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의 역사 (2) : 夏, 殷, 周, 春秋戰國時代

지식창고지기 2009. 5. 1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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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중국의 역사 (2) : , , , 春秋戰國時代

 


1.
중원분열의 서막

3
(
) 5()의 전설을 이어서 기원전 21세기, 중국 사상 최초의 왕조(王朝)로서 하()나라가 세워졌다. 아직까지 하()의 존재를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적 발굴은 없지만, 성왕 우()에서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16세기, 폭정 걸() 때에 멸망하기까지 17대 약 5백년 동안이었다. 근래 은허(殷墟)와 이리두(二里頭) 문화유적이 발견됨으로써 하왕조의 실재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왕의 주지육림으로 하()왕조가 멸망하고, 탕왕(湯王)이 은()왕조를 개창했다. 현재, 실증적으로 확인되어 있는 최초의 왕조는 은()나라이다. ()의 무왕(武王)에게 멸망하기까지 31대 약 6백여년에 걸쳐 중원(中原)을 지배하였다. 하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華北)일대에서 번성했으며, 수도는 은허가 발굴된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일대이다. 한자의 초기 형태인 갑골문자를 사용했으며, 제사용으로 청동기를 사용할 정도로 문화수준이 높은 국가였다.

(
)왕조는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전 249년까지 은()나라에 이어 성립된 중국의 고대 왕조이다. 처음에는 은나라에 귀속된 속국이었으나 문왕(文王)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이 은의 폭군 주()를 몰아내고 건국했다. ()는 은()의 말기에 처음 시작된 봉건제도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국가로서 봉건제에 의해 혈연관계가 없는 부족까지도 주의 친척으로 보는 유사혈연제를 만들어 제후로 봉하고 유사시 무력을 동원하도록 하여 강력한 무력국가를 만들었다. 이러한 주도 서융(西戎)이라는 유목민의 침입을 피해 기원전 770년에는 동쪽 낙양(洛陽)으로 천도했다. 동쪽으로 옮겨갈 때까지를 서주(西周)라 하고,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한다. 동주시대에는 국력이 쇠약하여 각 제후들에게 실권을 빼앗긴 채 명목만 남은 국가가 되었다. 기원전 256년 진()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25명의 제왕이 514년간 동주왕조를 이끌었다. 동주시대는 곧 춘추전국시대에 해당한다.

주 왕실은 동천과 함께 권세를 잃고 이에 대신하여 춘추의 5 - (
), (), (), (), () - 라고 불리우는 패자가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고 전국의 7응이라고 불리운 제후 즉 한(), (), (), (), (), (), ()이 정치를 전단하는 시대가 시작된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은 모두 주왕실의 제후들이었으나, 당시 정치가 문란 해서 주왕실의 위력이 제후들에게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공자, 노자, 맹자 등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했으며 제지백가(諸子百家)라는 학술 사상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유파로는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종횡가(縱橫家), 농가(農家), 병가(兵家), 소설가(小說家), 잡가(雜家) 10대가 있었다. 각 유파는 상호 논박하면서 사상적 발전을 이루었으므로 당시 학술 문화가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2.
제자백가(학문과 사상)의 발달


춘추전국시대에는 부국강병(
富國强兵)을 위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있는 사람을 등용하였으므로, 각 방면에 인재가 쏟아져 나와 학문과 사상이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춘추시대 말에는 전국시대에 걸쳐 약 300년 동안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맹자(孟子)·노자(老子)·묵자(墨子) 등 사상가가 나와 중국 사상계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이 때 활약한 학자나 사상가를 제자백가라 한다.

제자백가 사상 중에서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공자에서 비롯된 유가사상(
儒家思想)이다. 도덕생활을 강조한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 하였다. 인은 남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으로 인에 도달하는 출발점은 자식이 부모를 섬기고 동생이 형을 따르는 효()와 제()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효와 제에 바탕을 둔 도덕을 확대시켜 인을 실현함으로써 어지러운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의 사상은<논어>에 잘 나타나 있다.

공자의 뒤를 이어 맹자와 순자(
旬子)는 유가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여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순자는 성악설(性惡說)을 내세워 인간의 악한 천성을 예법(禮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가르침이 유교이며 이를 연구하는 학문이 유학이다. 또한 노자는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을 주장하였다. 즉 인위적인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자유로운 생각으로 모든 일을 해 나가는 것이 좋다고 가르쳤다.

노자의 사상은 장자(
莊子)가 더욱 발전시켰는데, 이러한 사상을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 한다. 노장사상은 후대에 여러 가지 민간신앙과 합쳐져서 도교(道敎)로 발전하였다. 한편, 묵자로 대표되는 묵가는 혈연이나 신분을 초월한 차별없는 사랑인 겸애(謙愛:박애)를 주장하였고, 한비자(韓非子) 등의 법가(法家)는 엄한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 밖의 제자백가사상으로는 국가유지를 위해서는 군사력이 중요하다고 하는 손자(孫子)·오자(吳子)의 병가(兵家) 등이 있었다.

3.
갑골문자 - 한자의 탄생


한자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생겼는가는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고대의 전설적인 인물 황제(
黃帝) 시대의 창힐(蒼詰)이 짐승 발자국에서 암시를 얻어 발명했다고 한다. 물론 문자라는 것이 민족지혜의 결정이며 긴 역사 속에서 발전하여 차츰 체계를 갖추어 간다고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한자를 발명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생각할 수 없으며,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예로부터 전해지는 성인창조(聖人創造) 전설 일 뿐이다.

그러면 실제 한자의 시작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그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는 고고학적인 성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맨 처음의 성과는 1954-1957년에 걸쳐 행한 반파유적(
半坡遺跡)의 발굴이다. 이는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도자기의 조각 중에는 문자처럼 보이는 기호가 새겨진 것도 있는데, 뭔가 특정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표시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문자와 기호를 구분짓는 경계로서의 문장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문자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태서 유적(
台西遺跡)은 은대 중기의 유적으로서 시대적으로 갑골문자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자리한다고 짐작되는데, 이 곳에서 발견된 도기의 파편에는 후의 갑골문자에서 발견된 '', '', '' 등의 글자꼴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어 주목을 받는다.

현재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한자는 실제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왕조인 은나라 말기(BC1300-BC1000)에 사용된 갑골문자이다. 은나라는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정치형태를 취하였는데 전쟁과 농업 생산, 사냥 등 국가의 중요 사항은 물론 왕족의 출산, 질병, 바람, 구름 등의 자연 현상, 일기 예측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위와 현상에 대해 점(
)을 쳐서 신의 뜻을 물었다. 즉 일상의 전반적인 것을 점을 쳐서 얻은 결과에 의지하여 이를 거북의 등딱지나 뼈에 기록했는데 이 때 사용된 문자를 갑골문자라고 한다.

청나라 말기 1899년 국자감제주(
國子監祭酒:국립대학총장격)였던 왕의영(王懿榮)이 말라리아를 오래 앓았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용골(龍骨)이라 부르는 땅 속에서 파낸 어떤 오래 된 동물의 뼈를 샀다. 왕의영이 이 뼈를 보다가 표면에 글자 같은 것이 새겨진 것을 보고 더 많은 용골을 사들여 고대문자에 조예가 깊은 유악(劉顎)과 검토하여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고대 문자임을 밝혀 냈다. 후에 나진옥(羅振玉)이 이를 대규모로 수집, 탁봉하였고, 왕국유(王國維)와 동작빈(董作賓)이라는 학자는 갑골문 자체에 대한 연구에 몰두, 문자를 해독하고 갑골문의 역사학적 가치를 입증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곽말약(郭末若 1892-1978)이 주도한 중국 과학원은 그 당시까지 연구된 갑골과 그 성과들을 <갑골 문합집(甲骨 文合集)>이라는 책으로 편찬하였다.

갑골문자는 지금부터 3천년 전 이상의 시대에 쓰인 문자인데 발견 뒤 겨우 몇 십년의 연구 성과로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인명이나 지명 등의 고유명사를 제외하고 거의 해독되었다. 이는 세계 고대문자 해독의 역사에서 보면 경이적인 발전이다. 갑골문자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해독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축적된 문자학적 연구성과와 왕국유나 동작빈 등 훌륭한 학자가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연구하여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한자가 수 천년의 긴 세월동안 끊임없이 사용되었고 글자와 언어 체계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

4.
中華思想

중국 문화가 최고이며, 모든 것이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 만방에 퍼져야 한다는 중국의 민족사상을 말한다. 예로부터 한족(漢族)이 품고 있는 자기 민족 중심의 사상이다. 중화의 배후에는 항상 이적(夷狄)이라 하여 이민족을 천시하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고도 한다. ()은 ‘중앙’이라는 뜻이며, ()는 문화라는 뜻이다. 이 사상은 원래 유교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이론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왕의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유교에서는 왕이 살고 있는 중국의 땅은 물론, 그 변경이나 새외(
塞外)의 지역도 ‘왕화(王化)’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왕화’의 영향은 멀어질수록 희미해지지만, 중화문화가 미치지 않는 ‘화외(化外)’의 땅이라 하더라도 ‘왕화’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지구상의 모든 지역이 중화문화의 세계라고 한다. 왕화사상은 전국시대(戰國時代:BC 5~BC 3세기)로부터 진()·한()나라에 걸쳐 형성되었다. 당시의 군주는 문무(文武) 관료를 양성하였고, 내외에 대하여 형벌이나 무력으로써 권력을 강화하였으나 유가(儒家)에 속하는 사상가들(孔子·孟子·荀子) 등은 군주의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중시하였다.

광활한 중국땅에 안정된 정권을 확립한 한왕조(
漢王朝)는 그들의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왕화사상을 받아들였다. 그 뒤 청나라에 이르는 2000년 동안 황제정치체제 밑에서 유교 관료, 지식인층에 의해 정착되었다. 왕의 덕을 중핵으로 하여 생각된 세계질서 속에서는 종족적·민족적 차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찍이 춘추시대(春秋時代:BC 8~BC 5세기)까지는 융()·적()·만()·이()라 하여 중화세계로부터 차별과 배척을 받던 이민족도 ‘왕화’를 기준으로 하면 중화세계 속에 포함된다. 그 대신 한족(漢族)의 문화양식만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의 가치는 부정되고 만다. 외국에서 통상사절이 와서 ‘조공(朝貢)’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왕화’사상은 무한하게 퍼질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국경관념이나 영토관념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19세기 이후 이른바 열강이 비교적 용이하게 중국의 영토나 이권을 분할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측에 명확한 국경이나 영토관념이 없었던 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