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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표류의 역사,제주-7](6)제주사람의 일본표착(하)

지식창고지기 2009. 8. 7. 14:22

[표류의 역사,제주-7](6)제주사람의 일본표착(하)
1부. 제주바다를 건넌 사람들
일본에 떠밀려가면 무사히 귀환할거라 믿어


입력날짜 : 2009. 04.03. 00:00:00

▲조선 숙종때 김월선·김이운 일행은 바닷길을 헤매다 천신만고 끝에 일본에 다다랐지만 심한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제주섬에서 음력 2월 영등달에 열리는 영등굿은 바다에 대한 공포를 달래려는 의식이다. 지난달 9일 열린 북촌영등굿. /사진=김명선기자 mskim@hallailbo.co.kr
한·일 통교체제 정비되면서 표류인 송환 두드러져
日 열도 어디가든 나가사키-쓰시마 거쳐 조선으로


세종 25년(1443) 김목 김막 형제, 세조 13년(1467) 김석이 등 2명, 성종 15년(1484) 존자암승 사식 등 9명, 연산군 7년(1501) 정회이 일행, 중종 31년(1536) 김공 등 14명, 숙종 40년(1714) 정창선, 정조 22년(1798) 조필혁 이원갑, 순조 15년(1815) 정의현감 이종덕…. 조선시대 일본에 표류했던 제주 사람들중 일부다. 일본으로 표류했던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야마구치현에 조선인 지장묘

일본 야마구치현 아부군 타마가와쵸에는 조선인 지장묘(地藏墓)가 있다. 1815년 12월 5일 아부군 시모타마 마을 해변에 9명의 조선인이 표착했을 때 익사하거나 행방불명된 6명의 이름을 가타카나로 새겨 만들었다. 훗날 시신들은 조선으로 돌려보냈지만 이 지장묘를 통해 조선인 표착민을 대했던 일본 사람들의 배려를 읽고, 이같은 이름없는 민중들의 행위야말로 200여년에 걸친 표류민 송환 체제를 지탱해주는 근간이라는 시각이 있다.

그때 일본에 표착했던 조선인들은 나가사키(長崎)에 보내진 후 쓰시마를 거쳐 부산 왜관에 송환된다. 일본에 표류한 조선인에 대한 송환이 두드러진 것은 1450년대부터다. 1443년 계해약조(癸亥約條)에 의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쓰시마(對馬)를 매개로 통교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이후인 것이다. 일본측이 표류인을 송환했던 것은 조선정부와의 우호관계를 드러내고 그 대가로 통교의 기회를 얻어 경제적인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의도가 컸다.

조선 사료인 '표인영래등록'에는 표류인을 맞는 일본인의 시선과 송환 절차의 일단이 드러난다. 임란이나 명치유신 등 커다란 정치적 변동으로 인해 조일간의 통교체제가 변화하는 시기에도 표류인 송환은 이루어졌다. 양국 교린 관계에서 표류민 송환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표인영래등록'엔 1707년(숙종 33) 10월 13일 제주를 출발했던 김월선 일행 21명이 일본에 표착한 내용이 들어있다. 이들은 히라토의 영지인 반도까지 떠밀려갔다. 제주 표류인들은 그곳에서 6일을 머문후 나가사키로 인솔된다. 나가사키에서 36일을 묵은 표류인들은 1708년 2월 초9일 쓰시마로 향한다. 쓰시마에서 23일을 머문 제주사람들은 마침내 일본에 표류했던 경북 영해 사람들과 함께 조선에 도착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표류인을 나가사키로 인솔하면서 먹을 것은 물론이고 소반 등을 제공했으며 노를 수리해줬다. 쓰시마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솜, 덧옷, 허리띠를 나눠준다.

▶죽은 자들 관 만들어 염습까지

같은해 9월 27일 제주 바다에 나섰다가 일본 오도에 표류했던 김이운 일행 27명은 어떤가. 3명은 뭍에 오르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는다. 살아남은 자들은 굶주린데다 갈증이 심해 울부짖었다. 이때 왜인이 표류인을 보고 집으로 들어가기를 청해 죽을 대접하고 구급해준다. 시신 3구는 관을 만들고 염습한다. 8일을 그곳에 머문 표류인들은 도주(島主)가 사는 곳으로 옮겼는데 때만 되면 먹을 것을 주었고 술과 반찬, 저고리옷을 지급했다. 14일후 이들은 다시 나가사키로 이동한다. 이 무렵 2명이 병으로 죽었는데 이 역시 관을 만들고 염습을 해줬다. 42일 뒤엔 쓰시마로 향했는데 다른 곳보다 표류인에 대한 대접이 후했다. 표류인들은 그로부터 17일후 조선에 다다른다.

이케우치 사토시(池內敏) 나고야대 교수는 일본열도 각지에 표류한 조선인들은 우선 나가사키로 보낸후 쓰시마번에 인계했고 막부가 비용을 부담해 쓰시마의 후츄(府中)까지 간뒤 사정 청취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후 쓰시마번에 의해 조선까지 보내진다는 것이다. 그는 "1640년대에 시작해 명치 초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방식이 계속 운용되었다"면서 "에도시대에는 표류민 송환 제도가 정비되고 있었기 때문에 표류한 조선인은 표착지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밝혔다. 이들중엔 나가사키를 경유해 송환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도 있어 표착지에서 자력으로 나가사키까지 가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 진선희·백금탁기자

'표차왜' 파견 늘수록 조선에 부담

표류인 송환해오면 연회 베풀고 답례 예물


일본에 표류한 조선인들은 대개 홀로 오지 않았다. 표차왜로 불리는 이들이 동행했다. 표차왜는 막부를 대신해 송환에 관한 대마번주의 외교문서를 지참해 표류민을 호송해오는 외교사절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표차왜의 조선 파견 횟수는 600회 가량 추산된다는 주장이 있다. 표차왜가 조선으로 드나드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정부는 부담을 느낀 듯 하다. '표인영래등록'에 그런 대목이 나온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18세기 일본 에도시대(18세기)에 제작된 대마도 지도.
김월선 일행을 인솔하고 온 표차왜가 지닌 서계(외교문서)엔 대마주가 약소하나마 토산물 약간을 보낸다고 되어있다. 조선에서는 이에 두차례 연회를 베풀고 예단과 잡물을 전례대로 마련해준다. 흰 명주 3필, 흰 저포 3필, 검은 마포 2필, 흰 목면 5필, 황모필 20자루, 꽃자리 2장, 참먹 20홀 등이 잡물 목록에 있다. 김이운 일행때도 답례로 인삼 1근, 호랑이가죽 1장, 표범가죽 1장, 흰 명주 5필, 흰 저포 5필, 검은 마포 3필, 흰 목면 10필, 황모필 30자루 등을 챙겼다.

바닷길을 건너야 하는 한, 표류인의 발생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조선 표류민을 데리고 온 차왜에게 매번 연회 예단과 잡물을 접대해야 하는 조선정부의 처지는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제주 표류민 조사를 맡던 관리는 '표인영래등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배는 멀리 떠날 수 없고 외양(外洋)은 일찍이 금령(禁令)으로 되어있습니다. 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관청은 항상 당부하지를 못하여 다른 국경에 표류해 들어간 행동이 있기에 경계하고 처벌할 방도가 없을 수 없으니 해당 지방관인 제주목사를 중하게 추고(推考)하여 뒤를 징계할 처지로 삼음이 어떻겠습니까."

이와관련 이훈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실장은 "접대비 부담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대마도 표차왜의 조선 파견 기회가 늘어난 것은 조선시대 전체로 봤을때 민간 차원에서 발생한 표류 사고가 외교 차원에서는 조일간의 의사소통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오해와 불신을 없애는 것은 물론 긴장 완화 역할을 했다고 본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