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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표류의 역사,제주-5](4)제주사람의 일본 표착(상)

지식창고지기 2009. 8. 7. 14:20

[표류의 역사,제주-5](4)제주사람의 일본 표착(상)
1부. 제주바다를 건넌 사람들
추자 해역서 풍랑 떠밀려 낯선 땅 일본으로


입력날짜 : 2009. 03.06. 00:00:00

▲출어를 목적으로 길에 나선 듯한 소형 어선이 추자도 앞바다를 가로질러 가고 있다. /사진=진선희기자
쌀구입·출어 목적으로 항해하다 바다서 길 잃어
제주 표류민 대마도·오도 등 특정지역 표착 잦아


바다가 제법 고요한 줄 알았다. 제주항을 출발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추자도를 거쳐 진도, 목포로 이어지는 그 배에 처음 오른 승객들은 혼쭐이 났다. 파도를 타고 넘으며 놀이기구에 오른 것 같은 움직임이 계속되자 어떤 이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표정이었다. 1시간 남짓 걸리는 추자도로 가기 위해 이 배를 이용한 경험이 있는 낚시꾼들만 괜스레 여유를 부렸다.

▶하늘의 기후를 어찌 헤아릴까

3000여명이 살고 있는 섬 속의 섬 추자도. 제주와 육지 뱃길의 중간쯤 된다. 17세기 초반 제주 실정을 기록한 '남사록'을 쓴 김상헌. 그는 해남을 출발해 여러 섬을 지나 제주로 향하면서 추자도 부근 바다를 건너다 표류 위기를 맞는다. 다른 곳은 바람이 자면 파도도 고요해지지만 추자 부근에 이르면 바람이 없어도 파도가 일어난다고 썼다. 잠깐 사이에 풍세가 급해지며 엄청난 파도가 배를 누르자 김상헌은 중국 표해록을 남긴 최부의 말을 떠올린다.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가 천지를 찢는다." 하늘을 향해 관음보살을 외던 김상헌 일행은 무사히 애월포에 다다른다.

표해록마다 표류가 시작된 해역을 명확히 명시해 놓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배들이 추자도 부근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일본으로, 중국으로, 베트남 등지로 떠밀려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늘의 기후는 미리 사람이 헤아릴 바가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중 일본에 표류한 기록을 더듬어보자.

1731년 9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온 정운경은 표류민을 일일이 인터뷰해 '탐라문견록'(정민 옮김)을 남겼다. 이 기록에 보면 1698년 11월 29일, 성안에 사는 백성 강두추와 고수경은 추자도를 지나다가 악풍을 만나 표류했다. 그들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일본 옥구도(屋鳩島). 1724년 2월 14일엔 도근천에 사는 백성 이건춘이 추자도를 지나다가 서풍을 만나 동쪽 바다로 흘러흘러 대마도(對馬島)에 표착했다.

▲추자면 영흥리 산중턱 등대홍보관에서 바라본 추자항 전경. 조선시대 표류기록에는 추자도 해역 표류사례가 많다.
▶조선후기 송환건수 40%는 제주인

이들만이 아니다. '탐라문견록'에는 1679년 관노 우빈의 취방(翠芳)도 표류기, 1723년 조천관 백성 이기득의 오도(五島) 표류기, 1704년 관노 산해의 양구(梁九)도 표류기, 1729년 도근천 주민 고완의 오도 표류기, 1720년 대정현 백성 원구혁의 신공포(神功浦) 표류기 등 일본에 표류한 경험담이 15편중 절반을 훌쩍 넘긴다.

일본에 표류한 제주사람들은 무슨 목적으로 제주에서 배를 띄웠던 것일까. 이훈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실장이 지난해 한·중·일 국제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조선후기 연안주민의 일본 표착과 조일교류-전라도인을 중심으로'를 통해 그 일단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훈 실장은 일본에서 작성된 표류민 조사서 등을 토대로 1599년에서 1888년까지 일본에 표착한 전라도인(제주 포함)은 411건 5049명에 이른다고 했다. 이는 일본에 표착한 전체 송환건수의 39.7%를 차지한다. 표류민을 가장 많이 낸 곳은 제주가 130건(33%)으로 제주목에서 출항해 대마도(26건)나 오도(60건)에 표착한 사람들이 다수였다.

▶진상품 수송 항해에서 사고 많아

제주사람들의 표류는 추자도 청산도 완도 강진 보성 장흥 해남 등 섬과 뭍의 포구에서 미곡을 구입하기 위한 항해 도중에 발생한 사례가 가장 많았는데 추자도가 사고 다발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일본에 표류한 제주 사람중에 항해 목적을 파악할 수 있는 119건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다. 이훈 실장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제주인들의 사고는 진상물(귤·복어·조개·목재)의 수송 도중에 많이 일어났는데 미곡 구입과 같은 상업 활동은 진상물품의 운송과정에 부수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가 분류해놓은 항해 목적은 크게 출어, 상업활동, 공적인 업무로 나뉘어있다. 이중 공무는 진상물 운반 등과 관련된 일이다. 제주 표류민의 항해 목적은 출어 42건, 상업활동 41건, 공무 23건 순이다. 공적인 업무를 하다 표류를 당한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같은 시기 전라도의 다른 지역인 강진(6건) 영암(2건) 순천(사례 없음) 장흥(2건) 해남(6건) 등과 비교할 때 무척 높은 수치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백금탁기자 gtbaik@hallailbo.co.kr

▲추자도 등대산공원 정상에 바닷길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오색깃발이 내걸렸다.
그 배에 어떤 감귤 실었을까…진상품 싣고가다 종종 표류사고

정운경의 '탐라문견록'에는 귤보(橘譜)가 실려있다. 1732년 윤5월 하순에 썼다는 귤보에는 제주도에서 재배되던 15가지 품종의 감귤을 소개해 놓았다.

"우리나라는 과실 품종이 아주 많은 데, 유독 귤만은 탐라에서 생산된다. 하지만 차고 모진 바람을 겁내므로 열매 맺는 것이 많지가 않다. 공물로 바치기에도 늘 부족하다. 그래서 사대부 사이에서는 몹시 진귀하게 여긴다. 그 이름도 이루 다 꼽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물며 그 맛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귤보에는 제주감귤을 상중하 3품으로 구분하고 그 색깔과 맛을 적어놓았다. 정운경은 입에 넣으면 눈처럼 녹는다는 유감(乳柑), 신령스런 과액이 마치 꿀물처럼 짙고 깊은 대귤, 향기롭고 부드러워 입에 넣으면 상쾌하게 정신이 돌아와 낯빛을 고치게 만든다는 동정(洞庭)귤, 단물이 신령스레 엉긴 것이 뚝뚝 떨어지는 당유자, 색과 맛이 수시로 변해 참으로 기이하다는 청귤 등 5종을 상품으로 쳤다.

제주사람들의 표류기에는 귤 진상품을 싣고 가다 표류한 사례가 나온다. 1477년 2월 김비의 일행 8명은 제주에서 진상하는 감귤을 싣고 출항했다가 14일간의 표류끝에 유구에 표착한다. 1539년 10월 강연공 등 19명은 임금께 진상하는 감귤을 수송하기 위해 바다에 나섰다가 뜻하지 않게 오도 근처에서 배를 멈췄다.

감귤을 비롯해 진상품을 실은 배는 종종 바닷길을 헤맸다. 그만큼 진상선을 띄우는 횟수가 많았다는 방증이겠다. 1687년 9월 김대황 등 24명은 목사가 진상하는 말 3필을 싣고 가다 추자도 앞바다에서 동북풍을 만나 표류했다. 1470년 8월 김배회 등 7명 역시 서울까지 진상품을 수송하고 제주로 돌아오다 큰바람을 만나 중국에 표착한다. 김기손 일행도 1534년 2월 진상물을 싣고 가는 도중 중국까지 떠밀려갔다. 일본에 표류한 강두추와 고수경도 진상선을 타고 가다 사고를 당했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