위는 점차로 약화, 위축되어가고 있으며, 반대로 비사회주의적 영역의 범위는 확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경제구조와 경제질서에서 국가계획과 통제의 범위가 축소되고, 시장메카니즘의 적용 범위가 확대되고 있으며, 사영기업과 외자기업등 비사회주의적 경제단위들의 비중이 증가되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에서도 당과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자율적인 시민사회가 존재, 성장할 수 있다는 주장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당국가체제의 통제력과 정통성이 과거와 비교하면 상당한 정도로 약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사회주의체제를 대치할 수 있는 정치적 반대세력이 등장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조건이 성숙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중국적 사회주의는 역설적이게도 반대세력의 취약성 때문에 상당기간 생존할 수 있다는 판단도 가능한 것이다.
물론, 중국적 사회주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대안적 세력의 부재라는 소극적인 이유로만 설명될 수는 없다. 오히려 등소평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경제발전을 통하여 ‘중국적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다시 증명함으로써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천안문사건 이후 중국이 빠른 시간안에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치리정돈’ 정책의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천안문사건 직후 ‘치리정돈’을 표방하면서 안정속의 성장을 모색하는 경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 첫째, 인프레의 억제에 성공하였다. 지난 88년 연평균 18.5%, 89년에 17.8%이었던 물가상승율은 90년에 2.1%, 91년에는 도매물가 상승률 2.9%로 억제되어, 인플레이션으로 초래된 국민경제의 혼란은 일단 극복되었다.
둘째, 경제성장을 회복하였다. 인플레를 억제하기 위한 긴축재정정책과 불필요한 투자억제정책으로 말미암아 침체국면으로 돌아섰던 중국경제는 1990년 말부터 금융정책의 완화와 부분적인 경제개혁 조치에 힘입어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특히, 개체, 사영, 향진기업등 민간기업부문에서 부터 회복국면이 시작되어 91년도에는 국영기업의 생산도 향상됨으로써 경제가 다시 활성화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대외무역과 외국기업의 중국투자가 증가되었고 무역수지가 개선되었다. 특히, 광동성이나 심천과같은 경제특구의 외향적 경제가 확대, 발전하면서 중국경제의 대외개방도와 대외 의존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넷째, 이같은 경제성장에 힘입어 도시와 농촌지역의 주민들의 소득이 향상되었다. 1991년 전반부에 도시주민의 소득은 11.6%, 농촌주민의 소득은 10.7%가 향상되었다.
이처럼 천안문사건에도 불구하고 짧은기간안에 중국경제가 안정을 회복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기록함으로써 당국가체제에 대한 정치적인 불만과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팽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적 사회주의가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까가 실패하고 소련의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된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국민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중국의 경우 개혁과 개방정책을 통하여 국민들의 실질적인 생활개선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체제가 생존, 발전할 수 있다는 중국지도부의 주장이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Ⅴ. 다시 재연되는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
이와같이 89년의 천안문사건,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그리고 소련방의 해체라는 혁명적이고 세기적인 변화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정치적, 사회적 안정과 경제성장을 이룩함으로써 중국적 사회주의의 생존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중의 하나는 중국의 지도부가 천안문사건에도 불구하고 단결과 합의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천안문사건를 계기로 조자양을 비롯하여 일부 개혁파 지도자들이 제거되고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가진 원로지도자 집단이 주도하게 되었지만, 보수파와 개혁파의 균형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천안문사건이후 강택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개혁파와 보수파의 균형을 유지하고 당 지도부의 분열을 극소화하려는 등소평 특유의 균형감각이 반영됨으로써, 중국공산당은 내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고 균형있는 리더십을 견지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천안문의 민주화운동을 중국적 사회주의의 존립을 위협하는 도전으로 인식한 등소평은 자신이 선택한 후계자인 조자양을 제거하면서까지 보수파의 주장을 수용, 강경보수노선을 지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등소평은 천안문사건이후 강택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당지도부를 구성함으로써 개혁파의 숙청을 극소화하고, 보수파의 지나친 득세를 억제하였다. 이러한 등소평의 조정에 힘입어 조자양에 대한 당의 평가가 계속 지연되었고, 천안문사건 직후에 예상되었던 조자양의 추종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당내의 숙청작업도 유명무실하게 끝났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조자양과 더불어 숙청되었던 전 정치국원인 호계립(胡啓立)등이 복권되고, 개혁적인 정책노선을 지지하는 주용기(朱鎔基) 상해시장등이 부총리로 임명되는 인사개편이 단행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등소평의 개입을 통해서 중국의 지도부는 천안문 사건이후에도 보수파와 개혁파의 균형과 합의를 유지하였고, 정책적인 차원에서도 안정과 단결을 강조하는 보수파의 논리와 개혁과 개방의 확대, 심화를 주장하는 개혁파의 논리가 동시에 관철됨으로써 중국적 사회주의가 안정속의 성장이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같은 당지도부내의 합의와 균형이 깨어지고, 또다시 보수파와 개혁파의 치열한 정책논쟁과 권력투쟁이 재연되는 조짐이 나타났다. 중공당 14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그동안 자제되었던 보수파와 개혁파의 정책논쟁과 권력투쟁이 그것이다. 등소평이 제기했다는 소위 ‘北伐’발언, 즉 개혁, 개방의 심화, 확대를 지지하는 상해와 남부중국의 세력으로 북경의 보수주의를 일소해야 한다는 발언을 계기로 보수파에 대한 개혁파의 공세가 다시 강화되고 있다. 특히 1992년초 등소평이 심천과 광동성을 순회하면서 ‘경제발전 우선, 개혁 개방의 가속화, 그리고 개혁과 개방에 반대하는 좌파에 대한 경고’를 강조했다는 ‘남순강화(南巡講話)’가 발표되고, 그것이 정치국회의에서 당중앙문건으로 채택됨으로써, 보수파에 대한 개혁파의 정치적 공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이와같은 개혁파의 공세에 대항하여 보수파의 반격도 만만치 안았다. 이를테면 1991년 8월 소련의 쿠테타 실패 직후 보수파의 거두 진운은 체제수호를 위한 이념공작을 담당할 공작소조를 당내에 설치하고 이른바 ‘신4화 문제’에 대한 반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부르조아계급의 자유화와 경제 시장화, 정치적 다원화와 군대의 자유화를 요구하는 국내외의 정치세력에 대항하여 철의 이념장벽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파는 당의 지도권이 ‘진정한 맑스주의자’에 의하여 장악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개혁과 개방에 대한 실무적인 역량(才)보다는 이념적 순수성과 당에 대한 충성심(德)을 기준으로 후계세력을 선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경제발전의 우선, 개혁,개방의 가속화를 주장하는 개혁파와, 체제와 이념의 수호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보수파의 논쟁과 갈등이 재연되고 있는 이유는 14차 당대회에서 중국의 장래를 설계할 새로운 당노선이 결정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지도자들은 중국이 이제 천안문사건과 동구및 소련의 사회주의 몰락이란 대변혁으로 조성되었던 체제적 위기상황에서 벗어 났을 뿐만 아니라, 치리정돈과 같은 조정국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제 2의 도약을 모색하는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 돌입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당의 총노선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를 모두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억제되었던 정책논쟁이 재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등소평과 진운등 당의 원로지도자들이 사망한 이후 중국적 사회주의의 장래를 담당할 후계 지도부를 형성하게 될 14차 당대회가 목전에 있었기 때문에 보수파와 개혁파의 정책논쟁과 권력투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사실, 중국공산당은 모택동이 사망한 이후 최근까지 등소평(1902년생), 진운(1905년생), 이선념(李先念, 1909년생), 양상곤(楊尙昆, 1907년생), 왕진(王震, 1908년생), 팽진(彭眞, 1902년생), 박일파(薄一波, 1908년생), 그리고 만리(萬里, 1916년생)등 30여명의 원로 지도자그릅에 의하여 지배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천안문사건이후 이들 원로지도자들은 비록 일선에서 은퇴하였지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체제수호에 앞장 서 왔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모두 80세이상의 고령이 되었고, 14차 당대회를 전후로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신체적으로 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최고 지도부의 세대교체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보수파와 개혁파가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치열한 권력투쟁을 전개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Ⅵ. 중국적 사회주의는 어디로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중국적 사회주의는 천안문사건 직후 서방세계가 예측했던 것 보다 더 끈질긴 생존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중국적 사회주의의 생존능력은 한편으로 대안적 세력의 부재, 또는 취약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체제수호를 위한 당 지도부의 단결과 합의를 바탕으로 경제개혁과 개방을 꾸준히 추진하여 경제발전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조건, 즉 대안적 정치세력의 취약성이 계속되고, 체제수호 세력 내부의 단결과 합의가 유지되며, 그리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으로 국민생활의 개선이 이루어 진다면, 중국적 사회주의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생존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보수파와 개혁파의 권력투쟁이 격화되고, 중국경제가 심각한 경기후퇴나 침체국면을 맞이하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은 혼란에 빠져 들어 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특히, 등소평과 같은 조정자, 또는 균형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실력자가 없는 상황에서 보수파와 개혁파의 대립이 계속되는 경우에는 권력투쟁의 심화와 더불어 군부정권의 등장이나 또는 군벌적 지방세력의 활거와 같은 일대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개혁과 개방이 진행되면서 중앙정부의 통제 범위가 점차로 축소, 이완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분권화,자율화, 지방화의 경향은 앞으로도 계속,확대될 전망이다. 따라서 중앙에서의 정치적 대립과 혼란이 지속된다면, 지방적 단위에서 “독립왕국”이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중앙의 안정과 단결을 통하여 그와같은 지방적 할거와 혼란의 위기는 회피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중국의 사회주의체제는 과거와 같이 강력한 당국가에의한 일원적이고 수직적인 지배체제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개혁과 개방이 확대 심화되면서, 중국 사회에 대한 당국가의 일방적인 지배시대에서 중국사회의 다양한 이익집단들의 압력이 당국가체제의 변화를 촉진하는 시대에로의 이행이 가속화 될 것은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중국적 사회주의는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사회세력들의 이익과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당국가체제에 대한 암묵적 동의을 받아내는 일종의 정치적 타협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당국가체제는 점점 더 개발도상국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개발독재형의 권위주의체제와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예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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