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의 임경업 장군을 찾아
충절에 살고 의리에 죽은 일편단심 민들레야
강화도 마니산을 두고, 한반도의 중심이라고들 한다. 거리상으로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중심이라고 내세우는 고장이 또 있다. 충청북도 충주다. 충주시로 편입된 중원군(中原郡)의 지명이 오래전부터 중심이었다는 내력을 지니고 있고, 그 상징처럼 중앙탑이 서 있다.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에 있는 국보 6호 중앙탑은 높이 14.5m로 현존하는 통일신라 탑 중 가장 높다. 다리가 튼튼한 두 장정이 남쪽 끝과 북쪽 끝에서 한날 한시에 출발, 이곳에서 만나게 됐다고 해서 그 표시로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중앙이라 해서 자부심과 우월감도 대단할 터이지만, 그 대가 또한 녹록치 않았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데 모든 세력이 교두보로 삼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각축장이 됐던 곳이 충주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이곳까지 남하해 중원 고구려비를 세웠고, 백제 개로왕은 한강 유역에서 충주시 안림동으로 천도하려고 했으나 고구려의 피습을 받아 사망함으로써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가 중요했던 이유도, 이런 지정학상 비중 때문이다.
충주가 이처럼 각축장이 됐던 게 한 사람의 걸출한 무인을 배출한 원동력이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임경업장군의 자취를 찾아나선 이번 여정에서 처음 만난 중앙탑을 보고서 드는 생각이었다.
임경업은 임진왜란 때에 파병한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병자호란으로 우리 국토를 유린한 청나라에 맞섰던 철저한 친명반청파 장수였다. 그는 무속인들에 의해 신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다. 그는 드물게 중국 천자에게 총병 벼슬을 받은 공신이었다. 압록강 변에 근무할 때에 후금과 내통하던 명나라 장수를 섬멸한 공로였다. 그 뒤로 그는 ‘임총병’이라고 불렸다. 뒷날 청나라가 원군을 요청했을 때에 임경업이 파견됐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체 하고 물러서거나 미리 정보를 흘려서 접전을 피했다. 훗날 청나라로 투항한 명나라 장수의 누설로 그 사실이 발각돼 청나라로 압송되기에 이른다. 그는 압송 도중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에서 탈출, 양주 회심사에 숨어 있다가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명나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때문에 청나라는 그의 부인과 형제들을 잡아갔다. 부인은 심양 감옥에서 “우리 주인은 대명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 있겠는가”하고 자결하고 만다.
우리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활동 무대를 중국으로 넓혔던 사람은 그 이전에 신라시대 최치원 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중화사상이 뿌리깊던 당시에, 그런 행적이 모든 이에게 경이롭게 여겨졌을 터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최치원과 임경업, 두 사람 모두가 신격화된 점도 이런 역사적 사실이 크게 뒷받침됐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임경업이 충신과 명장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 후기의 선비들이 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변방 민족이 세운 청을 끝까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시대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소재로 한 고소설 ‘임경업전’은 서로 다른 36종이 전하고, 송시열이 쓴 것을 포함해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전(傳)은 13편이 전한다. 그리고 전국에 걸쳐 그와 관련된 설화가 분포돼 있고, 박수 무당의 수호신으로 서해안 조기잡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모든 문헌에서는 임경업은 충주 달천출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구전에 따르면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서 태어나 예닐곱살 때에 충주 달천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부론면에는 그의 할아버지 묘가 있어서 그 신빙성을 높여주는데, 그곳에서 병정놀이를 하다가 한 아이를 죽여서 달천으로 이사했다는 것이다. 추정컨대 그 사실 자체가 드러낼 만한 것이 아니어서 전기나 족보에 기록되지 않은 성 싶다.
임장군이 살았던 동네는 정확히 충주시 달천가의 풍동이다. 풍동의 뒷산에 그의 묘가 있고, 강 건너편으로 그를 모신 사당 충렬사가 있다. 충렬사 안에는 영조23년(1747년)에 세워진 전주 이씨 정렬비와 정조15년(1791년)에 정조가 직접 쓴 비문의 충렬사비가 있다.
이 비석 앞을 지나던 옛 나그네가 쓴 글이 있다. “내가 달천을 지나가다가 장군의 부인 이씨의 비를 보게 됐는데, 소슬하여 머리털이 대나무처럼 일어섰다. 장군에게 그와 같은 부인이 있음을 찬탄하며 들어가 장군 화상에 절하였다. 그 철의(鐵衣)를 보니 마치 나비 날개처럼 가볍게 입었고, 명나라 황제가 내려주었다는 먹은 어제인 양하여,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이제 이 전(傳)을 보니, 김자점 이 놈의 살갗을 처단하지 못하는 게 분격스럽기만 하다.” 고소설 ‘임경업전’을 읽고, 그 뒤편에 누군가가 적어놓은 한 대목이다.
임장군과 관련된 다른 유적지로 삼초대(三超臺)가 있다. 풍동 앞을 흐르는 달천을 건넌 깎아지른 산에, 3층 단이 쌓여 있다. 수목에 가려 전체적인 규모를 분간할 수 없는데, 강가 아스팔트 길에서 보면 옹색한 산비탈에 누군가 돌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그게 첫번째 단이고, 중간 단은 잘 보이지 않으며, 세번째 단에는 정심사라는 절의 산신각이 올라 앉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임경업은 이곳 삼초대 “100여척의 층암 절벽을 세 발자국에 뛰어내리고 또 오르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안보쪽으로 향하는 살미면 세성리에 후손들이 세운 사당, 임충민공 별묘(別廟)가 있다. 이곳에는 임장군이 살았을 때에 중국 화공이 중국 황제에게 바치려고 그렸다는 영정이 걸려 있다. 살미면 별묘에서 수안보 온천이 그리 멀지 않다. 수안보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찍 중원의 미륵사지를 둘러볼 만하다.
허정구의 <이야기 여행>/동아일보 매거진/1999.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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