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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푸념

지식창고지기 2009. 7. 12. 14:41

아름다운 푸념


- 정철의 <속미인곡>

 ● 한 여자가 버림을 받았다면

여기 한 여자가 남자에게 버림받았다고 치자. 이 여자는 어떤 방법으로 그 아픔을 이겨낼까? 우선 그 남자를 찾아가 애걸복걸하는 방법이 있겠고, 아예 체념하는 방법도 있겠으며, 때로는 욕을 퍼부으며 스스로의 마음을 달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남자를 잊고 다른 남자를 사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지금처럼 연애도 사랑도 자유로운 시대에는 실연의 상처를 잊는 방법도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결정에 달렸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절이 아니라 남존여비와 여필종부를 무슨 대단한 진리처럼 여기며 살던 시절에는 그런 자유로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예상되는, 또는 기대되는 반응이 있다면 딱 한 가지. 남자가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그것을 모두 제 탓으로 돌리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당시 일반적인 여성들이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눈물을 흘려 가며 호소하는 읍소 작전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사람의 마음이 꼭 그럴 수만 있으랴! 윤리가 어떻고 도리가 어떻든 간에 속상하면 터뜨리고, 화가 나면 누구를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해야 시원해지는 법. 이 같은 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송강 정철이 지은 <속미인곡>이다. <속미인곡>은 정철이 임금(선조)에게 버림받아 유배를 갔을 때 지은 가사로, 버림받은 여자의 심정으로 임(美人-여기서는 임금)을 그리고 있는 노래이다.

 

● 아직 변하지 않은 마음

실연 당한 사람의 넋두리를 들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세상에 그 많은 하소연 중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남녀 관계여서, 말도 안 되는 사연과 말도 안 되는 이유들로 가득 찬 것이 실연 스토리가 아니던가. 그러다 보면 이런 넋두리는 직설적인 한탄과 비난으로 점철되기 일쑤인데, 정철은 그런 범상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여인1) 저기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하구나
임금이 계시는 대궐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가 다 저문 날에 누구를 만나러 가시는고?
(여인2) 아, 너로구나. 내 사정 이야기를 들어보오.

작품은 처음부터 상당히 충격적으로 진행된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이 다음부터 나오는데도 작가는 웬일인지 먼저 두 여인이 만나는 장면을 설정해 놓고 있다. 또 여인1과 여인2가 엇갈리면서 말을 주고받은 대화체 형식을 사용한 것도 특이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한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넋두리를 해대는 방식으로 대화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즉 여인1 부분은 말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이고, 여인2 부분은 거기에 따라 털어놓은 신세타령이며 푸념이다. 우선 이런 대화 장치를 활용하여, 자기를 버린 상대에 대한 직설적인 호소가 되지 않게 배려한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아무리 상대가 자기를 버렸다 해도 감히 그 고귀한 상대에게 대놓고 불만을 직접 털어놓을 수 없음을 내비치는 셈이다.
실제로 여인2가 말하는 내용 역시,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일편단심으로 집약된다. 아직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하루빨리 당신 계신 곳으로 다시 가고 싶다는 절절한 호소인 것이다.

 

● 자책과 체념,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내 얼굴과 이 나의 태도가 임께서 사랑함직한가마는
어쩐지 나를 보시고 너로구나 하고 특별히 여기시기에
나도 임을 믿어 딴 생각이 전혀 없어
응석과 아양을 부리며 지나치게 굴었던지
반기시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려 보니
내 몸 지은 죄가 산같이 쌓였으니
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을 탓하랴.
서러워서 여러가지 일을 풀어내어 헤아려보니 조물주의 탓이로다.

첫 부분부터 상당한 겸손을 내보이고 있다. 자신의 주제는 임이 사랑할 만큼 되지 못하는데도 황송하게 임의 은혜를 입었다고 했다. 그런에 임이 변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이 지나치게 아양 떨고 교태를 부린 탓이니 자기 죄가 산처첢 쌓였다며 반성하고 있다.
이 점에서만 본다면 이 가사는 참으로 하찮은 작품이다. 남자의 잘못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여자 탓이라는 식의 논법으로, 임금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유배온 신하만이 잘못이라는 억압적인 상하 관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용부의 맨 마지막 한 줄은 그런 상투성을 깨끗이 씻어내 버린다.

"셜워 플텨 혜니 조믈의 타시로다"로 막음하여, 임의 탓도 자기 탓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팔자 소관으로 돌려보려는 소극적인 자세이지만, 어느 한편의 결정적인 잘못이 없는 이별임을 힘주어 강조하여 재회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체념한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재회를 희망하는 데에 이 작품의 맛과 멋이 있다. 이 인용부에 뒤이어 나오는 다른 여인의 목소리 "글란 생각 마오. 매친 일이 이셔이다"는 그런 정황을 뒷받침해 준다. 한 여인의 푸념을 듣던 또다른 여인이 지나친 자책과 체념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해 주는 것으로 균형을 잡아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균형은 이별사가 빠지기 쉬운 애상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면서 작품의 격을 높여준다.

 

● 구즌 비나 되쇼셔

그러나 이쯤에서 그런 정도의 내용이라면 속으로 삭히는 여인네의 목소리일 뿐이니 무엇이 대단하냐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겠다. 사실 뜻하지 않은 이별을 당하면 누구나 복잡한 심경이 들게 마련이다. 우선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상대의 처사를 원망하고, 운명의 사슬에 통탄하는 등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같은 생각을 단순히 그냥 늘어놓는 데만 그친다면 작품으로서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의 화자가 두 명으로 설정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마음 한쪽으로는 반성을 하면서 또다른 한쪽으로는 상대의 야속함에 원망이라도 하고 싶을 때, 그것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 시적 기교이고 재주가 아니겠는가. 정철이 택한 방법은 바로 그 두 여인의 입을 빌어 양갈래로 터진 자신의 심경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여인2) 임 계신 곳의 소식을 어떻게 해서라도 알려고 하니
오늘도 거의 저물었구나. 내일이나 임의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있을까?
내 마음 둘 곳이 없다. 어디로 가자는 말인가?
차라리 사라져서 지는 달이나 되어서
임이 계신 창문 앞에 환하게 비치리라.
(여인1) 각시님, 달은커녕 궂은 비나 되십시오.

주된 화자로 설정된 여인2는 지금 어쩔 줄 모르고 있다. 혹시라도 소식을 알아볼까 하여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알 방법이 전혀 없다. 산에 올라가면 구름이 가리고 물에 가면 풍랑이 거세다. 밤에 빈방으로 돌아오면 외로움만 더하며, 꿈에 뵌 임은 더욱더 늙어버렸다. 그러니 이렇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달이 되어서 그 달빛으로 임 계신 창 앞에 환하게 비쳐주는 것이 낫겠다는 가상한 생각을 품는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가상한 생각이기는 하나 정직한 속내는 아니다. 달빛은 임을 비추어 줄 수는 있지만 너무 미미하지 않은가. 하다못해 태양빛 정도는 되어야지 임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더욱이 빛이 되어 비춘들 잊었던 나를 임이 다시 사랑해준다는 보장이 있을까?
바로 그런 의문이 드는 순간 여인1이 끼여들어, 달이 될 것이 아니라 궂은 비가 될 것을 권한다. 이 때의 비는 참으로 여러거자 의미를 함축한다. 우선 궂은 비는 슬픈 눈물을 뜻한다. 궂은 비에는 슬픈 눈물이라도 전하고 싶은 작자의 서글픈 심정이 나타나 있다. 또 비는 촉각 이미지여서 시각 이미지인 달빛보다는 훨씬 더 직접적이다. 이것은 임과 직접 부딪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된다. 사실 비가 되어 내린다는 표현은 옛날 중국의 어느 고사에서 비롯되어 육체적 접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궂은 비에는 '마음껏 퍼붓는', 즉 제 속마음을 임에게 마구 내쏟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다. 이것은 주인공격의 화자가 아닌 다른 화자의 입을 통해, 내 생각은 아니지만을 전제로 하면서, 사실은 제 속을 보란 듯이 털어놓는 것이다.

 

● 우리말 구사의 최고봉

이 작품의 미덕은 그 밖에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은 아마도 뛰어난 우리말 구사 솜씨가 아닐까 한다. 이 작품이 만들어질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이 정도 수준의 우리말을 구사하는 솜씨를 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시험 삼아 이 작품을 한번 쭉 읽어보면 알겠지만, 고전 작품으로는 드물게 한자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또 그나마 사용된 한자어 역시 일상 생활에 흔히 쓰이는 것들이어서 난삽한 고사들로 도배된 다른 작품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우선 눈에 보이는 어휘만 하더라도, 괴얌(사랑), 군뜻(딴 생각), 이래(아양), 어둥졍(어수선하게), 바라 나니(연달아 나니), 오뎐된(방정맞은) 등 아름다운 우리말 어휘가 환상적으로 널려 있다.
그뿐인가. 어휘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을 터, 작품 곳곳이 그런 우리말을 십분 활용한 아름다운 비유들로 가득 차 있다.
구롬은카니와 안개는 므사 일고
처럼 구름과 안개로 간신들이 횡행하는 어지러운 조정을 비유하기도 하고, 임 걱정에 잠 못 자는 상황을 '풋잠'으로 대신하며, 자신의 외로움은 '어엿븐 그리배 날 조찰 뿐이로다'로 펴현한다.
게다가 두 여인이 대화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실제 대화를 방불케 하는 구어체가 자유롭게 구사된 점 역시 예사로 넘길 수 없다.
'눌을 보라 가시는고' , '내 사설 들어보오', '글란 생각 마오' 등은 한 화자의 일방적 진술에 의지하는 여느 시가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말투라 하겠다.

- 이강엽, 고교 독서평설(통권 104호)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