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현대중국 정치론] 제5부 제3장 등소평시대의 대외정책 : 중ㆍ미관계를 중

지식창고지기 2009. 7. 2. 17:06

[현대중국 정치론]

제5부 제3장 등소평시대의 대외정책 : 중ㆍ미관계를 중심으로

 

 

1) 머리말

 

1997년에 중국은 두 개의 획기적 사건을 중국역사와 중국 인민의 가슴에 남겨 놓았다. 하나는 개혁ㆍ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등소평의 사망이요 다른 하나는 홍콩의 중국 귀속이다. 등소평의 사망은 중국 정정의 불안함을 우려하는 시각과 더불어 향후 중국의 행보가 국제사회에 어떠한 파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등소평은 중국 공산 혁명의 원로로서 중국인민의 물적 생활 수준과 중국의 대내외적 경제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점에서 중국 인민들의 가슴에 오래동안 기억될 지도자일 것이다.

 

한편 1997년 7월 1일 0시를 기점으로 오랫동안 영국의 통치하에 있던 홍콩의 중국 귀속은 대외적으로 중국의 영향력과 역할을 새롭게 가늠해 볼 수 있는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세계사적으로는 적어도 동아시아 지역에서 제국주의 시대의 청산작업이 21세기를 앞둔 상황에서 성황리에 거행되었다는 시각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국으로서는 ‘수모의 세기’(the century of humiliation)를 견뎌내고 다시 ‘대중화’(大中華)를 건설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의 수순일 따름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중국과 홍콩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구실로 중국을 견제하고 싶어하겠지만 이미 중국은 이제 150여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오히려 홍콩 반환을 계기로 구체적으로 가시화될 것이라고 예측되는 ‘화교경제권’의 경제적 통합 효과와 상승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중국 인민해방군의 현대화 계획은 ‘중국 위협론’의 우려를 구체화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비록 냉전체제하에서는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지만 국제질서가 다원화되어가는 탈냉전의 구도 하에서 정치와 경제적 측면에서 무한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의 영향력과 비중이 갈수록 확대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앞장에서도 거론한 바와 같이 중국이 고립주의를 탈피하고 서방세계와 나름의 독자적 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 대 초반이었다. 특히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방문과 상해 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에 미ㆍ중 관계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정치질서의 예고 뿐만 아니라 냉전 체제하에서 새로운 역학구도의 실현이었다. 1979년 미중수교는 70년대 국제 역학의 결과물이었고 양국 관계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양국이 나름의 속셈과 전략을 가지고 화해와 우호를 공식화하였던 것이다. 이른 바 ‘전략적 삼각관계’가 구체화되면서 국제정치 구조는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띄기 시작한 것이다. 1989년 중국 천안문 사건과 동구 사회주의와 소련의 붕괴로 이어지는 일련의 세기적 사건은 양국 관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었다. 더욱 더 복잡한 국제정치적 지형 속에서 각국은 전략적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고자 때로는 협력을 때로는 갈등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앞 장에서 중소분쟁을 통하여 모택동 시대의 외교정책의 큰 줄기를 일별하였다. 여기서는 앞 장의 연속선 상에서 1972년 이후의 미중 관계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등소평체제하에서의 미중관계의 발전과 변화를 협력과 갈등이라는 맥락에서 중점적으로 점검해 보고자 한다. 냉전과 탈냉전을 통하여 여전히 국제정치에서 패권 국가의 위상을 보전하고 있는 미국과 개혁 개방을 통하여 새롭게 미래에 대한 웅비를 준비하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중국 외교정책의 새로운 면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시사를 줄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에 포진하고 있는 한반도의 정세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2) 미ㆍ중 국교정상화의 역학(1972-1978)

 

1972년의 미ㆍ중 관계의 변화는 2차 대전 이후 지속되었던 동북아시아에서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냉전 체제의 논리인 양대진영론의 와해를 뜻하는 것이며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추구해 왔던 대중국봉쇄 포기를 선언한 것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극적인 변화는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양극체제에 대한 도전이 있어 왔다. 더구나 중ㆍ소 분쟁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정책 변화는 동북아시아에서 냉전체제의 근본적인 개편을 불가피하게 했다고 하겠다. 사실 미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을 고립시키는 것은 이미 비현실적인 정책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서방국가와 제3세계의 국가들이 중국을 유일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무리한 미국의 대중국 봉쇄정책은 오히려 미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대두되었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키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을 재조정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현실화하고 중ㆍ소분쟁을 이용하여 새로운 새력균형을 모색해야 한다는 전략적인 고려가 강조되었다고 하겠다.

 

이와같은 미국의 대중국 정책의 변화는 중국의 국내외정책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함으로써 그야말로 극적인 미ㆍ중관계의 개선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이미 1960년대 초에 중ㆍ소 분쟁이 표면화되면서 중국은 안보의식의 변화와 대외관계에 대한 재검토가 있었다. 예를 들어 1964년 1월 24일자 인민일보의 사설은 모택동의 ‘중간지대론’를 발표함으로써 종래의 양대진영론에서 일탈하여 제3세계에 대한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할 뜻을 분명히 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에는 이와 같은 중간지대론에 입각하여 ‘미국의 제국주의’와 ‘소련의 사회제국주의’를 동시에 반대해야 한다는 조반외교가 강조되었지만 중ㆍ소 분쟁이 격화되면서 점차로 미국보다는 ‘소련의 사회제국주의’에 대한 위협을 강조하였다.

 

특히 1968년의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1969년의 진보도 사건을 계기로 소련으로부터 직접적인 안보위협을 받게되자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1969년에 개최된 제9차 전당대회를 계기로 문화혁명으로 파생된 국내적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주은래를 중심으로 하는 실용주의파의 세력이 부각되면서 친미ㆍ반소적인 성향이 더욱 강조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임표가 제거되고 문화혁명 좌파의 세력이 약화된 1970년 초에 중국의 지도층은 대미관계의 혁명적인 변화를 추진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이와같이 1970년대 초에 동북아시아의 정세변화에서 미국과 중국은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해야 한다는 공동의 이익을 찾게 됨으로써 양국관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72년 이후 미중관계는 초기에 예상했던 것 만큼 그렇게 급속도로 진전되지 못하였다. 사실 미중관계는 등소평 체제가 등장한 1978년까지는 1972년의 상해공동성명에서 예고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미중관계가 답보상태에 머물게 된 것은 미국과 중국의 세계 질서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는데다가 양국의 복잡한 국내 정치사정 때문이라고 하겠다.

 

미국은 비록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소련의 세력 팽창을 저지한다는데에 전략적 목표가 있었지만 또 한편 소련과의 데탕트도 중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만을 포기하면서까지 체제와 이념이 상반되는 중국과 지나치게 밀착하는 것을 견제하는 미국 의회의 압력도 작용하여 닉슨 대통령은 중국 방문 직후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등거리 외교를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미국의 등거리 외교와 대만 문제에 대한 미온적 태도는 세계적인 반패권 연합전선을 추구하는 중국에게는 실망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더욱이 중국의 지도층 내부에서 친미ㆍ반소 노선에 대한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중관계의 획기적 발전을 추진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주은래 등소평 등은 반소통일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중국외교의 기본 목표라고 인식하고 미국과 일본 그리고 서방세계와의 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의 세력은 점차로 쇠퇴하는 반면에 소련의 패권주의 세력은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미국과 서방세계와의 관계개선을 통하여 소련을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의 실용주의파에 의하면 친미ㆍ친서방 정책은 안보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의 오랜 꿈이었던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좌파의 폐쇄주의를 공격하였다. 따라서 등소평은 모택동이 사망하기 이전인 1975년에 이미 친서방세계에 대한 개방적인 정책을 강조하였다. 등소평에 의하면 중국과 같이 경제적으로 낙후한 국가가 경제발전을 달성하려면 선진산업국가로부터 발달된 과학기술과 자본을 도입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모택동의 자력갱생론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좌파의 폐쇄주의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좌파의 견해는 모택동의 ‘천하대란’과 ‘세계3분론’에 입각하여 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제3세계의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등소평의 서방 세계에 대한 개방정책은 모택동의 자력갱생론을 포기하고 중국을 서방세계에 예속시키는 ‘양노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맹렬히 공격했다.

 

이와 같이 중국지도층 내부에서의 노선투쟁과 미국의 등거리 외교 정책의 결과로 미중관계는 1972년 이후 더 이상 확대 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1976년에 모택동이 사망하고 곧 이어 문화혁명 좌파가 실각되면서 중국 내부의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하였고, 미중관계는 새로운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실용주의파의 노선이 승리한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1기 3중 전회를 전후로 하여 중국은 그야말로 역사적 정책의 전환을 선언하였다.

 

즉 등소평의 실용주의 정권은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를 중국이 추구해야 할 최고, 최대의 과제라고 선언하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사상해방과 체제개혁, 그리고 문호개방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생산력을 향상시켜 중국을 선진산업국가의 대열에까지 끌어올린다는 4개현대화를 달성하려면 미국과 일본, 그리고 서국 제국으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대미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친미 친서방 정책 노선은 1972년 이후 실용주의파가 추구했던 정책노선이었으며 1977년 11월 1일자 인민일보에 발표된 장문의 세계3분론에서 그 이론적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좌파는 모택동의 세계3분론을 반미ㆍ반소 정책을 합리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았는데 반하여 실용주의파는 1977년의 인민일보에 발표된 세계3분론에서 반소노선을 보다 분명하게 밝혔다는 것이다. 즉 미국과 소련과 같은 두 초강대국이 제1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좌파의 세계3분론과 같으나 실용주의파는 소련의 패권주의의 위협을 더욱 강조하였고 소련의 패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서구 제국으로 형성된 제2세계와의 유대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친서방 정책을 명백히 했다.

 

이와 같은 친서방정책에로의 전환은 중국의 대만정책의 변화에서도 나타났다. 1976년에 중공당 대외연락부장이었던 경표(耿飇)는 ‘대만해방’은 중국공산당이 추구해 온 불변의 목표이지만 그것은 국내외의 여건이 성숙되어야 실현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현재 중국의 입장에서는 소련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하여 미국과 협력을 모색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 외상이었던 황화(黃華)도 미국이 대만과의 상호방위조약을 철폐하고 미군을 철수하더라도 중국은 대만을 무력에 의하여 해방시키려고 하지 않겠다고 공언을 하기까지 하였다.

 

중국의 실용주의 정권이 안보적ㆍ경제적 차원에서 미국과 서방제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때와 거의 동시에 미국의 대소인식에도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즉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1977년까지만 해도 소련과 중국에 대해 등거리 외교정책을 견지하겠다고 공언을 했었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하자 소련과의 데탕트에 대하여 근본적인 재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아시아지역에서 소련의 군사적 정치적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급진전시킬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따라서 1978년 5월에는 브레진스키 안보담당특별보좌관을 북경에 파견하여 그 동안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미ㆍ중관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였다. 브레진스키 보좌관은 미국과 중국사이에는 장기적인 전략적 공동이익이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미중관계가 단순한 경제교류와 문화교류의 차원을 벗어나 군사적ㆍ안보적 준동맹관계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1979년 1월에 미국과 중국의 국교정상화에 즈음하여 발표된 공동성명에서도 미국과 중국은 다같이 반패권주의를 추구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3) 미ㆍ중 관계의 발전(1979-1989)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정상화에 합의한 1979년부터 천안문 사건과 동구와 소련 사회주의의 몰락이 시작되는 1980년 말까지 10년 동안은 미국과 중국아 모두 대소련 견제라는 전략적 구도 내에서 갈등을 최소화하고 협력을 최대화하고자 노력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은 여전히 체제와 이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요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영역에서 뿐만아니라 군사안보적인 차원에서도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미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한 1979년과 1980년에는 양국의 주요 지도자들의 상호방문이 빈번히 있었다. 1980년 1월에는 미국의 국방장관인 브라운이 국방장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군사적ㆍ안보적 협력관계를 협의함으로써 소련의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982년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중국과 소련간의 긴장완화를 위한 외교적 협상을 제의하였고 이를 계기로 중․소관계가 개선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을 ‘포위․압박’하는 소련의 군사 안보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고 인식한 중국 지도부는 미국과의 군사안보적 관계의 증진에 더욱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런 중국지도층의 소련의 군사안보정책에 대한 불신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중국내 대부분의 지역이 극동 지역에 배치한 소련의 SS-20 핵 미사일의 사정권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중국은 소련이 캄란만에 배치한 TU-16 폭격기를 중국의 해운업, 중국의 남지나해에서의 지위, 남지나해의 중국 군사시설 등에 대한 명백한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소련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개입은 여전히 단계적으로 강화되고 있었다. 사실 중국은 1978년 11월에 조인된 소련과 베트남의 준방위협정에서 정점에 이른 베트남의 친소정책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북으로부터는 소련의 위협과 남으로부터는 베트남의 위협으로 중국이 ‘아시아의 쿠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그것이었다.

 

중국의 소련에 대한 이러한 위협의식은 미국의 소련 팽창주의 봉쇄라는 대아시아 전략과 맞아 떨어졌고 이로부터 중국과 미국 간의 안보관계는 강화 되었다. 1980년대 미국과 중국간의 안보관계는 고위급 군장교들과 고위급 민간 관료 간의 협상 진행, 소련의 군사력에 대한 정보의 지속적 교환과 공유, 실무적 차원의 교류, 미국의 중국에 대한 무기 판매 등 4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위와 같은 안보적 고려 속에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대만 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접근을 하게 되었다. 중국은 대대만 정책에서 기존의 강경정책에서 벗어나 좀 더 유화적인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화 정책은 대만과의 비공식적 경제ㆍ문화 교류의 확대를 통한 긴장완화 정책의 추진을 기본으로 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중국과 대만 간의 경제적 교류는 급속히 증가하였고 이로 인한 중국과 대만 간의 긴장완화는 미국과 중국 간의 우호적 관계의 증진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중밀월 관계에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9년 국교 정상화 직후에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대만관계법’과 1980년의 미국대통령 선거 당시 ‘두 개의 중국론’을 인정하는 듯한 레이건의 발언, 그리고 1981년 레이건 행정부에 의하여 결정된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 정책 등은 중국을 자극하였다. 물론 대만 문제 이외에도 중국은 고도의 과학 기술 이전에 미온적인 미국의 태도와 중국의 대미 섬유수출을 제한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미국과의 국교 수립 직후 미국과 서방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통한 현대화의 추구를 외교 정책의 기조로 삼았지만 등소평은 모택동과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패권주의에 대한 반대를 중국이 추구해야 할 주요한 목표로서 제시해 왔다. 1980년 1월 등소평은 당중앙확대회의에서 ‘목전의 형세와 임무’(目前的形勢和任務)라는 연설을 통하여 중국이 실현해야 할 국가 목표로서 (1)반패권주의에 의한 세계평화의 유지 (2)대만에 대한 주권 회복 (3)경제발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980년까지만 해도 등소평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4개 현대화가 핵심이며 대만 문제는 장기적, 평화적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대만 문제에 대한 유연성 있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가 결정된 이후 중국은 대미 관계에서 보다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2년 8월 미국과 중국은 미국의 대만에 대한 무기판매와 미국의 대만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여 제2의 상해코뮤니케를 발표하였다. 즉 미국은 ‘하나의 중국 정책’을 인정하고 장기적으로 대만에 무기를 판매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단기간의 미중관계의 밀월이 양국의 국내외관계에 의하여 깨져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중국과 미국의 숨고르기였다.

 

그러나 이런 국제적 상황 속에서 중국의 친미 친서방 일변도의 외교정책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중국의 대외정책의 변화는 1982년 9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2전대회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되었다. 즉, 호요방은 제11기 중앙위원회 보고에서 중국은 “건국 이래 33년 동안 어떠한 강대국이나 혹은 국가 집단에도 의존하지 않았으며 강대국의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다고”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외교정책의 기본노선은 “주권과 영토보전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상호내정불간섭, 호헤평등, 평화공존”의 5개 원칙에 입각하여 ‘자주독립의 외교’를 견지해 나가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호요방과 중국 지도부는 오늘날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주요한 세력은 “패권주의를 추구하고 있는 초강대국들”이라고 규정하고 중국은 제3세계의 일원으로서 “제국주의, 패권주의, 식민주의에 반대하여 단호히 투쟁하는 것을 신성한 국제적 의무”로 간주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호요방과 중국 지도부는 대미관계에 대해서도 “중미 양국은 1979년의 국교 수립 이후 양국 인민의 이익에 부합된 관계를 발전시켜 왔으며” 중국은 “이러한 관계를 일관되게 발전시켜 나가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러기 위해서는 대만 문제에 대한 미국의 성의있는 정책이 요구된다고 지적하였다. 즉 미국은 1982년 8월에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약속한 대로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 문제를 최종적이고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주권과 영토 보존의 상호존중, 상호내정 불간섭이라는 원칙을 실제로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이 등소평 초기의 미국과 대서방 일변도의 ‘현대화 외교노선’에서‘독립 자주의 외교노선’으로 전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외교정책의 전환은 대만 문제와 교역 조건에 대한 미국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나친 친미, 친서방 정책에 대한 국내 반발 세력을 무마하기 위한 방편으로 ‘독립 자주의 외교노선’을 강조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특히 등소평 체제의 경제발전 제일주의에 대한 저항은 중국 지도층 내부에서 계속되었다. 서방세계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의 부작용이 노출되면서 ‘정신적 오염’과 중국의 대외의존도가 증가되는 현상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중국 지도부는 이러한 개혁ㆍ개방에 대한 수위 조절과정에서 ‘물질문명의 건설’과 동시에 ‘사회주의 정신문명의 건설’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대외정책의 독립 자주 외교 노선으로의 전환이 모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친미 친서방 정책을 통한 ‘현대화 외교노선’이 ‘독립 자주의 외교노선’으로 전환되었다고 해서 중국이 현대화를 위한 외교를 포기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등소평 체제하의 중국의 지도부는 4개 현대화의 실현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으며 4개 현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서방, 특히 미국의 자본, 기술, 설비의 도입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지도부가 미국의 대만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미중관계의 기본성격을 손상하지 않게 하려고 자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대만 정책에 대한 억제된 불만 토로 등에서 나타난 중국의 태도는 경제적 현대화를 위해서 미국과의 경제기술 교류를 계속 유지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1980년대 미국과 중국의 무역관계는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80년대 미중 무역 현황>

(단위:억$)

년도

중국의 수출

중국의 수입

무역 총계

증가율(%)

1980

12

38

50

108

1981

21

36

57

14

1982

25

29

54

-6

1983

25

22

47

-15

1984

34

30

64

36

1985

42

39

81

27

1986

52

31

83

3

1987

69

35

104

25

1988

93

50

143

38

1989

129

58

187

15

출처 : IMF, Direction of Trade Statistics Yearbook (Washington D.C.), 각 연도 발행.

 

결국 1980년대 ‘독립 자주의 외교노선’으로 공식화된 중국 외교정책의 기본적인 목표는 여전히 경제적 근대화의 추진을 위해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국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목표의 추진 과정에서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는 안보전략적 차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 투자와 기술 도입 등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1980년대에 미국과 중국은 안보적인 공동이익을 바탕으로 상호갈등요인을 억제하고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미국은 소련에대한 견제카드로서 중국을 이용하기위해 대만문제, 인권문제, 통상문제에서의 갈등을 최소화 하였고, 마찬가지로 중국은 경제발전고 4개현대화를 추진하기위해 미국과의 경제협력관계를 대폭 확대하였다.

 

따라서 위의 표에서 알수 있는 것처럼 양국 경제교류는 1982년 미국의 일방적인 중국섬유의 대미 수출규제와 이로인한 중국의 대미 곡물수입감소로 인하여 일시적인 퇴조현상을 보였으나, 그 이후 다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4) 탈냉전 시기 미ㆍ중 관계의 변화(1990- )

 

(1) 외교‧군사적 관계

 

냉전 시기를 통하여 중국 지도자들은 세계적 패권을 놓고 초강대국들 간에 경합하는 국제체제의 맥락 속에서 미국을 바라보았다. 비록 미·소 초강대국들 보다 약한 것은 분명하였지만 중국은 미국과 소련의 희망과 공포를 교묘하게 이용함으로써 구체적인 가용 권력의 한계를 넘어서 국제정치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는데 능숙하게 처신하였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과 소연방의 붕괴는 이러한 중국의 외교적 잇점을 빼앗아 같다.

 

미·중 수교 이후 1989년의 천안문 사건과 동구권이 몰락하기 이전 시기의 양국의 관계는 미국의 소련 견제라는 중국 카드와 중국의 개혁ㆍ개방 정책으로 인한 대외적 경제 협력의 필요성이라는 유인책의 틀 속에서 전략적 삼각구도(strategic triangle)를 형성한 시기였다. 양국의 관계는 대만에 대한 미국의 무기 수출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 국면에 직면하기도 하였지만 전략적 측면과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무리없는 유대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1989년의 천안문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 대한 미국과 서방세계의 ‘환상’이 깨어지고 민주화운동을 유현진압한 중국에 대한 비난여론이 비등해 지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대중국 제제문제가 논의되면서 미‧중 관계는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도 대중국 제재를 놓고 여론이 갈리고 있었다. 부시 행정부는 의회와 국내 여론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 의회와 여론은 중국의 인권상황개선을 조건으로 하여 중국에 대한 무역최혜국 대우 갱신 문제를 다룰 것을 요구하였으나 부시 행정부는 이른바 건설적 개입(constructive engagement) 정책을 통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 정책의 핵심은 중국에서 미국의 이익과 관심을 성취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외교적 도구를 이용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중국과 중요한 사업적 유대를 보호 육성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최혜국 대우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으로 하여금 자본주의 체제의 규칙과 규범을 준수하도록 하면서 중국을 자본주의 세계 시장경제체제에 통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조건없이 중국의 최혜국 대우를 갱신하여 준 부시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이유로 들어 스페셜 301조에 해당하는 최우협상국으로 지목할 것을 미무역대표부에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미․중관계가 탈냉전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조정기를 맞이하고 있던 시점에 이라크의 쿠웨이트 무력침공으로 발생한 페르시아만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장기간의 냉전적 평화 구도가 깨어지고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세계 경찰력으로서의 역할이 시험 받는 사건이었다. 이라크의 무력침공을 무력으로 제재하려는 미국의 정책에 대하여 중국은 미국주도의 신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미국의 대패권주의와 이라크의 지역적 소패권주의 간의 투쟁이라고 논평하면서, 미국의 군사행동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것은 천안문 사태에 대하여 중국에 대한 미국의 인권압력을 팽창주의적 내정간섭으로 규정하고 있는 중국지도부의 인식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으로서 기권표를 행사하여 미국의 행동에 저항을 하기는 했지만, 초강대국인 미국의 군사적 행동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천안문 사건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 관계국들과의 관계 악화를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는 중국의 외교적 시그널이었으며 중국이 택할 수 밖에 없는 고육책이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기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1991년 12월에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안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에서 비준하였고, 1992년 2월에는 미사일기술통제레짐(MTCR)을 준수할 것을 공식으로 천명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과거 냉전체제하에서와 같은 중국 카드의 전략적 가치는 사라졌지만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 구도 속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회주의권 붕괴와 걸프전 이후, 특히 소련의 해체로 말미암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아‧태 지역에서도 미국의 주도 아래 다자간 협상에 의한 지역 안보체제 형성을 구상하고 있으나 최근 들어 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행사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반면 일본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강국으로 등장했고, 중국은 캄보디아 문제 등 동남아 분쟁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과의 관계정상화, APEC 참가, 대일 관계개선 등을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으로서는 일본과 중국을 동반자로 하여 아시아의 경제협력 및 안보체제를 주도함과 동시에 군사대국을 겨냥하고 있는 일본을 견제하고, 한반도 평화에 가장 큰 위험이 되는 북한 핵개발 움직임을 좌절 시키기 위해서도 더욱 중국의 협조가 필요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소련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인 노력을 경극하였다. 중국은 국경무역을 통한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고급 무기를 수입하는데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전략적으로 탈냉전 시기에 미국의 독주를 우려한 중국이 러시아와의 군사적·전략적 우호 관계 증진을 통하여 미국을 견제하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미국은 러시아의 고급 무기류와 군사장비가 중국으로 이전되는 것을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더구나 남지나해와 동지나해에서 발생하고 있는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와의 영유권 분쟁은 ‘중국 위협론’을 더욱 확산 시키고 있다. 점증하고 있는 중국의 국방비와 이 지역에서의 중국의 군사 활동은 지역강대국으로 등장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을 자극하고 있다.

 

ㄸ라서 클린턴 행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부시 전 대통령의 대중 유화노선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중국의 인권문제, 무기통제 문제, 무역불균형문제 등에 대해 보다 엄격한 입장을 견지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따라 클린턴 행정부는 1993년 6월 중국의 최혜국대우 갱신을 조건부로 결정하였다. 중국 정부가 반체제 인사와 그 가족들에 대한 해외 이주 허용, 재소자 노동(convict labour)에 의한 제품수출 금지, 티베트의 종교‧문화적 권리 존중, 정치범 석방 및 관련 사항 설명, 재소자에 대한 처우 개선 등 일곱개 분야에서 개선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1994년에는 최혜국 대우를 취소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의 인권 상황과 무역 정책을 연계시킨다는 것이 효용성이 없음을 파악하고 중국으로부터 부분적인 양보를 받아내고 1994년의 최혜국대우를 갱신하여 주었다.

 

클린턴 행정부도 중국과의 관계가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중관계는 대만문제로 또다시 긴장관계에 돌입하게 되었다. 1995년 대만의 이등휘 총통의 미국 방문이 미국에 의해서 허용되었다. 이것은 대만이 자국의 실추되었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미국에 대하여 실리적 외교를 끊임없이 감행한 결과 얻은 성과물로 분석되어지고 있다. 대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켜 점차로 흡수 통일하고자 하는 중국으로서는 이등휘총통의 미국방문을 허용한 미국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미국과의 국교 수립 때 ‘하나의 중국’을 인정한 미국이 중국의 통일 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 들였다. 중국은 미국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교전국의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미국이 불장난을 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중국은 구체적인 외교적 조치로써 지호전(遲浩田) 국방부장의 방미를 연기하였으며 미사일 기술 통제 레짐(MTCR) 및 원자력 협력에 관한 미국과의 협상을 연기하였다. 또한 보복 조치의 하나로써 중국에 진출하고 있는 미 기업들에 대한 제제와 산업 기반시설 프로젝트에 대한 승인을 연기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연례적으로 중국을 괴롭혀 왔던 최혜국 대우를 재연장하여 줌으로써 중국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미국은 중국의 인권상황이 아직 받아들일 정도로 흡족한 것은 아니나 자유로운 이민과 개방적인 해외여행을 허용하고 있다면서 중국의 이민 정책이 최혜국 대우의 법적 연장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등휘 총통의 방미에서 비롯된 미‧중 마찰과 최혜국 대우 연장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미국에게 중국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가장 중요한 나라의 하나이며, 미중 관계가 아주 미묘하고 어려운 시기에 있지만 미국은 대중국 관계가 생산적일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면서 ‘하나의 중국’원칙을 거듭 확인 하였다.

 

이와같은 미국의 유화적인 태도는 대만문제로 인한 미․중관계의 악화를 완충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사실 미국의 입장에서 중국과의 극단적인 갈등을 초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중국 역시 미국의 패권주의에 계속적으로 의구심을 나타내면서도 개혁‧개방으로 인한 선진국가 특히, 미국과의 경제적 상호의존의 유대관계를 단절한다고 하는 것은 국익에 반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2) 투자 및 통상관계

 

미국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과 세계 패권 다툼을 벌였던 까닭에 우방에 대해 경제적 불만이 있어도 노골적 통상 압력을 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고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의 태도는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탈냉전 이후 미국의 최대 관심사가 사회주의 봉쇄라는 안보적 고려에서 경제적 이익수호로 바뀐 것이다. 냉전 종식 이후 경제문제는 경제문제일 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미국은 냉전 시대 우방에 보여주었던 관대한 태도를 거둬 들였고 이러한 현상은 전후 세대인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즉, 냉전시기 미국의 외교정책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불리하더라도 대소봉쇄라는 전략적 이익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동맹국이거나 우호국과의 관계에서 미국은 경제적 고려보다는 전략적 고려 때문에 균형적 교역을 통한 미국의 경제적 이익 추구라는 행동은 억제되거나 간접적으로 표출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탈냉전의 국제적 상황에서 미국은 전략적 고려를 앞세워 경제적 이익에 뒷짐을 지는 상황을 연출하지는 않았다. 국제적 역학구도가 변모한 것이다. 더구나 다자간 무역기구인 세계무역기구(WTO)를 미국이 주도적으로 출범시킴으로써 미국의 통상 공세는 강화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을 중국과의 통상 마찰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중국의 외자도입은 크게 외국 정부,세계은행과 아시아 개발은행 등 국제 금융기관 및 민간은행으로부터의 차관 ; 합자(合資),합작(合作),독자(獨資) 등의 ‘삼자기업’(三資企業)과 공동 개발 형태의 적접 투자; 상업 신용(리스,보상 무역,위탁 가공‧조립) 등 3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경제특구를 비롯한 개방항 지역 등에 외국의 직접투자를 위한 유인책을 제시하고 선진국의 투자유치에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1989년말 미국은 중국에 대한 전체 외국 투자의 11.2%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 투자액은 홍콩과 마카오의 61.6% 투자비율에 다음 가는 액수였으며, 일본은 단지 8.7%만을 투자하고 있었다. 1991년말 미국의 대중국 투자액은 45억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런 투자액을 넘어서 주요한 기술자원과 기술 교육에 있어서 중국에게는 중요한 교역국인 것이다.

 

중국의 개방정책은 외국상품의 무제한적인 중국 진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의 양과 성격은 대중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 아니고 중국 당국의 계산된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수출액은 1989년 58억 달러에 달했다가 천안문 사태 이후 양국의 관계 악화로 1990년에는 48억 달러로 감소하였으나 이후 다시 회복기를 거쳐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수출 상품의 구성도 다양해졌다. 1979년에는 미국이 대중 수출 상품의 58%가 농산물이었으나 1986년에는 20%, 1989년에는 24%로 농산물의 비중이 감소해 나갔다. 최근의 미수출 상품의 주종은 기계류, 수송장비,항공기, 항공기 부품, 특수 산업 기계, 자동 정보처리 기계 등 중국의 개발 프로그램에 유용한 제품들이 점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수출이 중국의 근대화 전략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속적인 수출 붐을 통하여 생산성을 제고하도록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중국의 미국에 대한 수출액은 침체국면 없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1990년에는 151억 달러에 달하였으며 미국은 1990년 현재 중국 수출량의 25%를 감당하는 최대의 수출 시장이 되었다. 개방기간을 통하여 중국의 대미 수출품도 그 구성이 상당정도 변하였다. 직물류,의류,석유가 1981-85년 사이에는 대미 수출의 50-60%를 차지하였으나 1990년도에는 위의 제품들이 25%수준으로 그 비율이 하락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중국 산업의 근대화를 반영하여 경공업 제품, 원거리 통신장비, 전기 기구, 장난감, 스포츠용품,신발류, 전기 제품 등이 주요 대미 수출품이 되고 있다.

 

양국의 국교 정상화와 함께 급속히 증대되어 온 양국간의 교역은 1986년 이래 미국의 대중국 무역 수지 적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1990년 104억 달러, 1991년 150억 달러, 1992년에는 180억 달러를 넘어섬으로써 중국은 일본, 대만에 이어 미국의 세번째 무역 적자 상대국이 되었다. 1994년에 중국은 1천2백 10억 달러의 수출에서 53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냈는데,미국과의 교역에서 2백85억 달러의 흑자를 올렸다. 이렇듯 무역에 있어서 미국은 중국에게 주요한 시장인 셈이다. 미국과 중국의 통상관계가 잠시 악화되었던 1995년 2월 미국은 미국시장이 없으면 중국이 지금처럼 빨리 성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인식을 가지고 중국 수출품에 100% 보복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격하였다. 마찬가지로 거대한 잠재적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은 미국과의 합작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띄웠다. 결국 서로의 속셈과 필요에 의해 타협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이러한 무역분쟁의 소지는 다분하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이와 같은 무역 수지 불균형이 중국측의 각종 관세 및 비관세 장벽에 의한 불공정한 무역 관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그 시정을 요구하였다. 또한 미‧중의 통상관계는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정책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공정한 무역거래를 위한 공격적 통상외교로 시장 개방의 확대, 재소자 생산 상품(convict-labour product) 수출 문제, 세계무역기구가입 문제, 최혜국대우(MFN) 갱신 문제 등이 주요 현안으로 남아 있다.

 

5) 맺음말

 

미국의 중국 전문가인 해리 하딩은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이후 20년간 미·중 관계를 분석하면서 ‘깨어지기 쉬운 관계’(a fragile relationship)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체제의 지향점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양자의 필요에 의한 우호 관계의 취약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관계에서 외교라고 하는 것이 각 국가의 이익을 최상위에 놓고 행동하듯이 이 ‘깨어지기 쉬운 관계’는 아직 깨어지지 않고 있으며 당분간 쉽사리 깨어질 것 같지도 않다.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미국의 입장에서 탈냉전 시기에 중국의 군사전략적 약효는 상당정도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중국 역시 미국의 유일무이한 패권정책에 껄그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의 세력균형과 경제적 협력을 원하는 미국에게 중국은 아직까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중국 역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중국의 경제를 발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관계를 불편하게 해서는 득될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4개 현대화라는 국가의 최상 목표를 21세기 초엽에는 반드시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중국 지도부의 의지는 여전히 실용주의적 이념 위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비록 수사적 표현으로 ‘패권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을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불편한 것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득될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역시 군사적ㆍ경제적으로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중국과 불편함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달라진 국제 상황에서 ‘중국위협론’이 제기되는 상황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양국간의 관계에서 ‘대만문제’와 같이 심각한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는 산적해 있지만 중단기적으로는 경제적인 상호 이익과 정치적인 필요 때문에 미중관계는 부분적인 협력과 갈등이 반복하여 나타나는 복잡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입장을 되짚어 볼 필요가 제기된다. 미ㆍ중 관계의 갈등과 협력 속에서 한반도 역시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미·중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되는 경우 미국과의 동맹관계, 중국과의 우호 관계 사이에서 우리의 선택과 입지는 좁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의 핵문제는 물론 한반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 통일 과정,통일 후를 위한 준비 등 제 분야에 있어서 한국과 미국은 중국의 협조를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해서 미·중 관계의 악화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서서 우리가 미·중간의 갈등과 협조의 국면에서 더 이상 방관자적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의 독특한 위치에 유념하여 미중과녜에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