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의 역사 (3) : 秦, 漢, 三國, 晋時代

지식창고지기 2009. 5. 14. 10:50

My love China로부터 가져 옴

 

간추린 중국의 역사 (3) : , , 三國, 晋時代

 


1.
통일왕조의 등장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한자숙어(
漢字熟語)의 대부분이 춘추전국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할만큼 이 시대는 잦은 전쟁과 사회적인 혼란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이런 혼돈을 마무리짓는 패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곧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 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에 군현(郡縣)을 설치했으며,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 도량형, 문자의 서체를 통일하고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몰수했다. 대외적으로는 북쪽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고 장군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많은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만리장성이나 아방궁(阿房宮), 능묘(陵墓) 건설 등으로 인해 백성의 원성을 사게 되어 각지의 민중반란이 일어나 겨우 15년만에 그 제국은 와해되어 버렸다. 그러나 진()제국은 중국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처음으로 중국에 통일국가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현재 차이나(China)라는 영어 이름도 진(Chin)에서 기원한 것이다.

유방(
劉邦)과 항우(項羽)의 초한전(楚漢戰) 끝에 BC 202년에 한나라()의 고조(高祖) 유방은 숙적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격파하고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하여 통일된 왕조를 세웠다. ()이 엄중한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실패했던 것을 감안해, 법제를 늦추고 부분적으로 봉건제를 부활해 군현제와 병용하는 이른바 군국제(郡國制)을 실시했다. 한나라() 시대에는 유교를 정치체제의 표본으로 삼았고, 종이와 지진계를 발명하는 등 여러 가지 과학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제(武帝)를 정점으로 하여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기원 9년 왕망(王莽)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왕망은 신()왕조를 건설했지만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23년 반란군에게 피살됨으로서 신왕조도 단명을 기록하며 멸망했다.

왕망(
王莽)에게 빼앗긴 한나라()를 부흥하려는 하남(河南)의 호족(豪族)들에게 추대된 유수(劉秀-光武帝)는 기원 25년에 전국을 평정하고, 도읍을 낙양(洛陽)에 정했다. 보통 이 때 생성된 한()을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하고, 한고조에 의해 건국된 한나라()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 라고 부른다. 후한 말년 환관(宦官)이 득세하고 정치가 부패하여 184년 황건(黃巾)의 난이 일어나고 위(), (), ()로 천하가 삼분된, 220년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헌제(獻帝)를 폐위시키고 제위에 오르면서 완전 멸망했다.

이 후 약 45년간 조조의 위(
), 유비(劉備)의 촉(), 손권(孫權)의 오()나라가 대립하는 삼국시대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는 유명한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出師表)가 등장하는 때이기도 하다. 263년 위에 의해 촉이 멸망하고 280년 진()의 사마염(司馬炎)에 의해 오가 멸망하면서 삼국시대가 끝이 나고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그러나 제권(帝權)을 강화하기 위해 일족의 왕들에게 병력을 가지게 한 일은 이민족의 침입을 부른 결과가 되었다. 316년에 진나라()는 흉노(匈奴)에게 망하게 되지만 진나라의 일족으로 강남을 다스리고 있던 사마예(司馬睿)는 호족(豪族)의 지지를 받아 진왕조(晋王朝)를 재건했다. 전자를 서진(西晋)이라 하고 후자를 동진(東晋)이라 한다. 서진은 4명의 황제에 의해 52년간 지속됐고, 동진은 송()의 유유(劉裕)에게 멸망되기까지 11명의 황제에 의해 104년간 지속됐다.

2.
시황제(
始皇帝)

일찍부터 법가의 사상을 받아들여 제도개혁과 부국강병에 힘쓴 진은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중국대륙 최초의 통일제국이 되었다. 진의 왕 정()은 대륙을 통일한 후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군주로 전해오던 35(三皇五帝)의 칭호를 합쳐서 처음으로 황제(皇帝)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황제라는 뜻에서 스스로 시황제라 일컫고 황제의 위세를 떨치기 위하여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방궁을 지었다. 시황제는 법가에 정통한 이사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관료정치를 베풀었다. 시황제는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 아래 현()을 두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군·현을 다스리게 하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다. 그는 효과적으로 중앙집권적 군현제도를 운영하기 위하여 전국적인 도로망을 갖추고 문자·화폐·도량형 등을 통일하였다. 또한 민간인이 가진 무기를 몰수하고 지방 세력가들을 서울인 함양으로 이주시키는 등 강압적인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시황제의 강압통치는 유학자들의 심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시황제는 정치와 사상에 관련된 서적을 닥치는 대로 빼앗아 불살라 버리고 수백 명에 달하는 유학자를 붙잡아 생매장하였다. 이 사건이 분서갱유(焚書坑儒)
이다.

3.
분서갱유(
焚書坑儒)

진시황(秦始皇)은 기원전 221년 전국칠웅(戰國七雄-<>, <>, <>, <>, <>, <>, <>)이 할거하던 중국대륙을 통일하여 진()제국을 건설하였다. 중국역사상 최초로 전제적인 중앙집권제를 바탕으로 하여 통일 국가를 건립한 진시황은 명실상부한 정치적 통일을 굳히기 위해서는 사상의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믿었다. 수 백년에 걸친 제후들의 분립과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상태를 겪어온 만큼 당시 민간에서나 학자들 중에서도 전제주의적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구축하는데 불리한 학설을 주장할 뿐 아니라 새로운 법령이나 제도를 부인하거나 대중을 선동하여 새 정책을 비판하는 자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상의 통일을 이룩하고 정치적 통일을 굳히기 위해서는 사상과 언론을 탄압하여야만 한다는 정승 이사(李斯)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시황은 의술(醫術), 농업, 복술(卜術)에 관한 서적을 제외한 민간 소장의 고서와 제자백가의 저작을 모조리 회수하여 불살라 버렸다. 한편 이를 숨기고자 공출하지 않은 사람은 도형(徒刑:
노역형)에 처하고 고서에 관하여 논의하는 사람들은 참수형에 처하였으며 정책을 비방하는 사람은 그 일족까지 모두 죽였다.

이렇게 하여 진시황은 모든 학술서적을 불태워 버렸으며 학자들을 학대하고 살생하는 정책을 강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양 여러 나라 중에서 처음으로 사상과 언론을 탄압한 진시황의 유명한 정책이자 악명 높은 분서갱유이다. 진시황의 이와 같은 강력한 사상과 언론의 탄압은 신흥 지배계급이 새로운 정치권력을 굳히기 위하여서는 어느 정도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방법이 너무 가혹하고 일방적이어서 이 때문에 고대문화유산의 보존에 크나큰 손실을 가져온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

4.
萬里長城 축조

중국 북쪽의 몽고고원에서 살던 흉노족(
匈奴族)은 전국시대부터 중국 땅에 자주 침입하여 왔다. 기마민족인 그들은 중국인들에게 언제나 위협적인 존재였다. 대륙을 통일한 시황제는 북방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총 길이가 2,400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을 축성하였다. 만리장성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토목공사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시황제는 활발한 대외원정으로 영토를 넓혔다. 그때부터 서양에 중국이 알려져 오늘날의 차이나(지나:支那)란 명칭이 생겼다. 시황제는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그 위세를 사방에 떨쳤으나 급진적인 개혁과 만리장성 등 대 토목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그리하여 그가 죽자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진은 통일 후 15년 만에 멸망하였다.

5.
(
)의 멸망-진승·오광의 난

BC210
년 진시황이 죽었다. 그리고 그 강성하던 진(
)제국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진시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의 아들 호해(胡亥)의 탓도 있었다. 호해는 우둔한 폭군으로서 진시황보다 더 혹독하게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BC209, 즉 호해가 황제로 즉위한 바로 그 해에 진승(陳勝), 오광(吳光)을 지도자로 하는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진승과 오광은 모두 빈농 출신으로서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남부, 전국시대에는 초나라에 속하던 지방 출신들이었다. 특히 진승의 집안은 몹시 가난해서 젊었을 때는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까지 했었는데 어느 날 그는 주인에게 "만약 장래에 부귀한 신분이 되더라도 피차간 잊지 맙시다."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에 주인은 웃으며 "너는 고용살이로 남의 밭을 가는 신분인데 어떻게 부귀해 진단 말인가?"하고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그러자 진승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 연작(燕雀)이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알리오(제비, 참새 따위의 작은 새가 황새같은 큰 새의 뜻을 모른다는 말)"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호해 원년 7월에 죄수와 빈궁한 자들이 징집되어 만리장성에 인접한 어양(
漁陽:하북성 조양)지방을 수비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900여명의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진승과 오광등도 징집되어 둔장(屯長:분대장급)직을 맡게 되었다. 일행은 도중에 대택향(大澤鄕)이라는 곳에서 숙영하게 되었다. 때마침 7월 장마철이라서 연일 큰비가 내려 길이 막혀 버렸다. 일정을 따져 보니 아무래도 기한 안에 어양에 닿을 것 같지는 않았다. 기한을 넘기면 진나라 법률에 의해 모두 참수를 당해야 했다. 여기서 진승과 오광등은 의논 끝에 "이제는 도망을 하거나 모반을 하여도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이왕이면 한 번 거사나 해보자."고 결정지었다. 이에 900여명의 병졸이 일제히 호응을 하니 중국 역사상 최초로 농민 자신의 무장부대가 결성되었다. 이것은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들의 순수한 봉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반란군은 거듭 서쪽으로 진군해 나가 진현(陳縣:하북성 추양현)을 함락, 여기서 진승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리하여 진승은 백관(百官)을 두어 정부를 만들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였다.

이로써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이 세운 국가권력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진승은 계속 군사를 이끌고 진의 도읍 함양에 육박하여 진조(
秦朝)의 붕괴도 목전에 다 다른 듯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워낙 오합지졸에 불과했기 때문에 진의 장수 장한의 반격에 패퇴하고 진승은 탈주하는 도중 불행히도 차부(車夫)의 배반으로 살해되고 말았다. 이로써 6개월간 유지되었던 진승의 정권은 무참히 괴멸되고 말았지만 이 영웅적인 혁명이야말로 진 제국 타도의 첫 봉화로서 뒤이어 항우와 유방으로 계승되었다.

6.
발전과 비단길

진 말기에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은 귀족출신의 항우와 농민출신의 유방으로 압축되었다. 결국 항우를 무찌른 유방이 장안(
長安)에 도읍을 정하고 한 왕조를 열었다. 한 고조(유방:劉邦)는 진의 멸망을 거울 삼아 주의 봉건제와 진의 군현제를 절충한 군국제도(郡國制道)를 실시하였다. 곧 수도에서 가까운 지방은 직접 통치하고 먼 지방은 왕족이나 공신을 제후에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한은 제7대 무제(武帝)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무제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유교를 국교로 삼아 유학을 크게 융성시켰다. 또한 대규모의 치수·관개사업을 일으켜 경제개발에 힘쓰는 등 내치(內治)에 힘썼다.

만리장성 축성 뒤 한동안 잠잠하던 흉노족이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한나라를 괴롭혔다. 그러자 무제는 흉노에 쫓겨 서역으로 이주한 대월지국(
大月支國)과 동맹하여 흉노를 협공하려고 마음먹고 장건을 대월지국에 보냈다. 대월지국으로 가는 도중 장건은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10년 뒤 장건은 몰래 탈출하여 대월지국에 도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장건의 대월지국 여행으로 서역(중앙아시아)의 교통로가 열려 서양의 산물이 중국에 들어오고, 중국의 비단이 멀리 로마에까지 수출되었다. 그리하여 이 길을 비단길이라 일컫게 되었다.

7.


史記 중국 나라 무제 때 역사가 사마천이 편찬한 책이다. 太史令 사마천이 적은 사서는 처음에「太史公書(혹은 太史公記)로 불리었으나 위진(魏晋)시대에 와서「사기」라고 불리게 되었다. 중국 최초 문명시대인 黃帝시대에서 前漢 武帝시기까지 2,500여년의 역사를 서술한 130권의 방대한 역사서이며, 사기가 씌어지고 난 후 2천년 동안 중국의 모든 역사서 중에서 가장 널리 읽혔던 책중의 하나였다. 그 체제는 후사에 正史
모범이 되어 왔다.

사기는 전체적으로 기전체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이후 중국 역대 왕조사의 편찬에 채용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전체란 제왕의 즉위 연대에 따라 기록하는 단순한 역사편찬 방식이 아니라, 통치자를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속한 신하들의 전기·통치제도·문물 등을 분류, 서술하여 왕조 전체의 체제를 이해하기에 편한 역사서술로서 역사적 사실 뿐 아니라 역사적 시각의 다양성까지 표현할 수 있어 생동감 있는 역사를 재현할 수 있다. 즉 중국인의
時空에서 전개된 인간의 여러 활동 및 그 결과를 망라한 것이다.

따라서 '
史記'는 한편의 웅대한 通史이자 世界史이며, 동시에 종합사인 것이다. 이 때문에 史記 시대의 繼起的 변화와 여러 지역간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진행된 인간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인과적인 이해뿐 아니라 사건과 현상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보편적인 원리의 문에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
史記'는 사마천 자신이 당시 士人으로서는 가장 치욕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宮刑 받고 좌절과 울분속에서 史記라는 大史書 완성한 비극적인 생의 경험이 점철된 역사서이기도 하다. 그의 문장을 보면 많은 사람들의 삶의 역정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추적하여 비판하면서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개인의 비극을 극복하여 절실하고 냉철한 역사적 진실의 추구로 승화시켜 객관적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있다는데 사기의 매력이 있다.

사기는「
本記」「」「」「世家」「列傳」의 130, 52 6천여자로 이루어저 있다.

본기 30권 역대 왕조의 변천을 서술한 연대기

10권 각 시대에 대한 역사
8권 국가의 제제도의 연혁과 변천을 기록
세가 30권 봉건제후의 연대기

열전 70권 개인의 전기

일반적으로 우리가
史記 함은 사기열전을 떠올릴 만큼 열전은 사기의 다섯 부문 중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또 분량이 가장 많다. 130권 중 70권이 개인의 구체적인 성공과 실패를 추척한 개인전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만큼 사마천은 역사를 개인의 능동적인 활동의 집적으로 보았고, 개인의 禍福 역사의 흥망성쇠를 개인의 도덕과 능력, 이것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능동적인 노력여하의 결과로 설명한다. 사기가 만들어진 지 2천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고 흥미를 주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기가 역사적이면서도 생생한 인간을 탐구하는 인간학의 백과사전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근세 경영학의 교과서인 것이다. 사기는 격동기에 살았던 인간과 온갖 인간관계를 설명한 책으로서, 그 속에 인간에 관한 모든 자료가 들어 있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고 거울삼아 사는 방법과 지혜를 그 시대 인물들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

사기는 또한 문학적으로도 빼어난 작품이며 같은 문장이라도 읽는 사람의 소양과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해석되는 고전이다. 뿐만 아니라 사기는 아무리 읽어도 싫증나지 아니하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삶과 지혜의 보고(
寶庫)이고 철학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기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날로 복잡해져 가는 오늘의 환경 속에서 더욱 더 광채를 발하고 많이 읽히는 것이다.

8.
죽림칠현


황제, 귀족, 상인으로부터 역사의 블랙홀에 이르는 중국 사치와 향락사에서 지식인 집단인 사대부를 빼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대개 지식인은 빈곤한 계층이기 때문에 사대부의 사치는 죽림칠현이래 대개 정신의 사치, 정신의 방탕이 중심을 이룬다. 죽림칠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완적(210~263), 혜강(223~262), 산도(205~283), 유영(연대미상), 완함(연대미상), 상수(연대미상), 왕융(234~305) 등 일곱 사람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3세기 중반, 조씨의 위에서 사마씨의 진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격동의 전환기였다
.

이 위험한 시대에 죽림칠현은 새로이 등장한 정권의 반대파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된 사마씨의 첩보망을 피하기 위해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이념에 기반한 독특한 생활방식을 창조했다. 그들은 쓸모 없는 존재가 되기를 자처하여 그 생을 마치고자 했다. 죽림칠현의 일원인 왕융이 명문귀족 '낭사 왕씨'의 일족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모두 귀족층이었다. 육조시대를 거치면서 귀족층과 사대부층은 거의 일치하였다. 이 점이 근세 이후의 사대부층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죽림칠현이 후세에 알려진 모습처럼 정치적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 죽림에 모여 다 함께 술에 취하고 음악을 즐기는 식으로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죽림칠현 전설이 기성 정치체제 속에서 살기를 강요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배척하고 자유롭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후세의 사대부에게 이상형이 된 것은 틀림없다
.

죽림칠현이라 해도 생활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리더격인 완적이나 혜강의 일견 자유분방한 생활방식도 실제로는 권력기구와의 숨막히는 긴장관계 속에서 신변의 안전을 꾀하면서도 반항적 태도를 관철하기 위한 고육책의 성격이 강하다. 이에 반해 주량을 알 수 없는 대주가로 알려진 유영은 이 세상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정신을 통째로 탕진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완적이나 혜강처럼 영향력 있는 거물도 아니었다. 또한 문학자로서도 초일류급에 속했던 완적이나 혜강과는 달리 겨우 한 편의 산문(술의 효용을 칭송한 '주덕송(
酒德頌)'이라는 작품)만을 남겼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매우 홀가분한 처지였기 때문에 더욱 돋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유영은 '주덕송'서두에 이렇게 말한다.

대인(
大人) 선생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천지개벽 이후를 하루, 일만 년을 한 순간
,
태양과 달을 자기 집 대문, 전 세계를 자기 집 뜰로 생각한다
.
어디로 갈 때는 수레바퀴자국이나 족적을 남기지 않고

일정한 주거조차 없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이불 삼아서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
멈출 때는 술잔을 손에 들고 움직일 때는 술잔과 호리병을 매달고 간다
.
오로지 술을 마시는 데만 정신을 쓰고

그 밖의 일에는 일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유영의 이러한 유유자적한 술 찬가의 근본은 번거로운 현실세계에서 빠져나와 천지자연과 일체가 되고자 함이다. 넉넉한 생성과 소멸의 섭리에 몸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인간존재의 모습이라는 노장사상의 이념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장대한 몽상을 자신의 몸 속에 끌어들이기 위한 필수품이 바로 술이라는 것이다. 유영의 삶은 '술에 젖은 것'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외출할 때는 항상 한 병의 술을 걸친 후 작은 수레에 타고는 시종에게 가래(흙을 퍼 담는 기구)를 지니고 뒤따라오게 하여 "죽으면 즉시 묻으라"고 말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꿈을 꾸듯이 살려고 한 것이다. 이 확신범적 알코올 중독자에게는 이 밖에도 술에 얽힌 일화가 많다
.

예를 들면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끊으라고 애원하는 처에게 신에게 기도하고 금주 서원을 세울테니 신주(
神酒)를 가져오라고 해놓고는 술을 가져오자, "하늘은 유영을 낳고, 술로써 이름을 날리게 하신다"며 기도를 하는가 싶더니 신주를 단숨에 들이키고 금세 곤드레만드레 취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게다가 그는 취하면 집안에서 옷을 홀딱 벗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비난하자 숙련된 노장철학의 과장법을 방패 삼아 정색을 하고 나섰다. "나는 천지를 집으로 생각하고 집안을 잠방이라고 생각한다. 자네들은 왜 내 잠방이 속으로 들어오는가"라고 응수해 상대를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영이 언제나 그렇게 전투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 있어도 쓸데없는 싸움은 멀리하려는 매우 유연한 면도 있었다. 어느 날 유영이 성질 급한 사람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대취한 상태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상대방이 주먹을 치켜들고 때리려고 하자 유영은 유들유들한 말투로 이렇게 받아넘겼다. "나는 계륵(닭의 갈비뼈 ; 버리기는 아깝지만 그다지 쓸모도 없다는 것의 비유)이기 때문에 자네의 주먹을 받을 만한 인물이 못되네" 상대방은 웃어넘기고 긴장은 그 자리에서 풀렸다. 유영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장대한 우주적 환상 속에서 정신의 해방을 꿈꾸면서도 우주와 인간을 대비하며 현세의 부질없음을 내보였다. 그는 이렇게 몸을 굽힘으로써 밀려오는 외부의 압력을 비켜가려 한 것이다. 술독에 빠져 산 유영은 위험하다 싶을 때 몸을 굽히는 방법을 완전히 체득하면서 정신적 방탕을 다하여 위진교체기를 큰 실수 없이 살다가 유유히 천수를 다하려 했던 것이다. 이후 서진 동진을 통해 이러한 유영의 정신적 쾌락을 앞세우는 생활방식을 추종하여 술 없이 무슨 인생이 있으랴 하고 기절할 때까지 취하는 것을 즐기는 모방자가 속출하기에 이른다. 위진 시대는 지식인이 쾌락 추구에 모든 것을 내맡긴 시대였다. '지식인은 곧 정치적 인간' 이라는 중국 전통의 공식이 깨끗이 없어진, 역사상 드문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