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편의만 따진다면 남해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놓은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육지와 연결되어 있고, 최근에는 3개의 섬을 통과하는 각각 다른 공법을 적용하여 5개의 교량으로 연결된 창선·삼천포대교가 남해 창선도와 육지를 잇고 있기 때문이다. 창선·삼천포대교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이라는 천혜의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교량 건설로 지난해에는 건설교통부로 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선정되어 대상을 수상했다. 육지와 통하는 다리가 하나 더 놓였으니 남해로 가는 길도 빨라지고 편리해졌다.
호구산(虎丘山, 626m)은 남해군에서 지정한 군립공원으로 산세가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원산(猿山)또는 납산이라 불리었는데 이 이름 또한 산의 모습에서 얻은 이름 같다. 북쪽인 남해읍에서 바라보게 되는 우뚝 솟은 정상부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호구산을 안내하는 이정표에도 옛 이름을 살려 원산으로 안내하고 있는 곳이 많다. #앵강재서 시작한 산행
호구산 정상에는 최근에 복원한 봉수대가 있고 산 남쪽 기슭에는 유서 깊은 사찰 용문사가 터를 잡고 있다. 용문사는 신라 애장왕 3년에 창건한 절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61년(현종2년) 인근에 있던 보광사를 옮겨 중창하였다고 한다. 숙종 때는 나라를 지키는 수국사로 지정되어 왕실의 축원당으로 삼았다. 유서 깊은 사찰인 용문사에는 보물 제1446호로 지정된 ‘남해용문사괘불탱’과 경상남도에서 지정한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호구산을 오르는 보통 사람들은 용문사에서 시작하고 마치는 회기산행을 선호한다. 야생초산행은 산행거리가 다소 먼 앵강재에서 시작하여 긴 능선을 타고 정상에 올랐다가 용문사로 하산하여 임도를 따라 제자리로 돌아오는 회기산행을 했다. 등산 시작지점인 앵강재에는 원산이라 표시된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등산로는 편백나무 숲속으로 이어진다. [img1] #장사도 ‘댕댕이덩굴’에 넘어져
온화한 기후 탓일까? 숲속에는 마삭줄과 사스레피나무, 줄사철 등 늘푸른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다. 특히 사스레피나무는 까만 열매와 자라고 있는 꽃봉오리를 함께 매달고 있는 것이 신비롭다. 소나무를 감고 오르는 마삭줄보다 잎이 크고 대형인 백화등과 줄사철이 숲속을 뒤덮고 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숲속에서 이들과 어울려 지금은 잎이 지고 열매도 메말라 보기 힘든 ‘댕댕이덩굴’이 소나무 밑둥치에서 떨고 있다. 노랗게 물든 엽 맥이 뚜렷한 심장모양의 잎이 그림 같다. ‘댕댕이덩굴’은 포도송이 같은 열매가 달리지만 포도와는 먼 방기과의 식물이다. 한방에서는 뿌리를 채취하여 약으로 쓰지만 열매를 먹지는 않는다. ‘항우장사도 댕댕이덩굴에 걸려 넘어진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질긴 줄기를 이용하여 바구니 등 생활도구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매달린 씨앗이 인상적인 ‘고본’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은 산길이 더 없이 상쾌한 등산로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라 길이 다져지지 않아 발길에 닫는 느낌 또한 부드럽다. 이런 등산로는 임도를 만날 때까지 계속된다. 앵강재에서 용문사 입구로 넘어가는 임도를 가로지르면 등산로는 경사를 더한다. 오래지 않아 숲은 사라지고 듬성듬성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는 바다를 훤히 내려다보고 걷는 전망 좋은 등산로가 계속된다. 길이 가팔라 손으로 바위를 붙잡고 올라야 하는 곳도 많다. 하지만 곳곳에 자리한 바위는 아름다운 앵강만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좋은 전망대다.
얼음이 얼고 서릿발이 솟으면서 야생초는 푸른빛을 잃고 벌써 사라졌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봄·여름·가을을 보내면서 맺은 결실인 씨앗이다. 특히 여러해살이풀인 ‘고본’의 마른줄기 끝에 매달린 씨앗이 인상적이다. 산형과 식물인 ‘고본’은 늦여름부터 초가을에 걸쳐 하얀 꽃이 우산모양으로 핀다. 꽃은 졌지만 편평한 타원형에 세 개의 능선이 선명한 열매만 보고도 구분이 가능하다.
경사가 급하고 바위를 짚고 올라야 하는 힘든 길이 기암괴석이 산재한 바위봉우리 아래로 다가선다. 어렵게 바위능선에 올라서면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벽이 남아있고 고개를 들면 앵강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앵강(鸚江)이라는 이름은 새소리도 들릴 정도로 강처럼 조용한 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였던 노도가 큰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파도를 막아 깊숙이 파고든 앵강만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호구산 정상 또한 저 멀리 우뚝 솟아 가장 높은 곳임을 알리고 있다.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 길옆으로 헐벗은 덩굴에 매달려있는 빨간 열매가 예쁘다. 줄기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어 때로는 성가시게 하는 ‘청미래덩굴’(맨 위 사진)의 열매다. 흔히 우리가 망개 또는 명감이라 부르는 것으로 잎에 떡을 싸서 찐 것을 망개떡이라 한다. 덜 익은 열매와 표면에 윤이 나는 두터운 잎을 씹어보면 떫고 신맛이 난다. 빨갛게 잘 익은 붉은 열매를 먹을 수 있어나 맛이 없어 식용으로 하지는 않는다. 백합과에 속하는 열매에 비하여 초여름에 피는 ‘청미래덩굴’의 꽃은 작고 보잘 것 없다. #시야 막힘없어 조망 뛰어난 정상
호구산 정상은 하나로 이루어진 큰 바위다. 우뚝한 암봉이라 시야에 막힘이 없어 조망이 뛰어나다. 남해바다는 물론이고 남해에 있는 유명산인 금산·망운산·설흘산을 둘러가며 볼 수 있는 곳이다.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고 납산이라 새겨놓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납은 원숭이를 뜻하는 옛말이다.
하산은 서쪽 송등산으로 향하다 용문사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등산로는 서어나무와 참나무가 숲을 이룬 곳이라 잎조차 털어버린 산은 텅 비어 공허한 정적이 감돈다. 다만 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만 흥겹다.
겨울 용문사는 옷을 벗어버린 나뭇가지 사이로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끼 낀 담장과 거목에 붙은 콩짜개덩굴이 용문사가 오래된 절임을 알리고 있다. 뒤편 언덕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차나무만 오직 푸르다. 경내를 둘러보고 용문사 명물 구유를 찾아보는 것도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용문사 입구 주차장을 지나면 왼쪽 산기슭으로 난 임도가 있다. 임도를 20여분을 따르면 삼거리에서 올랐던 길과 다시 만나게 되고 계속 진행하면 출발지인 앵강재에 이른다. 호구산 등산에 걸리는 시간은 4~5시간이면 충분하다. 일정이 바쁘다면 용문사에서 출발하여 되돌아오는 회기산행을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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