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적 종교집단의 성립과 교단의 확립
태평교와 오두미교
후한대에는 도가, 황노학, 신선설, 참위설 등의 사상과 신앙이 행해지는 한편 불교도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수용되었다. 아울러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신비적인 경향이 가미된 유학은 후한대에 들어서 참위서의 사상과 신선설 혹은 황노학의 영향도 받게 되었다. 방술, 도술, 참위서 등에 정통한 유가도 꽤 많았고 그들 중에서는 주술적인 힘을 인정하는 경향조차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각기 작은 집단을 만들어 자신들의 주장을 폈는데 이것은 학파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집단에 가까웠다. 당시 촌락공동체의 붕괴로 인해 사회적, 정치적 혼란중에서 신앙과 공동체를 대신할 조직을 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종교색을 띤 많은 반란이 속출하였다. 이들 가운데 세력이 가장 큰 것이 태평도와 오두미도였다.
지금까지 통설로는 오두미도를 설했던 장릉을 도교의 개조(開祖)로 하고 오두미교를 최초의 도교교단으로 보지만 사실은 태평도가 먼저 성립되었다. 태평도의 교법은 후한의 순제때(126-144) 산동출신의 간길(干吉)이 감득(感得)한 <태평청령서>에 기초하고 있는데 <후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장각은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고 칭하고 ‘황노’의 도를 받들어서 제자를 양육하고 교단을 통솔했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병고의 원인을 당사자의 죄과에 두고 그것을 참회고백하게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영력이 있는 부수(符水)와 주술을 사용하여 병을 치료하는 새로운 교법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큰 효과를 내어 불과 10여년 만에 화북지방에서 수십만 사람을 신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태평도와 거의 때를 같이해서 서쪽에서는 장릉(張陵)에 의해서 창도된 오두미교교단이 출현해서 2대 장형(張衡), 3대 장노(張魯)에 이르기까지 약 20여년간 섬서(陝西)에서 사천(四川)지방에 이르는 지역에 종교와 정치 및 군사 등에 지배권을 가진 종교왕국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교단은 위나라의 조조에게 항복한 뒤로는 위정권에 협력하면서 겨우 종교활동만을 했다. 이 교단의 교법은 장노때 완성되어, “신자에게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통독시키고 환자가 있으면 조용한 방에 집어 넣고 그때까지 범했던 죄과를 고백하게 해” 신의 용서를 벌게 한 다음, 天.地.水, 삼관(三官)에게 세 통의 참회문을 바쳐서 신들에게 서약하게 하는 이른바 ‘삼관수서(三官手書)’를 행해 많은 신자들을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오두미도라는 이름도 신자들로부터 5두의 쌀을 입신료(入信料)로 받은 것에 근거한다.
도교교단의 확립
천사도
오두미도가 <태평경>에서 ‘도’로 상징되는 천신의 말씀의 전달자로서 ‘천사’라는 용어를 쓰고 더 나아가서 후에는 교단의 이름을 천사도라고 했던 사실은 태평도의 교법이 오두미도에 계승되어 실질적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오두미도가 천사도의 명칭으로 불려진 시기는 황건적의 난이 진정되고 태평도교단이 없어진 바로 직후, 즉 3세기 초엽까지 소급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천사도는 남북조시대 동안 문자 그대로 도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후에도 역대 천사의 통솔하에 면면리 이어져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오늘날 장천사의 64대손이 대만에 남아 있는 것도 육조이래로 수많은 도교교파의 융기와 더불어 교학이 복잡하게 성쇠되는 가운데에서 천사도가 어쨌든 정통적인 위치를 지켜 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위진남북조에는 경학의 쇠퇴와 더불어 신흥도교가 성장, 완성되었던 시기로서 황실이나 귀족 등 일부 국한된 계층의 지지와 애호를 넘어 일반 대중의 의식까지 깊숙이 뿌리내렸다. 조직화된 종교로서의 도교는 당대에 번성했다. 그 까닭은 황실의 성이 노자와 같은 이씨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도교는 부득이 유교 불교와 경쟁하는 중압감에 시달리며 인습적 도덕의 설교사 역할을 하게 된다. 이백과 같은 재능있는 시인들 또한 도교를 받아들여 자신의 작품세계에 반영시켰다.
송대 초기까지도 도교는 계속 그 지위를 보유하다가 그 이후로는 쇠미해지게 된다. 송대 초기 이학가들은 유학에 부족한 우주론을 확립함에 있어 도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주돈이의 태극도설이 화산파(華山派) 진단(陳摶)계통의 수련 중에 사용하던 무극도를 입수, 개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주희도 유학으로 입신한 이후에는 명분상으로 도교를 이단시 했으나 입신전에는 자양(紫陽)이라는 도호를 가지고 도교수련에 몰두했었고 또 우주론의 체계 확립과 관련하여 도교에 대해 융통성있는 입장을 지녔다. 몽고라든가 청왕조는 도교의 정치적 입장을 적지않게 의심하였다. 이것은 백련비밀결사의 조직과 해체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도교는 상품, 중품, 하품 등 세 계층으로 구분되는데 상품은 노자의 무위자연을 숭상하고 중품은 불로장생을 추구하며 선단을 만들어 먹거나 단전호흡과 같은 수련을 하는 층이고 하품은 부록(符籙)으로 재화를 막는 계층이다. 이것은 위진남북조시대로 들어서면서 위백양(魏伯陽)과 갈홍(葛洪)을 중심으로하는 단정파(丹鼎派)와 도굉경(陶宏景)과 구겸지(寇謙之)를 중심으로하는 부록파(符籙派)로 분열되었다. 단정파는 호흡을 통한 수련방법으로 내단술과 금단을 복용하는 외단술을 모두 사용하여 장수를 갈구하였고 부록파는 도인벽곡을 이용하였는데 구겸지의 천사도는 이 두 방법을 모두 이용하였다. 요.금나라 때에는 수성(修性)을 강조하는 남종파(南宗派)와 술과 담배를 금하고 출가하여 수명(修命)할 것을 강조하는 북종파(北宗派)로 나뉘어졌다. 청나라 초기에는 도교가 난립하였지만 요제빙(寥帝聘)이 창립한 진공교(眞空敎)가 중심이 되었다.
장생술
도가의 복잡한 장생술을 窪德忠은 벽곡, 복이, 조식, 도인(導引), 방중(房中) 등 다섯가지로 분류한다. 도교의 주목적은 불로장생이기 때문에 도사들은 양생술을 중시하여 각 교파나름대로 독자적인 방법을 고안해 내었으며 수행에도 힘썼다. 다섯가지 가운데 벽곡과 복이는 외적 방법(外丹)이고 그 나머지는 내적 방법(內丹)이지만 어느 쪽이든 도교의 수행에는 ‘氣’가 필수적이다. 예들 들어 외단법의 연단(練丹)을 복이(服餌)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내단에서 행하는 조식(調息)과 행기(行氣)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 중에서 도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용어인데, 이는 신체를 동요시켜 사지를 잡아당기고 관절을 움직이는 일종의 유연체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정통도장(正統道藏)>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호랑이 동작(虎戱)은 사지를 땅에서 뗀 채로 앞으로 가면서 세 번 움추리고 허리를 길게 펴고 하늘을 바라본 뒤 곧바로 원상태로 되돌아온다. 걸으며 전진하고 뒤로 물러나기를 각각 일곱 번씩 한다.
사슴동작(鹿戱)은 사지를 땅에서 뗀 채로 목을 빼고 뒤돌아보기를 왼쪽으로 세 번 오른쪽으로 두 번하고 좌우로 다리를 펴서 구부렸다 폈다 하기를 세 번씩 한다........”
오늘날 방중술이라고 하면 곧 性과 관계되는 이런저런 방법을 상상하는데 이는 <소녀경>등에서 설명하고 있는 성의 기교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의심방>권28에 인용되고 있는 <洞玄子>에서는 분명히 말한다.
“사람이 존중하는 것 가운데 방중의 욕구보다 더한 것은 없다. 하늘을 본받고 땅을 본뜨며 음을 본보기로 하고 양을 표준으로 하지만 그 도리를 깨달은 자는 생명을 길러 장수할 수 있다. 진리를 얕보는 자는 신이 상하여 일찍 죽는다.”
요컨대 방중의 바른 도를 실행하는가 못하는가에 따라서 오래 살고 오래 살지 못하는 차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방중술은 예로부터 양생법의 하나, 즉 불로장생법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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