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도官渡의 대전
한편 원소(袁紹)는 조조(曹操)의 세력이 급격히 커지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서기 200년 황하근처의 관도(官渡:하남성 중모현)에서 결전을 벌이니, 이것이 바로 ‘관도(官渡)의 대전’이다.
원소는 보병과 기병 10만의 대부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에 비하면 조조는 2만의 군사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뿐만아니라 원소의 땅은 넓고 기름졌으며, 훈련된 병사와 풍족한 식량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원소가 훨씬 우세해 보였으나, 원소는 교만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도량 또한 부족하였다.
반면, 조조는 병력이 적고, 후방또한 안정적이지 못했으나, 대세를 보는 눈이 정확하고, 사람을 보는 안목과 도량이 넓어 군사들이 최대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끔 해 주었다.
그러나 원소군은 처음 전투에서 원소가 그토록 자랑하던 대장 안량을 잃었고, 2차 전투에서는 명장 문추를 잃었다.
이 두 장수를 벤 사람은 다름아닌 관운장 이었다.
관도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헌제는 유비(劉備)에게 밀서를 보내어 “조조를 없애라”라는 명을 내렸다.
허나 이 밀서는 사전에 누설되어 이에 분개한 조조가 유비 공격에 나섰고, 유비는 패하여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던 장비(張飛)는 산중으로 피신하였고, 관우(關羽)는 조조의 포로가 되어있었는데, 이때 관우의 활약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인해 원소의 군대는 크게 사기가 떨어졌다.
궁지에 몰리게된 원소는 서둘러 조조를 공격하려고만 하였다.
이때 참모인 허유가 계책을 올렸다.
“지금 조조는 전 병력을 관도에 포진시켰으므로, 그의 후방은 텅 비어 있습니다.
병력을 나누어 당장 2백리 밖에 있는 조조군의 본부인 허창(許昌)을 기습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하지만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뒤 6개월이 넘도록 원소와 조조는 대치하였고, 군량이 떨어져 가던 조조는 철수를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참모인 순욱에게 사람을 보내어 의견을 물었는데, “양군이 대치한지 이미 오래되어 먼저 군사를 철수하는 쪽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좀더 굳게 견디고 있으면, 원소군 내부에 변화가 일어나 승기를 잡을 수 있을것입니다.” 라는 글이 왔다.
얼마뒤 원소군의 일등 참모인 허유가 원소로부터 추방되어 조조 진영으로 오자, 조조는 버선발로 허유를 맞아들였다.
이후 허유가 원소의 군량과 물자가 쌓여있던 오소를 기습할 계책을 내놓았으며,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원소의 식량과 물자를 모조리 불태웠다.
이에 크게 당황한 원소군은 순식간에 오합지졸이 되었다.
승기를 잡은 조조군은 총공격을 감행. 원소군의 10만대군은 대패하여 7만이상의 병력이 전사하고 원소는 간신히 목숨만을 건졌으나, 얼마뒤 홧병으로 사망하였다.
이어 원소의 아들들이 조조에 저항하였으나, 그마저 불화로 인하여 조조에 궤멸되었다.
이로써 조조는 중국의 13개 주(州)중 연주, 기주, 청주, 유주, 병주의 다섯주를 차지하며 중국의 거의 절반은 거두어 중원통일의 제 일선에 서게 되었다.
이 무렵 강남에서는 손견(孫堅)과 소패왕(小覇王)으로 불리던 손책(孫策)이 다져놓은 기반위에 손권이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서쪽으로는 형주(荊州)의 유표(劉表)가 경계를 이루어 대치하고 있었다.
한편 ‘삼국지연의’의 한 주인공인 유비(劉備)는 황건적의 난때 관우, 장비와 함께 황건군 토벌에 나섰으나, 겨우 안희현(安喜縣)의 현위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후 그는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하여 한참이 지난후에야 신야(新野)를 얻게 되고,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통하여 제갈공명(諸葛孔明)이라는 인재를 얻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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