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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이 세계화가 안되는 진짜 이유

지식창고지기 2009. 7. 23. 10:47

한식이 세계화가 안되는 진짜 이유


 


▲ 한 그릇의 반찬이나 찌개도 남과 나눠 먹는 한식 문화한국 음식 즉 한식이 그렇게 맛이 없지는 않다. 허나, 한식은 다른 나라 음식에 비하여 유별나게 인기가 없다. 다양한 세계 각국 음식의 경연장인 미국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적나라하게 비교가 되는 형국이다. 미국의 어디를 가도 꽤나 많은 한국 식당이 쭈욱 널려 있다. 거의가 개점 휴업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 인구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인 한국인만 찾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식은 거개가 한국 사람들만 좋다고 먹는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거의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한번쯤은 먹어 보지만, 대개가 그것으로 끝이다. 다시 찾지 않는다. 이유가 있다. 허나, 아무도 한식을 멀리하면서 그 진짜 이유를 대지 않는다. 무례함을 보이기 싫기 때문이다. 해서, 진정한 발전이 없다. 요즘 고국에서 부르짖는 한식의 세계화는 이대로는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

중식과 일식을 보라. 음식의 맛만 좋으면, 대개의 식당이 각양각색의 인종들로 꽈악꽉 들어찬다. 월남이나 태국이나 인디아 식당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물론, 멕시코나 이태리나 프랑스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도 또한 매한가지다. 하다못해, 몽골이나 중동 음식 식당도 사정은 거의 비슷하다. 세계화라는 말을 꺼낼 필요도 없다. 허나, 한국 식당은 한산하다. 매일같이 파리만 날리고 있다.

음식은 문화다. 한식에도 문화가 있다. 그런데 유독 그 독특한 한식 문화에는 온갖 문제가 많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한식 세계화의 대표적인 걸림돌 두 가지를 냉철한 이성으로 고찰한다. 단골 손님의 부족으로 망하는 식당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식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식은 세계인들로부터 철저하게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인가?

진짜 이유는 바로 두리뭉실한 반찬 문화와 비위생적인 찌개 문화에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다양한 감칠맛을 즐길 수 있는 올망졸망한 반찬(Side Dish)[싸이ㄷ 디쉬]과 얼큰하고 따끈하고 종류가 많은 탓으로 역시 다양한 맛을 볼 수가 있는 찌개(Pot Stew)[팥 스뜌]를 대단한 자랑으로 여긴다. 맛있는 반찬과 찌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먹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국 식당의 반찬 문화를 떠올린다. 한마디로 들쭉날쭉이다. 주로 너무나 맵고 짜기도 하지만, 계절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고, 식당마다 다르고, 시간마다 다르고, 손님마다 다르다. 식당 손님을 위한 메뉴판에도 애초부터 반찬에 대한 소개는 없다. 해서, 각종 반찬 선정은 식당 주인 마음대로다. 손님은 음식 주문을 하면서도 반찬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참 아연실색이다.

혼자 가서 먹으나, 여럿이 가서 먹으나, 나오는 반찬 그릇의 갯수는 거의 일정하다. 그냥 나눠서 먹다가, 모자르면 더 시키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더 시키기라도 하면, 공연히 눈살을 찌푸리면서 귀찮다는 듯이 내던지고 간다. 불쾌하기 짝이 없다. 여럿이서 먹을 수록 식당의 반찬은 굳는다. 그렇다고 해서, 절약된 반찬만큼 식대를 깎아주지도 않는다. 바가지를 쓰는 또는 속는 기분이다.

여럿이서 함께 식사를 할 경우, 상에 놓인 반찬을 먹으면서도 다소 불안하기까지도 하다. 공동의 반찬이기에,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본다. 혹시나 상대가 먹던 즉 침이 묻은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휘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경계한다. 남은 분량을 놓고는 신경전도 벌인다. 속으로는 먹고 싶지만, 겉으로는 점잔을 뺀다. 아깝지만, 결국에는, 그냥 남기고서 끝낸다. 쓸데없는 심적 부담감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식당 음식 문화를 보더라도 한식의 반찬 문화와 같은 공동 그릇의 개념은 없다. 여럿이서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면서 돈독한 정도 쌓으라는 깊은 뜻인 지는 몰라도, 다분히 비합리적이고 두리뭉실하고 뭔가 이상하게 엉성하고 경우에 따라서 찝찔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중국 음식에도 공동 수저로 덜어 먹는 공동 접시가 있지만, 반찬 그릇과는 차원이 다르다.

최근의 일이다. 한식을 즐기는 일본인과 한식을 먹으면서 참 겸손한 식습관을 목격한 적이 있다. 공동 접시(Communal Plate)[커뮤널 플레잍]에 담긴 김치를 집을 때에는 젓가락을 거꾸로 드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젓가락의 중간을 잡고서는 젓가락의 양끝을 유용하게 따로 사용하고 있었다. 공동용 끝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남과 한식을 먹을 때는 무조건 그리하라고 배웠다는 것이다.

충격이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맞다. 그 집안의 생각이 맞다. 매우 날카롭고 현명하다. 그것도 나름대로 참 실용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다. 비위생적인 한식 문화가 초래하는 사태의 심각성이 비한국인에게는 쉽게 보인다. 숲밖에서는 숲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예 새로운 양끝 수저 즉 양끝 숟가락과 양끝 젓가락이 나온다면 어떠할까 하고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예전의 일이다. 경부 고속 도로를 타고 추풍령을 넘다가, 갓길에 쭈욱 세워진 화물차들을 궁금히 여겨서 차를 세웠던 적이 있다.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가, 아담한 초가를 발견했다. 소위 기사 식당이었다. 계속 나오는 참말로 맛갈진 반찬 그릇들을 세었다. 정확하게 40개였다고 기억한다. 물론, 다 먹지를 못했다. 남은 반찬은 다음 손님에게 주어질 것이었다. 말도 안되는 현실이었다.

한국 식당의 엉망진창인 반찬 문화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투명화와 개인화가 관건이다. 참 간단하다. 음식 메뉴판에 아예 반찬까지도 확실하고 자세하게 제대로 기재해야 한다. 여러 반찬 중에서 개인 취향에 따라 4개 정도를 선택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손님이 개인 반찬도 다 미리 주문하게 만들고, 주문된 모든 개인 반찬을 손님 각자에게 정확하게 다 제공하라는 말이다.

한국 식당의 찌개 문화를 떠올린다. 한마디로 비위생적이다. 물론, 혼자서 식사를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허나, 여럿이서 함께 공동 찌개를 먹어야만 할 때 난처한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각자가 속마음으로 과연 먹느냐 마느냐 하는 극히 개인적인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숟가락이란 특히 밥을 먹다 보면 입으로 쪼옥쪽 빨게 마련이고, 먹던 숟갈에는 각자의 침이 잔뜩 묻어 있다.

해서, 이 숟갈 저 숟갈 함부로 드나드는 찌개 그릇에는 여러 사람의 타액이 골고루 섞이게끔 된다. 그걸 한 숟가락 떠서 먹는다는 것은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과 간접 뽀뽀를 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물론, 각자의 타액에는 유전자와 함께 각종 병원균도 들어 있을 수가 있으므로,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다. 남의 침까지도 넘겨야 하다니, 애인이나 가족 관계가 아니라면, 정말 엄청나게 찜찜하다.

비단 전반적으로 매우 까탈스러운 서구인들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간에, 한국 식당에서의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찌개 문화를 목격한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충격인 셈이다. 절대로 과언이 아니다. 맛있는 한국 음식을 손꼽으라면, 타인의 타액 걱정을 않으며 각자가 혼자 먹을 수 있는 불고기나 비빔밥은 언급할 망정, 구수한 된장 찌개를 말하는 외국 사람은 거의 없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식당 식탁에 놓여진 공동 찌개 그릇은 외양간의 여물통과 다를 바가 없다. 옹기종기 들러붙어서는, 그저 남들이 자기보다 한 숟갈이라도 더욱 재빨리 떠서 먹을까 걱정하며 게걸스러운 신경전을 벌이고는 하는데, 여물통 주위의 침 흘리는 가축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분명 참 안쓰러운 음식 문화다. 고국에서도 무의식적으로 많이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한국 식당의 비위생적인 찌개 문화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공동 찌개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철저한 개인화가 관건이다. 식당 주인과 손님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 찌개를 제공할 때마다, 식당 주인은 미리부터 좀 알아서 공동 수저와 작은 개인 찌개 그릇들까지도 챙겨 주어야만 한다. 손님이 따로 그런 것들을 요구하기 전에 말이다. 손님 각자도 먹던 수저를 마구 담그면 안된다.

지금 현재의 한국 식당은 각종 전염병의 온상이다. 사실이다. 간염 보균자의 비율이 무척 높은 것만 봐도 자명하다. 더군다나 요즈음처럼 결코 예사롭지 않은 신종 독감이 전세계적으로 화악 번지고 있는 상황에서, 양식 있는 한국인이라면 모두 차분하게 한식의 위생화를 위하여 신경을 쓰는 것이 현명하다. 소를 다 잃고 나서 그제서야 외양간을 고친다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으랴.

미국에서 잘 나가는 식당들을 보면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우선, 맛이 수준급이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간장 된장 고추장 소금 설탕 참기름 깨소금 파 마늘 등의 한식에서 주로 사용되는 양념(Spice)[스빠이쓰] 말고도 기상천외한 수백 가지 이상의 온갖 양념과 향신료가 존재한다. 잘만 섞어 사용하면, 연출할 수 있는 맛의 색깔은 무한하다. 해서, 세계인의 입맛은 섬세하다.

한식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끊임이 없는 변신에 의존한 발전을 게을리하지 말아야만 급변하는 전세계의 식당 음식 시장에서 생존 내지는 번영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새로운 맛만 개발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음식 재료와 함께 조리 방법에 이르기까지의 상세한 설명도 수록된, 오자나 탈자도 없는, 깐깐하고 충실한 메뉴(Menu)[메뉴]판 즉 식단표를 손님에게 보여야 한다.

재언하지만, 음식은 문화다. 한식의 진정한 세계화를 원한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좀 껄끄러운 한식 문화를 저절로 세계화가 될 수 있도록 고치기만 하면 된다. 반찬 문화와 찌개 문화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개선책을 채택하여 범업계적으로 실행하면, 꿈은 드디어 절로 이루어진다. 깔끔한 한식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전세계의 한국 식당은 다양한 손님들로 문전성시가 된다.

끝으로, 한식이란 무엇인가? 한국 즉 대한민국 음식이다. 엄밀히 따지면, 남한 음식을 지칭한다. 허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평양 냉면과 함흥 냉면 등의 북녘 음식도 다 한식으로 친다. 음식의 범위부터 혼란스럽다. 대충대충이다. 분명하지 않다. 실은, 남북의 음식을 모두 포함하는 고려 음식(Korean Food)[코리언 푸욷] 즉 고려식이라고 함이 마땅하다. 통일을 대비해서라도 말이다.

 

 

[유코피아 칼럼니스트 스티브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