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정권의 몰락과 삼국의 멸망
삼국정립의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고, 삼국의 군웅들은 이제 2세들의 각축전으로 형성되었다.
조조의 사후 그의 아들 조비(曹丕)는 후한의 헌제(獻帝)로부터 제위를 이양받아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후한(後漢)은 전한(前漢)과 합쳐 24대 426년 만에 멸망하였다.
문제(文帝 : 조비)의 아들 명제(明帝 : 조예)때에는 조정이 다시금 극심한 권력 투쟁의 무대로 변하였고, 이때 사마의(司馬懿)가 두각을 나타내었다.
사마의는 촉한(蜀漢)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유비의 죽음 후 두 번에걸친 출사를 수비에 치중하여 지켜냈다.
그는 조정에 촉의 제갈공명의 뛰어남을 알리고, 많은 군대를 파견케 하여 굳건히 지키기만 하였고, 그 군사비로는 조정의 관료들을 매수하여 차츰 자신의 권력을 증대시켜 나갔다.
한편 제갈공명이 죽은 5년후 위(魏) 경제(조예)가 병으로 죽었는데, 그는 죽기에 앞서 사마의를 태부로 삼고 조상(曹爽)을 대장군으로 삼아 아들 조방(曹芳)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조씨와 사마씨간의 권력다툼이 시작되었고, 조상은 사마의에게 군사 지휘권을 빼앗고, 조정에서의 권력을 집중해 나갔다.
이에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다가 조상(曹爽)이 조방(曹芳)을 따라 낙양 남쪽에 있는 고평황릉(高平皇陵)에 갔을때 3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낙양을 제압하고 낙수와 교통의 요충지를 장악한 다음 조상(曹爽)의 죄를 고발하는 조서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조상(曹爽)은 군사 지휘권을 사마의에게 넘겨야 했으며, 그의 가족과 일당은 모두 살해 되었다.
이일을 계기로 위나라의 실권은 사마씨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그 2년후 71세의 일기로 사마의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 형제가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했다.
사마사는 214년 조방(曹芳)을 폐위시키고, 14세의 조모(曹?)로 그 뒤를 잇게했다.
사마사가 죽은후에도 사마소가 승상이 되어 정권을 장악해 정치를 제 멋대로 휘두르고, 마침내 조모를 죽이고, 제위마저 찬탈하려 하였으나, 민심의 반발이 거세자 조조의 손자인 15세의 조환(曹奐)을 세웠다.(서기 260년)
이런 와중에도 사마소(司馬昭)는 등애(鄧艾)와 종회(鍾會)를 장수로 삼아 촉한을 공격케 하였는데, 유비의 뒤를이어 즉위한 유선(劉禪)은 싸워볼 생각도 하지않고는 항복을 결정하였다.
이에 그 아들 유심(劉諶)이 크게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심은 소열황제(유비)의 사당에 나아가 크게 통곡한 뒤 처자와 함께 자결하였다.
서기 263년 유선(劉禪)은 군신을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니, 43년만에 촉한은 멸망하고 말았다.
촉한이 멸망한지 2년후에는 사마소(司馬昭)가 죽고 그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위(魏王) 조환(曹奐)은 사마염에게 제위를 넘기고, 사마염이 즉위하므로 나라이름을 진(晉)이라 일컫고 수도를 낙양(洛陽)으로 삼았다.
이로써 위(魏)나라 도한 46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촉한과 위나라가 멸망하자 남은 것은 강남(江南)의 오(吳)나라 뿐이었다.
손권의 손자인 손호(孫皓)가 그 뒤를 이어 제위를 이었는데, 그는 포악하고 난폭하였으며, 덕있는 정치를 펼치지도 않았다.
마침내 진왕은 오의 토벌을 결정하고는 두예(杜預), 왕준(王濬)으로 하여금 오나라를 공격케 하였다.
얼마 되지않아 오의 수도인 건업(建業)에 왕준의 군사가 상륙하자 더 이상 대항치 못하고 항복하니 4대 52년만에 오나라 마저 멸망당하고 말았다.(서기 280년)
이것으로 삼국시대는 지나고, 또하나의 통일왕조인 진(晉)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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