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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정찬효의 야생초 산행]"푸른 속잎 깨우는 생명 탄생 보고싶다"

지식창고지기 2009. 7. 13. 15:08

"푸른 속잎 깨우는 생명 탄생 보고싶다"
순천 조계산
 
 춥고 어두운 동굴 속 같은 겨울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어서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와 메마른 대지에 잠들어 있는 푸른 속잎을 깨우는 생명의 탄생을 보고 싶다. 아직도 봄은 먼 곳에 머무는 것인지 한 사흘 따뜻하여 봄인가 느낄 때쯤이면 매서운 북풍이 불어와 몸을 움츠리게 한다. 쇠를 담금질하듯 서서히 횟수와 길이가 짧아지며 부는 삭풍이 봄바람에 밀려나며 계절은 바뀐다. 겨울은 끝까지 인내를 시험하는 시련의 계절인가 보다.

 이즈음 산과 들로 나가보면 새 생명이 탄생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우리가 느끼는 날씨와 관계없이 천체의 운행에 시계를 맞춘 자연은 곧 다가올 봄을 준비하기 위하여 겨울잠에서 깨어난다. 매서운 꽃샘추위에 맞서 꽁꽁 언 대지를 뚫고 나온 여린 생명은 작지만 위대하다. 이때만 느낄 수 있는 시절의 기쁨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른 봄기운 쫓아 찾아간 ‘조계산’

 야생초산행은 철 이른 봄기운을 쫓아 조계산(曺溪山,884m)으로 향했다. 조계산은 호남정맥이 광양 백운산에서 마침표를 찍기 전 숨을 고르는 순천시에 솟아 있는 산이다. 산기슭에는 선·교 양종을 대표하는 송광사와 선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송광사는 신라 말에 창건된 절로 고려시대 보조국사가 중창하여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이다. 유서 깊은 송광사에는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보유하고 있어 보이는 것이 모두 문화재라 해도 좋다.

 이 산의 동쪽 기슭에는 태고총림 선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신라시대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로 이곳에도 수많은 보물을 비롯한 문화재가 있다. 절 입구 계곡에 걸쳐있는 승선교는 특히 유명하여 선암사를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송광사와 선암사는 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따로따로 방문하더라도 하루 일정이 모자랄 정도로 수많은 문화재와 자연경관이 빼어나 볼 것이 많은 곳이다.

 야생초산행은 승선교를 건너 강선루를 지나고 선암사를 왼쪽으로 돌아 부도 밭 앞으로 선암사골을 거슬러 작은골목재, 배바위를 거쳐 정상을 올랐다가 선암사로 되돌아오는 회기 산행을 했다.
 
 #언 땅 붙어 겨울나는 모습 신기해

 며칠 계속되는 꽃샘추위에 계곡이 꽁꽁 얼어붙었다. 힘차게 흘러내려야 할 계곡물도 얼음 속에 갇혀 모습이 사라졌다. 봄기운을 맡으러 나섰는데 얼음 갑옷을 뒤집어선 계곡을 보니 실망이 앞선다. 위안이 되는 것은 바람은 차갑더라도 헐벗은 숲이지만 어제와 다르게 푸른빛을 띠는 것 같다는 것이다.

 오름길 곳곳에는 눈이 녹고 돌 틈을 스며 나온 물기가 얼어 만들어진 빙판이 곳곳에 나타난다. 이런 곳에서 언 땅을 뚫고 나온 새 생명은 찾을 수 없으나 지난해 난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야생초는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난초과 식물인 보춘화와 ‘약난초’다. 조계산의 낮은 곳 숲 속에는 두 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 많다. 보춘화 보다는 귀한 ‘약난초’지만 댓잎을 닮은 푸른 잎을 달고 언 땅에 붙어 겨울을 나는 모습이 여간 신기하지 않다. 달걀 모양을 한 비늘줄기에 붙은 잎은 1~2장으로 겨울이 지나면 마르고 새로운 잎이 난다. 봄에 피는 꽃은 연한 자줏빛으로 총채처럼 한 쪽 방향으로 모여 피며 비비추처럼 밑을 향해 달린다. ‘약난초’의 생약 이름을 산자고라 부르는데 한방에서는 종기나 부스럼, 종양 등을 치료하는데 쓴다고 한다.

 식생이 다양한 조계산에는 희한한 모양을 한 나무들이 많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무가 있는가 하면 팔 근육을 내밀고 자랑하는 모습도 있다. 모두가 익살스런 자연의 모습이다. 이런 다양한 생태가 있어 산행을 즐겁게 해 준다.

 굴목재에 이르면 등산로가 나뉘어 진다. 배바위를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길과 보리밥집을 지나 송광굴목재에서 송광사로 바로 내려서거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쌍향수가 있는 천자암을 들렀다가 송광사로 갈 수도 있다.

 야생초산행은 배바위를 지나 정상인 장군봉으로 향했다. 간간이 쌓인 눈이 흩날리는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찬바람이 세차다. 한겨울 날씨라 헐벗은 나무 외에는 생명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장군봉 정상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순천만이 지척에 보일정도로 사방 조망이 빼어나다. 조계산 동쪽과 서쪽에는 상사호와 주암호가 각각 자리하고 있는 것이 남해바다가 내륙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것처럼 착각이 든다. 또한 가운데 계곡을 두고 조계산의 연봉들이 말발굽 모양을 하고 있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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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 뚫고 나와 피는 꽃 ‘복수초’

 하산은 흔적만 남은 절터에서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이고 대각암, 마애불 앞을 지나 선암사로 내려섰다. 하산 길에는 절터 부근까지만 빙판이 보일뿐 그 아래로는 얼었던 길이 녹아 다소 질펀한 흙길이다.

 남쪽사면인 이곳에는 푸른빛이 곳곳에 보인다. 그 중에는 꽃으로 따진다면 보잘것없는 ‘나도물통이’도 새싹을 내밀었다. 누가 알아주는 이 없는 하찮은 풀이지만 꽃보다 검붉은 새싹이 더 예쁜 ‘나도물통이’다.

 햇살이 풀리자 선암사 경내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경내를 돌아보고 처음 올랐던 길을 따라 부도 밭을 다시지나 남암으로 향했다. 남암으로 가는 길을 다시 찾은 이유는 이때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꽃을 보기 위해서다. 흔히들 얼음을 뚫고 나와 피는 꽃이라고 하여 ‘얼음새꽃’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복수초’다. ‘복수초’가 피었을 때 눈이라도 내리면 눈 속에 연꽃이 핀 것 같다하여 ‘설연(雪蓮)’이라 일컫기도 한다. 남암으로 가는 오솔길 주변에는 3월초가 되면 ‘복수초’가 군락을 이루며 핀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찾았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포기가 냇가 언덕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찾지 않고 하산 길에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복수초’는 햇빛을 받아야 꽃봉오리를 열기 때문이다. 등산을 시작할 무렵에는 산그늘에 햇볕이 가려 있었기 때문에 정오를 지난 하산시간에 찾았다. ‘복수초’는 저녁이면 꽃잎을 닫지만 아침에 햇살이 비치면 꽃잎을 활짝 열어 수분생물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꽃이 피는 시기가 기온이 낮아 수분생물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지만 ‘복수초’ 꽃에 앉기만 하면 오목거울 역할을 하는 꽃잎이 빛을 모아 덥혀주므로 꿀샘이 없는 꽃이지만 꽃가루로 배를 채우고 꽃가루받이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얼음을 뚫고 나와야 할 만큼 서둘러 꽃이 피는 이유는 햇빛을 가리는 나무들이 잎을 가리기 전에 씨앗을 맺고 한해살이를 끝내야하기 때문이다. 생태를 알면 알수록 신비한 ‘복수초’다.

 꽃이 핀 복수초를 보는 것으로 야생초산행을 끝냈다. 이른 봄꽃을 발견하고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하산 길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조계산 등산에 걸리는 시간은 길을 선택하는데 따라 다르나 4~5시간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