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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 <8> 쥘 베른『해저 2만리』

지식창고지기 2009. 8. 3. 17:32

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 <8>

상상이 현실이 된 잠수함 ‘노틸러스호’

쥘 베른『해저 2만리』

글=주경철 |중앙선데이  제50호 | 20080224 입력
일러스트=남궁유
“바다는 살아 있는 무한(無限)입니다… 오직 바다에서만 인간은 독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어떤 지배자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누구나 자유롭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며 초강력 잠수함 노틸러스호를 타고 해저 세계를 유유히 돌아다니는 신비의 인물, 거의 만능에 가까운 육체적·정신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무서운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는 ‘까칠한’ 성격의 주인공,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널리 읽혀 왔던 해양 모험소설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네모 선장이다. 네모(Nemo)는 사각형과는 관련이 없고 라틴어로 ‘누구도 아닌 자(nobody)’라는 뜻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자신을 그처럼 ‘누구도 아닌 자’라고 부른 적이 있으니, 네모 선장은 현대 세계의 오디세우스에 해당한다. 국적과 이름을 지워버린 채 미지의 해저 세계로 숨어버린 그는 정말로 문명과 사회를 등지고 사라진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 자신이 뭐라고 주장하든 그는 이 작품이 출판된 1870년 무렵 유럽의 정치 현상, 과학과 산업 발전, 제국주의적 꿈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 인물이다.

소설 속 화자인 프랑스인 아로낙스 박사는 세계의 바다 이곳저곳에 출몰하여 선박들에 피해를 주는 어떤 고래를 처치하는 사업에 동참하게 된다. 그를 보조하는 두 인물로는 해양 동물 분류의 전문가 역할을 하는 플랑드르 출신의 하인 콩세유, 그리고 건장한 체격에 공격적인 성격을 가진 프랑스계 캐나다인 작살꾼 네드 랜드가 있다. 네드 랜드가 한번 작살을 던지면 고래 한 마리의 심장을 꿰뚫고 또 다른 고래의 머리에 꽂혀 두 마리를 한 번에 잡는다. 조선에 임꺽정이 있으면 캐나다에 네드 랜드가 있다고나 할까….

그들은 미국 군함을 타고 바다를 헤매다가 드디어 문제의 ‘고래’를 만나 사투를 벌인다. 그러나 오히려 군함이 손상을 입고 난 뒤 세 사람은 ‘고래’의 등 위에 올라타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금속성 선박의 표면이었다. 이것이 바로 네모 선장이 지휘하는 잠수함 노틸러스호였던 것이다. 세 사람은 곧 이 배 안에 잡혀 들어가 네모 선장의 포로 겸 손님으로서 세계의 바다를 함께 여행한다.

네모 선장은 결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지만 막대한 부를 소유한 대부호로서 어떤 정치적 격변으로 큰 피해를 본 뒤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는 인물이 되었으며, 그 결과 문명 세계를 벗어나 해저에서 과학적 탐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주인공들이 전 세계의 바다를 돌아다니며 관찰하는 신기한 해양 현상들을 접하게 된다. 그 가운데에는 순전히 허구로 지어낸 이야기들도 있지만 쥘 베른이 읽은 각종 여행기와 과학 서적의 내용들을 옮긴 것도 많다. 예컨대 암보이나 해안과 주변 바다에서 바다 색깔이 우윳빛으로 되는 우유바다 현상(젤라틴처럼 반투명하고 희미한 빛을 내는 몸길이 0.2㎜의 원생동물인 적충류가 모여 몇㎞가 될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진주의 종류와 채취 방법, 생긴 모양 때문에 인어로 오해받으며 고기 맛이 좋아 남획되어 거의 멸종 위기에 몰린 듀공(dugong)이라는 동물, 또 이 작품을 통해 더욱 유명해진 몸길이 8m짜리 대왕오징어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도대체 네모 선장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그를 바다로 내몬 그 사건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작품에서는 이 점을 일부러 모호하게 남겨놓았다가 다음 작품인 『신비의 섬』에서 밝히는 방식으로 처리했지만, 그러는 동안 저자의 원래 구상이 크게 바뀌고 말았다. 원래 네모 선장은 폴란드 귀족으로서 이 가문 사람들이 러시아의 폴란드 지배에 항의하는 봉기(1863)에 가담했다가 러시아 군에 의해 모두 학살당했기 때문에 그가 러시아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와 러시아는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에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러시아를 비판하면 외교 문제로 비화될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그의 소설이 러시아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출판사 측에서 이 부분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 결과 후속 작품에서 네모 선장의 미스터리가 밝혀지는 부분에서는 그가 원래 아메리카 인디언인데, 1857년 인디언의 봉기에서 영국인에 의해 일가친족이 몰살당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프랑스의 전통적인 라이벌인 영국을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선장의 방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이민족의 억압에 저항한 영웅들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폴란드는 끝났는가!”라고 외치며 죽어간 코슈추슈코의 초상화라는 점이 원래의 구상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그러한 구상의 변화가 크게 문제가 되는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군함 한 척이 노틸러스호를 괴물 고래로 오인하고 포격을 가했는데 네모 선장은 다른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배를 반드시 격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배는 “저주받은 나라의 배”, 즉 네모 선장의 불행을 가져온 국가의 선박이다. 이 배는 노틸러스호의 공격을 받아 모든 선원이 비참하게 익사하고 만다. 수많은 무고한 선원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는 이 부분이 너무 잔혹하지 않느냐고 출판사가 문제를 제기하자 저자는 격론 끝에 결국 이 배의 국적을 명백하게 밝히지는 않은 채 배를 침몰시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엄청난 인명 살상을 하고 난 뒤 네모 선장은 자신의 방에 칩거한 채 괴로워한다. 이처럼 배의 지휘를 방기하는 동안 노틸러스호는 노르웨이 앞바다의 거대한 소용돌이인 메일스트롬에 말려들어가 위기를 맞는다. 아로낙스 박사와 두 명의 동료들이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 보니 세 사람이 어느 바닷가 오두막집에 누워 있었다”는 식의 고전적 방식으로 일단 이 책은 마무리되고, 뒷이야기는 후속작 『신비의 섬』에서 새롭게 전개된다.

『해저 2만리』는 지금부터 140년 전에 쓴 작품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아직도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작품이다. 그 시대의 과학기술을 소개하는 측면도 생각보다 그렇게 구식이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노틸러스호는 19세기 후반의 2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전기산업과 기계산업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용골은 프랑스의 크뢰조 제철소, 구동축은 영국의 펜 회사, 선체의 철판은 리버풀의 레어드 회사, 기계류는 독일의 크루프 회사, 정밀기기는 뉴욕의 하트 형제 회사가 만든 다음 이 모든 것들을 가져다가 작은 무인도의 공장에서 직접 조립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19세기 프랑스 민족주의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예컨대 이집트 원정을 감행했던 나폴레옹과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레셉스를 두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모세에 비견되는 영웅으로 서술하는 식이다. 이 소설은 아직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기 이전 시대의 작품이어서 “이제 곧 운하가 뚫리면 홍해가 다시 옛날처럼 중요한 교통로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점도 흥미롭다. 영국에 대한 적대감도 상당하다. 프랑스혁명 당시 영국 함대와 싸우다가 침몰한 방죄르호(Vengeur·마침 배 이름이 ‘복수’라는 뜻이다)를 해저에서 발견하는데 마침 그날이 바로 그 배가 침몰한 날로, 혁명력(프랑스혁명 당시 제정했던 달력)으로 목월(牧月) 13일이라는 식이다!

바다는 누구의 것도 아닌 자유인의 세계라고 네모 선장이 주장하지만 이 작품의 내용 자체가 이미 그것과는 다르게 그려져 있다. 바다는 더 이상 각국의 투쟁에서 비켜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전에 강대국이 대지를 분할하고 통치하듯이 과학기술을 앞세운 강력한 국가가 곧 바다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이 나온 바로 얼마 후 미국의 유명한 해군 전략사가인 앨프리드 머핸(Alfred Mahan)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일찍이 쥘 베른은 노틸러스호를 가지고 해저 세계를 선점하는 꿈을 꾸었지만, 실제 세계 최초의 핵잠수함을 건조하여 바다를 종횡으로 누빈 것은 미국이었다. 그 잠수함은 이 소설에 나오는 잠수함의 이름을 따라 노틸러스호라 명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