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소리는 천지간에 울리므로 들을 수 없고 - 성덕대왕 신종
⑴
국립경주박물관 정문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에밀레종이다.
본 이름은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고, 봉덕사 종(奉德寺鐘)이라고도 부르는데, 별명이 에밀레종이다. 신라 35대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대왕을 위하여 큰 종을 만들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그의 아들 혜공왕(36대)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서기 771년 음력 12월 14일에 이 종을 완성한 것이다.
성덕왕이 태자로 삼았던 큰 아들이 죽으매, 다시 둘째 아들로 태자를 삼아 대를 이었으니 34대 효성왕이다. 효성왕은 아버지를 위해 절을 지었는데 봉덕사였다. 효성왕이 아들없이 죽자, 동생 헌영을 태자로 삼아 위를 잇게 하였으니, 바로 경덕왕이다. 경덕왕은 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봉덕사에 종을 만들어 달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아들 혜공왕이 종을 완성해 숙부가 세운 절에 달으니, 그로 말미암아 봉덕사 종이라 일컬은 것이다.
이 봉덕사가 북천 가에 있었는데, 언젠가 큰물이 져서 절은 떠내려가고, 무거운 종만 절터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이 경주 남산인 금오산에 7년간(1465∼71) 있을 때에 지은 「봉덕사 종」이라는 제목에,
…절 무너져 돌 자갈에 묻히게 되니,
종 홀로 황량하게 버려졌었네.
주나라 돌북과 흡사하게도 생겨,
아이들은 두들기고 소는 뿔을 비볐다네.
이곳 부윤 김담(金淡)이 정사는 공평하고 소송은 없어,
여유로운 마음으로 영묘사 곁에다 걸어놓아 두었네….
라고 읊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당시 경주 부윤인 김담이 세조 6년(1460)에 위와 같은 사연으로 영묘사에 옮겨 달아놓고 군사들을 모을 때 이 종을 쳤다고 했고, 『동경잡기』에 따르면 중종 원년(1506)에 부윤 예춘년(芮椿年)이 부(府)의 남문 밖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짓고, 봉덕사 종을 매달아 성문을 여닫을 때와 정오를 알리는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데 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 때인 1915년 경주고적보존회의 이름으로 이 종을 당시 경주부 관아 자리에 옮겼으니 60년 간이나 머무른 경주시 동부동 구 박물관(오늘날의 경주문화원)이었다.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되면서 새로 인왕동에다가 신축 건물을 지어 옮겼는데, 그때 1975년 5월 27일 지금 장소로 옮겨온 것이다.
기구한 운명이랄까? 무거운 몸체를 네 번이나 옮기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러는 동안 몸에 상처가 생기지 않을 수가 있나?
그러나 원래 튼튼하게 만든 종인지라 종 입 쪽에 굵고 둥근 나무 막대기를 깔고, 밀고 당겨 운반하는 데는 손상되지 않았지만, 인위적으로 훼손시키는데는 어쩔 수 없었다.
비천상 아래에 패어진 홈 자국이 그 좋은 예다.
성덕대왕 신종은 소리의 맥놀이로 말미암아 듣는 이에게 애처럽고 간절한 느낌을 주는지라 “봉덕이라는 아이를 종 만들 때 집어넣었다”는 전설이 생겼다. 그 전설을 믿는 사람 가운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은, 무지한 탓에 비천(飛天)을 봉덕이의 형상이라 잘못 알고, 그 봉덕이가 꿇어앉은 아래쪽의 쇠를 갉아 삶아 먹으면 아기를 밴다고 믿고, 일구월심 여물디 여문 청동 벽을 열심히 문질러 쇳가루를 긁어 갔던 것이다.
지금이야 그렇게 믿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할 사람도 없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니, 굵은 것은 연필 하나가 들어갈 만치 홈이 패였다. 그 옆에도 길다란 홈을 판 흉터가 여남은 군데 남아있다.
75년 동부동 구 박물관에 있을 때는 직원이라야 두 세 사람 밖에 되지 않아 종을 지키는 데만 눈 돌릴 새가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육십 여명의 직원들이 수시로 번갈아 가며 돌아보기 때문에 종을 보호하는 데는 안심해도 좋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보호 대책이 잘못되었다.
인왕동에 새 종각을 지으면서 종이 잘 보이게 하는 데만 중점을 둬 종각 위치를 잡았을 뿐 아니라, 허허벌판에 철근 콘크리트 기둥 4개만 세우고 지붕을 얹은 보호각 속에 종을 매달았으니, 사방에서 몰아치는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종 수명에 지장을 초래한 것이다. 그래서 박물관 측에서는 여러 차례 새로운 보존 방법을 건의했지만, 관심 부족과 예산 문제로 차일 피일 미루어 왔다.
그러나 꾸준한 노력은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내년 초까지 30억 원의 예산으로 설계를 마쳐, 99년까지 200억 원의 돈을 들여 신관을 짓기로 되어 있는데, 그 건물에 1백 평 규모의 새 종각도 곁들여 짓는다고 한다. 그 때를 대비하여 철저하고 완전한 보존을 위한 자료를 얻어내기 위해, 지금 종합 진단을 실시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으로 치면 혈압 재기, 심전도 검사, 간 검사 등을 실시하듯이 여러 가지로 검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쇠붙이인 청동도 영원할 수는 없다. 자연적으로 노쇠하여 생명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인위적인 훼손은 막아야 한다.
사람도 나이 들면 기력이 떨어지고 신체 오장 육부 기능이 저하되듯이, 이 종도 차츰차츰 생명이 줄어들고 있지만 최대한 그 생명을 연장시켜야 한다.
전문가들의 다각적인 조사를 토대로 성덕대왕신종을 오래오래 보존하도록 우리 모두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야 할 것이다.
⑵
성덕대왕신종 몸체에는 하늘이 사람 모습으로 내려와 찬미하는 비천(飛天)이 2쌍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마주 보고 있는 1쌍의 복판에는 종명(鐘銘)이 새겨져있고, 다른 1쌍 중간에는 찬미하는 가사가 새겨져 있다. 종명이란 종을 만든 내력을 새긴 것으로, 어려운 한자로 적혀 있어 알아보기가 힘든 것을 경주박물관회 김원주 회장과 신라문화동인회 윤경렬 명예회장이 깊이 연구해 쉽게 번역한 것을 옮겨 적는다.
'조산대부 겸 태자 조의랑 한림랑 김필해는 임금님의 명을 받들어 이에 종명을 짓습니다.
지극히 완전한 진리는 온 누리의 밖을 싸고 있으므로 보려 하여도 볼 수 없는 것이고, 참된 진리의 소리는 천지간에 울리므로 들으려 하여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진리의 근원을 우리 중생들도 보고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 모양과 소리를 비유하여 방편으로 신종을 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는 길에는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 등 3가지 수레가 있다하지만,이 신종의 소리는 한 번 들으면 곧바로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 신비의 둥근 소리 일승원음(一乘圓音)인 것입니다. 무릇 종이란 부처님이 나신 인도에서 살펴보면 카니시카 왕(계이왕) 때에 시작되었고, 중국에서는 고연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합니다. 안이 비어 있어 그 울림은 무한하고, 몸체는 무거워서 굴릴 수도 없고, 감아 올릴 수도 없으니, 형상에 있어서나 소리에 있어서나 지극히 영원한 것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신종 위에 삼가 임금님의 높으신 뜻을 새기옵니다. 임금님의 뜻을 이곳에 새기옴은 백성들이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서 복을 받게 하려는 소원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면 성덕대왕의 크신 덕은 산보다 높으시고 물보다도 더 깊으시어 그 이름은 해와 달처럼 하늘 높게 빛나옵니다.
어질고 충성스러운 사람을 불러 신하로 쓰시고 예와 악을 높여 나라를 다스리시니 들에서는 백성들이 근본이 되는 농사에 힘을 쓰게 되고 저자에는 도둑 물건과 속여 파는 물건이 없게 되었습니다.
또 백성들은 돈을 많이 모아 사치와 허영에 사는 것을 싫어하고., 글 잘하고 덕이 높은 것을 부러워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내 몸의 영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늙어가며 생겨나는 노욕을 경계하시면서 40여 년간 나라 다스리는 동안 한 번도 전쟁으로써 백성들을 놀라게 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에 사방의 이웃 나라들과, 멀리 만리 밖에서 온 사신들이 모두 공경하고 부러워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남의 나라에 화살을 겨누어 침략하고자 하신 일도 없으시니 중국의 연 나라가 진나라에서 낙의나 고리해같은 사람을 써서 남의 나라를 괴롭힌 일이나, 제나라나 진나라에서 남의 나라를 무찌르고 패권을 잡은 일들과 어찌 나란히 굴러가는 수레바퀴처럼 비교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라쌍수 아래 인생의 지난 날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대왕님의 춘추도 빨리 흘러 세상을 떠나신 지도 어느덧 34년이 지났습니다.
위를 이으신 경덕대왕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아버님의 뜻을 이어받으시어 정치를 보살피시면서도 불행하게 일찍 돌아가신 어머님을 정성껏 모시지 못한 안타까움과, 거듭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께 충성을 다하지 못한 슬픔에 대궐에 드시어도 눈물로 정사를 살피시었습니다. 조상님을 그리는 정과 부모님을 그리는 정이 한데 뭉쳐 큰 종을 짓고자 구리 12만 근을 들여 정성을 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이제 새로 위에 오르신 우리 임금(혜공왕)께서는 선대 대왕님들의 뜻을 이어 받으시고 어지신 덕으로 나라를 보살피시니 성서로운 빛은 옛보다 더욱 나라 안에 빛나옵니다.
아름다운 덕은 서울 장안에 넘쳐 임금님의 뜰 안에 구슬 진주를 뿌린 듯 찬란하옵고 임금님의 말씀은 나라 안에 우뢰와 같이 퍼지니 나라에 생명을 타고난 초목들까지 은혜를 입어 나라 지경에 과실나무가 주렁주렁 풍성하옵니다.
서울 장안에 서기가 어려 영롱하오니, 이는 임금님께서 왕자로 탄생하신 책임을 다하시어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옵고, 왕위에 오르신 책임을 다하여 선대 여러 조상님들 뜻에 보답하시는 길이옵니다.
우러러 생각하오면 태후께서는 땅이 평평한 것처럼 성품이 고요하시어 백성들을 어질게 보살피시고 하늘 거울과 같이 밝으신 마음으로 부자간에 있어 효도하시기를 권하시었습니다.
친정의 어진 혈통을 받으신 태후께서는 간신들을 멀리하시고 충신들을 가까이하시어, 옳은 말과 거짓말을 가려서 바르게 일하셨습니다. 이에 경덕대왕의 유언을 지키셔서 오랜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유사에게 공사를 명령하시고 공장이를 시켜서 그림을 새기시니 해는 신해년 (771)이오, 달은 섣달입니다. 이때 해와 달은 빛을 더해 주셨고 음과 양이 조화되어 바람은 자고 날씨는 고요하였습니다. 신의 도움으로 신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생김새는 뫼 뿌리와 같고 그 소리는 용이 우는 소리와 같아서 위로는 산마루 하늘까지 울려 퍼지고 밑으로는 지옥을 지나 끝간 데를 알지 못합니다. 보는 이는 기이함을 칭송하고 듣는 이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원하옵니다. 이 묘한 인연으로서 성덕대왕의 높으신 영(靈)을 받들어 이 맑은 울림을 들으시게 하옵고 설명없는 법 자리에 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과거와 현세의 인연을 확실하게 알아 일승진경(一乘眞境)에 계시게 하여 주시옵소서.
구슬 떨기와 같은 임금님의 후손들도 금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보배 열매와 같이 풍성하게 길이길이 번영케 하여 주시옵소서.
나라 울타리는 쇠울처럼 굳건하여 나라에 생명을 타고난 사람들과 축생들에 이르기까지도 바다에 이는 물결과 같이 고르게 깨달음의 길에 올라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하 해(奚)는 배운 것이 없고 재주도 없습니다마는 임금님의 분부이신 까닭에 용기를 내어 반초의 붓을 빌리고 육좌의 말을 빌어, 그 원하시는 뜻을 적어 종 위에 새겼습니다.'
한림대 서생 대나마 김○○씀
⑶
앞에서 종명을 소개한 데 이어 이번에는 윤경렬·김원주 선생이 같이 번역한 가사인 기사(其詞)를 소개한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걸려있고 별들이 가득 차 반짝이는데
땅에는 방향마다 길이 열려 사방이 트여 있네.
산들은 땅을 눌러 드높게 솟아있고
강물은 갈래갈래로 퍼져 흐르니
벌려진 지역들은 지경이 분명하구나.
동해 위에 떠있다는 신선들의 나라도
땅 위에 숨어있다는 무릉도원도
해뜨는 나라 부상(扶桑)까지도
이제 우리 나라와 이웃하였네.
흩어진 세 나라가 하나로 합쳤으니
역대 임금님들의 성덕은
대를 이으며 더욱 새로워졌네.
묘하고 맑은 다스림은 멀리까지 빛나고
커신 은혜 만물 위에 비 뿌리듯 고르게 입히시니
무성한 천대 자손들 길이길이 웃음짓누나.
근심 구름이 하늘을 가려 문득 슬프니
밝은 해는 빛을 거두고 따스한 봄은 가 버리더라
다스리는 그 풍습 예와 다름없으니
임금이 바뀐들 성스러운 그 풍속이야 어찌 어기리오.
날마다 아버님의 엄훈을 생각하옵고
항상 어머님의 커신 사랑 그리워함에
또다시 부모님 명복을 위해 하늘 종에 비옵니다.
거룩하시어라 우리 태후시여
그 성덕 감응하심이 가볍지 않아
보배로운 상서가 자주 비치고
성서로운 보람이 매양 일더라.
임금이 어지시니 하늘이 도우시고
때가 태평하니 나라가 평안하더라.
선대를 사모하는 꾸준한 그 정성
그 마음 좇아서 소원이 이루어졌네.
남기시고 가신 말씀 돌보아 종 만들기 시작하니
신령이 도우고 사람들이 힘을 모아
보배그릇 모양이 이루어졌네.
능히 마귀들의 항복을 받고 어룡(魚龍)을 얻으리로다.
그 위엄은 누리의 북쪽 끝 북극에까지 울려 퍼지네.
듣는 이 보는 이 모두 부처님과 한 마음되니
꽃다운 인연을 바르게 심어 놓았네.
둥글고 빈 몸은 바야흐로 부처님 몸이시라
크나 큰 복 누리에 변치 말고 길이길이
무궁토록 이어져가게 하시옵소서.'
한림랑 급찬 김필해 봉조찬(翰林郞 級飡 金弼奚 奉詔撰)
대조 대나마 요단서(待詔 大奈麻 姚湍書)
검교사 병부령 겸 전중령 사어부령 수성부령감 사천왕사부령
배검교 진지대왕사사 상상 대각간 신 김옹
검교사 숙정대령 겸 수성부령 검교 감은사사 각간 신 김양상
대력 6년 세차 신해 12월 14일
부사 집사부 시랑 아찬 김체신
판관 우사록관 □ 급찬 김□득
판관 급찬 김충봉
판관 대나마 김□□
녹사 나마 김일진
녹사 나마 김□□
녹사 대사 김□□
주종대박사 대나마 박□□
차박사 나마 박□□
나마 박한미
대사 박□□
( □로 나타낸 것은 잘 읽을 수 없는 글자임)
이 글로 보아 신라 17관등의 제1위 각간보다 위인 특별 관위 대각간 김옹이 총책임을 맡았다가 그 뒤 각간 김양상이 이어 맡아 신해년(서기 771년으로 혜공왕 7년) 섣달 열나흗날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직접 종을 만든 기술자들은 박씨들 집단이고 행정 업무를 맡은 사람들은 김씨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종의 가치를 더해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박한미를 비롯한 기술자들의 명단과 주종대박사, 차박사 등의 직책을 기록한 것이다. 그 분들이 계셨기에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을 지닌 민족이 되었고, 또한 경주는 이 성덕대왕신종이 있는 곳이기에 뭇 사람들이 동경하는 신라 문화 역사 도시인 것이다.
1997년은 정부에서 문화 유산의 해로 정했다. 정부에서 해야 될 일도 많지만 우리 경주 시민은 이 기회에 신라 문화 유산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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