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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중국의 역사 (5) : 수 · 당시대
1. 隋 왕조
중국의 통일왕조(581~618)의 하나. 양견(楊堅:文帝)이 581년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양위받아 나라를 개창하고, 589년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 문제·양제(煬帝:廣)·공제(恭帝:侑)의 3대 38년이라는 단명 왕조였으나,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오랫만에 하나의 판도에 넣어 진(秦)·한(漢)의 고대 통일국가를 재현하였고, 뒤를 이은 당(唐)이 중국의 판도를 더욱 넓혀 대 통일을 이룩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존립의의가 크다.
양견은 북주 황실과 인척관계임을 기화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즉 양견의 처는 북주의 주국(柱國:제2勳位)이던 독고신(獨孤信)의 딸이었고, 그 처의 언니는 북주 명제(明帝)의 황후였으며, 양견 자신의 딸은 북주 선제(宣帝)의 황후임과 동시에 정제(靜帝)의 어머니였다. 양견은 북주에서 그의 전권(專權)에 맞서는 위지형(尉遲) 등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상국(相國:首相)·수왕(隨王)이 되어 그의 사위인 정제로부터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으로 쉽게 북주를 빼앗아 수조(隋朝)를 개창하였다.
문제는 587년 그의 보호국으로 강릉(江陵:湖北省)에 도읍을 정하고 남조(南朝) 양(梁)의 황실 자손이 다스리던 후량(後梁)을 멸망시켰으며, 589년 그의 차남인 진왕(晉王) 광(廣:煬帝)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삼아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켜 통합함으로서 동진(東晉)의 남천(南遷) 이래 317년에 걸쳤던 중국 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문제는 내정에 힘을 쏟아 재정적으로는 긴축정책(緊縮政策)을 취하였으며,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여 터키계(系) 돌궐(突厥)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598년(고구려 영양왕 9)에는 요서(遼西)를 침범한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황실에서는 문제의 장남 용(勇)이 황태자가 되었으나, 진(陳)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간지(奸智)가 넘치는 진왕 광이 형인 용을 대신해 황태자가 되고 뒤에 즉위하여 양제(煬帝)가 되었는데, 문제는 아들 양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양제는 문제의 유업(遺業)을 이어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大運河)를 완성하고, 남북의 통일을 추진하여 동도(東都:東京)를 뤄양(낙양:洛陽)에 조성하고, 토욕혼(吐谷渾)과 돌궐을 토벌하였다.
또한 611~614년 돌궐과 손을 잡을 우려가 있었던 고구려에 3차에 걸쳐 대군을 파견하여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양제는 중국통일 후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너무 서둘러 대대적인 토목공사와 원정을 속행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든 면에서 과중한 부담으로 고통을 받았다. 특히 고구려 원정기지에 가까웠던 산둥(산동:山東)지방 백성들은 그 고통이 더욱 심하였고, 게다가 이 지방은 옛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이어지는 나라의 영토여서 북주를 멸망케 한 수왕조에 대한 반감도 높아서 반란사건도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다.
613년 제2차고구려 원정 도중에 일어났던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은 2개월만에 진압되었으나, 그 후 수나라는 본격적인 반란기에 들어갔다. 또한 양현감의 반란이 있을 무렵 옛 남조(南朝)의 영토 안에서도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은 삽시간에 각 지방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양제는 강도(江都:揚州)에 행행(行幸)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다. 617년 타이위안[太原:山西省] 유수(留守) 이연(李淵)은 내란이 격화하여 양제가 있던 강도가 고립되자 타이위안의 호족들을 끌어 모아 군사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탈취하고 양제의 손자인 유(侑:恭帝)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618년 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하여 살해되자 이연이 공제로부터 양위받아 자신이 즉위, 당조(唐朝)를 창건함으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양제의 총애를 받던 왕세충(王世充)은 공제의 동생인 월왕(越王)을 옹립, 수나라의 대통을 잇게 하였으나 619년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 정국(鄭國)을 세움으로써 수나라의 황실은 그 맥이 완전히 끊겼다.
2. 수의 혼란과 당의 성립
약 400년 동안이나 분열을 계속하던 중국은 6세기 말경에 수나라의 문제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문제는 귀족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정치를 펴기 위하여 과거제도를 마련하는 등 여러 가지 정치개혁에 힘썼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부왕의 사업을 계승함과 아울러 정치의 중심지인 화북과 경제의 중심지인 화남을 연결하기 위하여 황허강과 양쯔강을 남북으로 잇는 1,400㎞에 달하는 대운하를 건설하였다. 대운하 건설은 진나라 시황제의 만리장성과 견줄 만한 큰 공사였다. 대운하는 남북간의 물자교류에 크게 이바지하여 중앙집권의 강화와 중국의 경제와 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양제는 이웃 여러 나라를 쳐서 영토를 넓혔다. 그는 우선 중앙아시아에 진격하여 돌궐세력을 몰아내고 동서 교통로를 확보하였으며, 남쪽의 안남을 정복하였다. 612년에는 10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에게 참패당하였다(살수대첩).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수나라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대운하 건설 등 대규모 공사와 잇따른 전쟁에 시달린 농민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양제는 부하에게 피살되고 통일제국 수나라는 겨우 2대 38년만에 멸망하였다. 대륙을 통일한지 30년만의 일이었다.
수나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여 618년에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새 왕조 唐을 일으킨 사람은 이연(고조)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태종(재위 626~649)은 당나라 300년의 기초를 다졌다. 태종은 수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국가의 통치제도를 고루 정비하는 등 내정에 힘써 이른 바 '정관의 치세'라는 번영을 이루었다. 당의 통치의 기본은 율령격식이었다. 이에 따라 중앙에는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 등의 3성과 6부를 두어 정무를 분담하는 제도를 취하였다. 지방은 10도로 나누고 그 밑에 주·현을 두었으며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당의 번영을 뒷받침한 가장 중요한 제도는 균전제이었다. 균전제는 18~60세의 성년 남자에게 일정한 토지를 나눠주어 농사를 짓게 하는 제도이다. 토지를 지급받은 사람에게는 국가에서 세금을 부과하였다. 또한 당은 兵農一致의 부병제를 실시하였는데 균전제 농민장정에게 평시에 군사훈련을 시켜 전시에 국가를 위해 싸우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러한 제도들은 수나라 또는 그 이전부터 비롯된 것이었는데 당나라 때 완성되었다.
3. 당의 발전과 멸망
당나라는 태종과 고종 때에 영토를 크게 넓혀 대제국을 이룩하였다. 동쪽으로는 신라와 손잡고 백제 및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나중에는 신라까지 지배하려 하였으나 신라인의 저항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쪽으로는 티베트를 복종시키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중앙 아시아까지 진출하였으며, 이슬람 제국과 국경을 맞대었다. 이리하여 한나라 때 개척되었던 동서 교통로 비단길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한편, 북쪽으로는 몽고고원에서 세력을 떨치던 돌궐을 멸망시키고, 남쪽으로는 베트남 북부까지 영토로 삼았다. 번영을 계속하던 당나라는 측천무후니 위씨니 하는 황후들 때문에 한때 정치가 어려웠으나, 8세기초에 즉위한 현종(재위 712~756년)의 노력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특히 문화의 황금시대를 맞이한 것도 이 때이다. 이 시대에 활약한 이백, 두보, 백거이 등은 당나라의 3대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현종이 미인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한 나머지 나라는 다시 어지러워졌다. 이러한 틈을 타서 절도사 안녹산과 사사명이 반란을 일으켰다(안사의 난). 안사의 난은 9년만에 겨우 진압되었으나 9세기 말엽에는 농민들이 황소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국력이 쇠약해진 당나라는 907년 절도사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4. 당의 문화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대제국을 건설한 당나라는 문화적으로도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당나라의 눈부신 대외 진출에 따라 동서교류는 크게 성황을 이루어 세계 각국의 문물이 중국에 전해졌다. 그리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가 중국문화를 중심으로 융합되어 국제성을 띤 다양한 문화가 꽃피었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하여 크리스트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 아라비아의 이슬람교 등의 종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도 이 시대이다. 당대에는 특히 불교가 융성하여 불교를 통한 문화교류가 활발하여 서역에서 많은 승려가 당으로 들어오고 당의 승려들이 인도에 유학하였다. 중국 고유의 종교인 도교도 남북조시대에 이어 크게 번성하였으나 불교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당나라는 중국 귀족사회의 최후를 장식한 번영기여서 문화도 귀족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당 문화의 귀족적 성격이 특히 잘 나타나 있는 분야는 문학과 미술이다. 이 시대에는 이백, 두보, 백거이 등의 대시인이 활약하여 중국 문학사를 빛내는 명시들을 남겼으며, 산문에서는 한유, 유종원 등이 활약하였다. 한편, 그림과 글씨도 크게 발전하여 많은 대가들이 나왔다. 인물화에는 염입본, 산수화에는 왕유, 오도현 등이 뛰어났으며, 글씨에는 구양순, 안진경등이 우수하였다.
5.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
당나라의 제3대 고종(高宗)의 황후. 산시성(山西省) 출생. 당나라 창업에 공헌한 무확의 딸. 일설에는 630년에 출생하였다고도 한다. 뛰어난 미모로 14세 때 태종(太宗)의 후궁이 되었으나 황제가 죽자 비구니가 되었는데 고종의 눈에 띄게 되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 후 간계를 써서 황후 왕씨(王氏)를 모함하여 쫓아내고 655년 스스로 황후가 되었다. 수년 후 고종의 건강을 핑계삼아 스스로 정무를 맡아보며 독재권력을 휘둘렀으며, 문예와 이무(吏務)에 뛰어난 신흥관리를 등용하여 세력을 구축하고 구 귀족층을 배척하였다. 683년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中宗)·예종(睿宗)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그녀에게 반항하여 난을 일으킨 이경업(李敬業)과 당나라의 황족 등을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사(御史)와 밀사를 이용하여 대규모의 탄압을 자행하는 한편, 불경을 위조하고 부서(符瑞)를 날조하여 무씨(武氏)의 천하를 합리화시켰다. 690년 국호를 주(周)로 개칭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중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약 15년간 전국을 지배하였다. 주나라의 전통을 따라 역법(曆法)·관명(官名)을 새로 정하는 한편, 북문학사(北門學士)들에게 명하여 《신궤(臣軌)》《백료신계(百寮新誡)》등을 찬(撰)하게 하였고, 각지에 특사를 파견하여 인재를 모았다. 또 인심을 얻기 위하여 관작(官爵)을 마구 뿌렸으며, 명당(明堂)·천당(天堂)·천추(天樞)·대불(大佛)과 같은 대건축물을 세워 국위선양에 힘썼다. 적인걸(狄仁傑)·위원충(魏元忠) 등의 명신을 적절하게 등용시켰으나, 말기에는 장역지(張易之) 형제 등 총신들이 정사를 그르쳤고, 705년 장간지(張柬之) 등이 정변을 일으켜 중종이 복위되고 당왕조가 부흥하였다. 얼마 후 측천무후는 병사하였는데, 그녀는 악랄한 책략과 잔인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요승(妖僧) 회의(懷義) 및 장역지 형제와의 추문을 남기는 등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6. 玄宗과 양귀비
당(唐)나라의 현종, 그는 28세에 황제에 즉위하여 나라를 크게 융성시킨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의 통치기간 전반을 '개원의 치'라고 하여 태종 때의 '정관의 치'와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나라를 통치한 지 25년째 되던 해 그의 부인 무혜비가 죽고 난 후 정치를 거의 팽개치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 세월을 보내는 나약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기를 3년, 황제는 온천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한 여인의 고운 모습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그 여인은 자신의 며느리인 황태자(皇太子)의 비(妃)였다. 황태자비 양옥란이라는 여인은 명문집안의 출신은 아니었지만, 살이 희고 통통한 당시의 전형적인 미인(美人)이었을 뿐 아니라 머리가 뛰어나고 춤과 노래도 무척 잘하였다. 이 미모와 총명함이 황태자의 눈에 들어 황태자비가 되는 행운을 잡았지만 이제 56세인 아버지 황제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계략을 써서 현종은 기어이 그녀를 차지하였다. 게다가 그녀를 귀비(貴妃)로 불러 황후와 똑같이 대접하였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 양귀비는 자기의 친척인 양씨들을 높은 관직으로 등용하였다. 이 당시 양귀비에게 접근한 이들 가운데는 안록산이라는 자도 있었는데 이는 현종의 눈에도 들어 절도사의 신분을 얻기까지 하였다. 현종이 믿었던 안록산이 뒷날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그 동안 양귀비와 그의 횡포를 원망하던 신하들은 양귀비를 죽이라고 아우성을 쳤다. 늙은 황제 현종은 사랑하는 양귀비를 그들의 손에 내어 주고 결국 양귀비는 38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현종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흘렸던 눈물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7. 黃巢(황소)의 亂
당나라 말기 희종(僖宗)의 시기에 지방 번진(藩鎭)의 세력이 늘어나고 중앙관리의 당쟁과 환관의 횡포가 겹쳐서 지배력이 흔들리고 인민에 대한 수탈도 강화되어 토호나 상인층도 반왕조의 경향으로 돌아서 저장(절강:浙江)의 구보의 반란(859~860)과 쉬저우(徐州)의 군인 방훈(龐勛)의 반란(868~869)이 발발하였다. 건부연간(乾符年間;875~884)에는 전국에 기근이 내습하여 사회적 불안은 절정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하에서 소금의 암상인으로서 반체제적 활동을 해오던 산둥(山東)의 왕선지(王仙芝)·황소(黃巢) 등이 난을 일으켰다. 왕선지가 죽은 후 황소는 그 잔당들을 모아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자와 종래 부하였던 자들을 핵심으로 하여 파산 농민이나 유랑의 무리, 반사회적인 분자들도 끌어넣어 약탈활동을 하며 허난(河南)·산둥 및 장시(江西)·푸젠(福建)·광둥(廣東)·광시(廣西)·후난(湖南)·후베이(湖北)로 대이동을 전개하여 880년에는 뤄양(洛陽)·창안(長安) 등을 함락하자, 희종은 쓰촨(四川)으로 망명하였다. 황소는 장안에 스스로 정권을 세우고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 부르고 항복한 관리도 기용하여 통치를 굳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관중(關中)의 정권은 경제적 기반이 없어서 당나라 왕조를 돕는 투르크계 이극용(李克用) 등 토벌군에게 격파되어 3년 후에는 장안으로부터 동방으로 퇴각하여 이듬해 산둥의 타이산(泰山) 부근에서 자결하였다. 이 난은 당나라의 붕괴를 가져온 근본적인 계기가 되었다.
8. 당삼채(唐三彩)
중국 당(唐)나라 전기(7세기 말~8세기 초)에 만들어진 백색바탕에 녹색(綠色)·갈색(褐色)·남색(藍色) 등의 유약으로 여러 무늬를 묘사한 도기. 대체로 백색·녹색·갈색의 3색으로 배합된 것이 많아 삼채라는 이름이 붙었다. 8세기 초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현재의 西安)과 뤄양(낙양:洛陽) 부근에서 가장 많이 제작된 것으로서, 당시의 귀족들간에는 후장(厚葬)의 풍습이 유행하여 묘의 부장품(副葬品)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유물이 19세기 말 뤄양 부근의 철도공사 때 대량으로 출토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재료는 약간 붉은 색이 감도는 백토(白土)를 사용하였으며, 투명한 백색 유약과 녹색·갈색·황색·남색 등의 유약으로 여러 문양을 표현하였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크고 작은 남녀의 인물상이나 묘지의 수호신으로 말·낙타·사자·개 등의 동물 및 당나라 특유의 형태인 항아리·병·쟁반 등의 기물이 있으며, 이것들은 당나라 귀족들의 취미·풍속 등을 잘 보여준다. 특히, 서방의 양식과 이란 풍의 문양 등이 보이는 것이 주목된다. 당삼채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대체로 한(漢)나라에서 근원을 찾고 있고, 그 문양이나 색채의 조합으로 보아 이란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본다. 발해나 요(遼)나라의 삼채 및 송나라·금나라의 삼채, 일본의 나라(奈良)삼채, 모두 당삼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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