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대전 赤壁大戰
관도의 대전에서 원소를 물리친 조조(曹操)는 8년 후인 208년 중국 북부를 완전히 통일 하였다.
그리고 남으로 눈을 돌려 형주(荊州)와 강동(江東)을 공략하여 전국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 무렵은 형주(荊州)의 유표가 이미죽고, 그 막내아들 유종(劉琮)이 그 뒤를이었을 때인데, 유종은 조조의 백만대군이 남하한다는 말을 접하기 무섭게 조조에게 사자를 보내어 항복해 버렸다.
그러자 유비의 세력권인 신야(新野)일대는 조조군과 유종의 군사에게 완전히 포위되었으며, 유종의 항복소식을 접했을때에는 이미 조조군이 눈앞에 진을 쳤을 때였다.
유비는 강릉(江陵)으로 급히 퇴각하였다.
강릉은 군사상 요지일 뿐만아니라, 병력과 물자의 보급기지 이기도 하였다.
한편 이 소식을 접한 조조는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유비를 추격하였다.
조조는 주야를 쉬지 않고 달려 장판파(長坂?)에서 유비를 공격하였다.
유비는 대패하여 처자를 버리고 도망치는 곤욕을 치루었다.
유비는 하는 수 없이 하구(夏口)로 말머리를 돌렸다.
하구에는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가 주둔해 있었으며, 그와 병사를 합치자 약 2만의 군사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조조의 백만대군이 남하 한다는 소식을 손권또한 접하였으며, 이에 손권은 시상(柴桑)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주변을 관망하였다.
또한 노숙을 파견하여 조조군의 상태를 점검하고자 하였다.
이에 북으로 올라가던 노숙은 조조군에 쫓기어 남하하던 유비와 마주치게 되고, 유비에게 손권과의 연합을 제안하게 된다.
이에 유비는 제갈량(諸葛亮)을 손권에게 보내어 그 방책을 논의한 후 연합을 확정짓고는 조조와의 결전에 대비하였다.
이에 손권은 주유(周瑜)를 대도독, 정보(程普)를 부도독, 노숙(魯肅)을 찬교교위에 임명하여 3만의 병사를 출전시킴으로써 유비군과 함께 모두 5만여 명의 병사가 반격에 나섰다.
10월 조조군은 장링에서부터 양쯔강 동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적벽에서 손권·유비 연합군에게 저지당하여 북철오림(北撤烏林:지금의 후베이 성 훙후 호[洪湖] 동북쪽)에서 손권· 유비 연합군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한편 강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조조의 병사들은 북방출신으로 남방의 풍토에 적응치 못하고 병과 배멀미로 고통받는 병사가 많았었다.
이에 조조군은 전선(戰船)을 모두 쇠고리에 연결하여 한덩어리로 만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였다.
이 모습을 확인한 주유(周瑜)의 부장 황개(黃蓋)가 화공(火攻)을 제안하였고, 주유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우선 몽충(배의일종)과 투함 10척에 마른섶과 갈대를 가득싣고 기름을 부은후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포장으로 덮고 그 위에 기를 꽂았다.
또한 조조의 전함에 가까이 접근키 위해 거짓으로 황개와 주유의 불화를 만들어내 황개가 항복의 글을 조조에 보내왔고, 황개는 그 항복의 날짜와 시간을 맞추어 전함을 거느리고 조조군으로 향하였다.
조조의 진영 근처에 다다르자 황개는 재빨리 신호를 올려 배에 가득 실은 섶과 갈대에 일제히 불을 지르게 하였고, 때마침 불어온 동남풍의 영향으로 황개의 전함들은 불더미가 되어 곧장 조조군의 전함으로 돌진하였다.
조조군은 이미 쇠고리로 연결되었으므로, 삽시간에 옮겨붙은 불은 전 함대에 퍼져 나갔다.
이때 조조군에서 물에빠져 죽은자와 불에 타 죽은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틈을 노려 주유의 부대가 조조군을 공격했고, 여기서 조조는 겨우 목숨을 보존하여 허창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으로 이 전투로 인하여 유비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의 계책에 따라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차지하여 촉한(蜀漢)을 세웠으며, 손권은 강동(江東)을 굳건히 하고 동남쪽으로는 세력을 확대하여 오(吳)를 세움으로써, 위(魏), 오(吳), 촉(蜀)의 삼국이 팽팽히 정립하는 형세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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