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6](5)제주사람의 일본표착(중)
1부. 제주바다를 건넌 사람들
'제주' 두 글자 가리려 호패를 불태우다
입력날짜 : 2009. 03.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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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1909년 해난사고 150건중 출신지 속인 사례 97건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희부연 바다엔 예닐곱척의 배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김 양식업에 쓰이는 배였다. 제주 뱃길의 주요 길목이자 국제무역항으로 들썩였던 곳은 세월을 비켜서지 못했다. 간척사업으로 포구의 얼굴이 크게 바뀌었다. 1601년 제주로 향했던 김상헌이 남긴 '남사록'만 해도 무릇 제주를 왕래하는 공행(公行)은 해남 관두량, 강진 백도도, 영암 이진포 등 세 곳에 모여 바람을 기다린다고 기록됐다.
▶"왜 해남 장사꾼이라 속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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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일본 대마도에서 작성된 표류민 진술서가 있다. 이 기록에서 표류민 일행은 '조선국 전라도 해남현의 농민'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들은 1706년 10월 13일 장사를 하러 21명이 한 배에 타고 그곳에서 배를 띄웠다고 했다. 완도라는 곳에 가서 돌아오던 중에 12월 12일 바람에 떠밀려 표류해 일본 히라토의 영지인 반도에 닿았다고 말한다.
▶한·일 표류민 조사서에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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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표류민은 경상도 영해 출신들과 함께 조선으로 송환됐다. 이들을 조사한 기록에 언급된 김월선 일행 21명은 대마도 진술서와 동일인이다. 이들 제주인들은 "해남이라고 이름을 바꿔 말한 것은 속설에 왜인들이 만일 제주인을 만나면 곧 때려죽인다는 말이 옛부터 있었으므로 결국 해남현 농민이라고 핑계를 대어 말했다"면서 '제주' 두 글자를 가리기 위해 호패를 모두 불태웠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최근 '허구'라는 주장이 나오는 유구 세자 피살설(본보 2월 13일자 8면·10면)의 영향으로 일본으로 떠난 표류민들은 출신지를 속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 자료엔 나이까지 기록
출신지를 강진으로 진술한 제주 표류민도 있다. 1707년 9월 27일 진상품 등을 싣고 제주를 출발해 일본 오도(五島)에 표류한 김이운 일행은 그곳에서 자신들을 강진 장사꾼이라 칭한다. 조선으로 돌아왔을때 조사관이 출신지를 바꿔 말한 경위를 따져묻자 이들 역시 '제주'라는 두 글자를 감추기 위해서였고 호패를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털어놓는다.
전라도 주민의 일본열도 표류기록을 분석해온 정성일 광주여대 교수는 이들 사례를 포함해 출신지를 거짓으로 진술한 제주 표류민 문제와 관련 한·일 양국의 기록을 비교해놓았다. 조선 사료인 '표인영래등록'에는 표류민 개인이 맡은 일과 신분, 이름이 한자로 적혀있다. 반면 일본 자료인 '공의피앙상(公義被仰上)'은 표류민 이름이 일본어의 카다카나로 적혀있고 연령이 함께 담겼다. 해남 농민으로 속인 김월선의 경우 일본 자료엔 키모오루센(51세)으로 표기됐다. 일본측 자료가 신원을 찾아내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나이가 쓰여있어 표류민 특성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셈이다.
정 교수는 1592~1909년의 기간에 일본으로 떠밀려간 제주출신 표류민의 해난 사고를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150건의 해난 사고중에서 출신지를 제주로 밝힌 사례가 53건이었다. 그에 비해 제주 표류민이 출신지를 환칭한 사례는 97건으로 그보다 갑절 가량 많았다. 일본측 자료만 보면 제주출신 표류민이 다른 지역에 비해 적지만 출신지를 속인 사례를 합쳐야 일본으로 표류한 빈도를 비교적 명확히 셈할 수 있다.
/진선희·백금탁기자
출신지 제주 밝힌 표류 조선 개항 이후가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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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측 자료만 보면 강진 출신 주민이 151건으로 가장 많고 해남이 124건으로 뒤를 잇는다. 이어 영암 71건, 순천 54건, 제주 53건 순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인 제주도 출신 표류민이 적은 것은 출신지를 속였기 때문이다. 한국측 사료와 비교 분석할 경우 제주출신 표류민은 53건에 97건을 추가한 150건으로 증가한다. 제주사람들이 읍호를 환칭한 지역은 강진(27건), 해남(26건), 영암(19건)순으로 많았다. 도회관(都會官)이 설치된 이들 세 곳은 제주에서 육지로 건너갈 때 반드시 거쳐갔던 지역이다.
출신지를 제주라고 밝힌 53건은 근대 이후의 해난 사고에서 주로 확인됐다. 정 교수는 이를 "개항 이후 먼 바다를 항해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인식의 영역도 전과 달리 넓어진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한·일 표류관계를 연구해온 이케우치 사토시(池內敏) 일본 나고야대 교수는 일본에 표류한 제주사람들이 출신지를 속인 일을 두고 '출신지 사칭'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조선 사료인 '표인영래등록'엔 '환명(換名)이나 '탁칭(托稱)'이란 표현을 썼다. 정 교수는 "죽다가 살아난 사람이 제주 출신임이 드러나서 일본인에 의해 죽임을 당할까봐 출신지를 거짓 진술한 것을 두고 '사기'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칭'이란 말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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