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삼국(촉 蜀)/촉한(蜀漢)왕조 계보

지식창고지기 2009. 7. 2. 13:10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후손 현덕(玄德) 유비(劉備)가 촉(蜀:四川省)에다 창건하였다.

정식 명칭은 한(漢). 계한(季漢)이라고도 하며, 촉(蜀)·촉한으로 통칭한다.

후한(後漢) 말 황건적(黃巾賊)의 대반란이 일어나 후한의 권위가 무너지자 군웅할거의 정세는 결정적이 되었다.


형주(荊州) 목사 유표(劉表)의 객장(客將)이던 유비는 유표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종(琮)이 조조(曹操)에게 투항하자, 제갈량(諸葛亮)의 협력을 얻어 천하 '3분의 계(計)'를 세우고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赤壁) 전투에서 조조를 격파하고 형주의 목사가 되었다.

이리하여 양쯔강[揚子江] 중류 유역을 거의 장악하자, 익주(益州:成都) 목사 유장(劉璋)을 공략하여 스스로 익주 목사가 된 뒤 219년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라 칭하였다.


다음해 조비(曹丕)가 한제(漢帝)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자, 221년 유비도 또한 제위에 올라 수도를 청두[成都]로 정하고, 고조(高祖) 이하의 종묘를 세워 한(漢)의 정통성을 명백히 하였다.


다음해 손권도 연호(年號)를 세웠으므로 바야흐로 3국 정립의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를 둘러싼 촉한·오(吳)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유비가 친히 군대 를 이끌고 오를 쳤으나 백제성(白帝城)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후사를 위임받은 제갈량은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잘 보좌하여, 오나라와의 국교를 회복하고 산업을 장려, 민력을 기른 후 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를 토벌하여 이를 개발하는 등 국력을 강화하였다. 


동시에 중원(中原)을 회복하고자 자주 북벌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34년 우장위안[五丈原]에서 대전중 병사하였다. 그후 장완(蔣琬)·비위(費褘)·강유(姜維) 등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해마다 일어난 위(魏)와의 전쟁 때문에 환관 황호(黃晧)의 전횡까지 겹쳐, 국력이 쇠퇴하여 263년 위군의 대공격에 유선이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촉한(蜀漢)왕조 계보

 

소열제(昭烈帝:先主) 유비(劉備) 221~223

후주(後主) 223~263/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