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삼국시대

지식창고지기 2009. 7. 2. 12:56

삼국시대
三國時代


후한은 황건적의 봉기 이후 그 통치기반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하였는데, 영제(靈帝)

죽고, 서기189년 14살의 변(辯)이 즉위하자, 전례에 따라 어머니안 하태후(何太后)가

섭정을 하게 되었고, 당연히 그녀의 오빠인 대장군 하진(何進)이 정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하진이 정권을 쥐자, 곧바로 환관 건석(蹇碩)을 죽여버렸다.

건석은 영제가 죽기전 영제에게 하진을 죽이라고 했던 인물이었기에 하진은 그에게

앙금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때마침 하북의 명문출신인 원소(袁紹)가 하진에게 환관을 모두 주살해야 한다고 제안하자

하진은 그 일을 하태후와 의논하였는데, 하태후는 여러 이유로 환관제거계획을 반대하였다.

이 계획이 지연될 즈음, 원소는 사방에서 장수들을 모으고 있었다.

또한 태후가 환관 숙청에 동의하도록 위협키 위해 각지의 병마를 모으고자 당시 최강이었던

동탁(董卓)을 낙양으로 불러 들였다.

하지만 이같은 일을 환관들이 모르고 있을수는 없었다.

이 일을 들은 환관들은 급히 황궁안에 무사를 매복시킨뒤 하진을 불러들였다.

하진은 태후의 조서라는 환관들의 말에 속아 궁에 들어서자마자 살해되고 말았다.


하진의 피살소식을 들을 원소는 곧장 사촌동생 원술(袁術)과 하진의 부하 오광(吳匡)을

시켜 황궁을 치게 하였고, 이내 원술은 군사를 이끌고 황궁을 들이쳐 성문을 때려 부수고

환관으로 보이는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 수는 대략 2,000명에 달하였다.


한편 그간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동탁은 그 틈에 군대를 이끌고 낙양(洛陽)을

장악해버렸다.

그는 본래 농서지방의 호족출신으로 ‘황건의 난’ 이후 병주목(幷州牧)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하진의 소환에 3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곧장 낙양으로 향했던 것이었다.

낙양을 장악한 동탁은 소제(少帝)를 폐하고 9살의 협(協)을 황제로 세우니, 이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이다.


동탁은 그 뒤 하태후를 독살시키고, 조정내의 반대세력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후 스스로 승상의 자리에 올랐고, 또 상국(相國)이라는 더 높은 지위를 갖게 되므로,

황제를 능가하는 권위를 행사하였다.

그는 황제 앞에서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었으며, 칼을차고 황제의 단에 올라도 되었다.

이런 그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원소와 원술을 제각각 그 영지로 떠났다.

하지만, 전국에 할거하고 있던 군벌세력은 명망높은 원소를 맹주로 하여 동탁을 토벌키위해

연합하였고, 중원에 위치한 낙양으로서는 그 수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음을 느낀 동탁은

헌제를 데리고 낙양을 떠나 함곡관 뒤의 장안(長安)으로 옮겼다.

그때 낙양의 백성을 강제로 끌고 갔으며, 민가와 궁궐들은 모조리 불살랐다.


한편 동탁은 자신을 타도키 위해 봉기한 관동연합군(關東聯合軍)이 제각기 이해타산을

따지며,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보고는 더욱 기고만장하여 스스로 태사(太師)라

칭하고 헌제에게 자신을 ‘상부(尙父)’라 높여부르도록 하였다.

또한 자신의 동생들과 조카들을 모두 교위, 장군에 봉하였고, 백성들에게서 약탈한

금은보화와 양곡을 쌓아두고서는

“이정도의 제물이라면 잘하면 천하의 패자가 될 것이고, 못하여도 고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라 하였다.


그러나 서기 192년 동탁은 사도 왕윤(王允)과 자신의 부하였던 여포(呂布)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동탁의 시체는 효수되었으며, 그 배꼽에 커다란 심지를 꽂고 불을 당기자 기름이 지글지글 끓으며, 불이 며칠동안이나 타올랐다.

동탁이 죽자 그의 부장이었던 이각(李?)과 곽사(郭?)는 동탁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병력을 이끌어 장안을 공격하여 왕윤과 군사 1만여명을 죽였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도 그리 길지 않아 정권다툼으로 이어졌고, 장안은 다시금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졌다.


196년 헌제(獻帝)는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으나, 궁전은 모두 불에타 폐허였으며, 환관이 살던 초라한 집에 몸을 의탁해야만 했다.

황제가 이런 고초를 겪을 무렵, 조조(曹操)가 군사를 이끌고와 헌제를 허창(許昌)으로 모셨다.

그리되자 본래 갖추어 놓은 세력기반위에 황제를 등에 엎자 조조는 금세 전국군웅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고,

이는 곧 황하의 중하류 지역의 군벌과 호족을 복종시켜 당시 최대의 군벌세력을 이끌고 있던 원소와의 대결로 이어진다.(서기 200년 관도(官渡)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