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8](7)15세기 명나라 종단기
표류가 낳은 중국 대운하 조선인 첫 기록
입력날짜 : 2009. 04.1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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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상 당해 1487년 나주 향하다 42명과 중국 표착
1488년 음력 2월 초4일 중국 소흥(紹興)부. 조선에서 표류해온 일행을 앉혀놓고 재심이 이루어진다. 왜구로 몰려 집단학살당한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후였다. 심문이 이루어진 장소는 살벌했다. 병기, 갑옷, 태, 곤장 따위가 그들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명나라 관리가 묻는다. "소위 제주 사람들을 찾아내어 잡아간다(推刷)는 것은 무슨 일이오?" 이에 조선인이 답한다. "제주는 큰 바다 한가운데 있고 바닷길이 매우 험하고 멀어 무릇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모두 도망하여 들어가 피하니 오래 되면 범죄 소굴이 되므로 가서 이를 잡아내어 오는 것이오."
▶도망친 범죄자 잡으러 제주로
그 험한 제주 바닷길을 건너 추쇄 경차관으로 파견됐던 금남(錦南) 최부(崔簿·1454~1504)가 그 바다에서 운명이 갈릴 줄 예상이나 했을까. 1487년(성종 18년) 9월에 추쇄 경차관으로 제주에서 일을 보던 최부는 부친상을 당해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돌아가던 중 표류해 중국 명나라까지 떠밀려간다. 모진 고난을 겪고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 그가 그동안 보고 겪은 일을 글로 적어 임금에게 바친 게 그 유명한 표해록이다.
표해록은 1488년 윤 1월 3일 별도포에서 일행 42명과 함께 배를 띄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때 제주사람만 35명이었다. 하지만 흑산도 부근에서 풍랑을 만난다. 절강 연안 태주부 연안에 표착한 이들은 항주(抗州), 소주(蘇州), 서주(徐州), 천진(天津), 북경(北京)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국땅을 밟기까지 최부 일행이 길 위에 뿌린 시간은 150일에 가깝다. 반년 가량 이국땅을 돌고 돌았다.
중국 표착 당시 최부의 나이 서른다섯. 표류한 일행이 40명이 넘었지만 어느 한 사람 다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최부는 이 점을 의식한 듯 표해록에서 이들 일행에 앞서 정의사람들이 현감 이섬을 따라 나서 중국에 표류했을 때는 죽은 이가 자못 많았고 구속됨도 심했다고 적었다.
기행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최부의 표해록은 중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다. 기실 표류는 정식 사행인 연행사(燕行使)나 통신사(通信使)에 비하면 '궤도이탈'이다. 비공식적 집단인 표류인들은 비일상적 사건속에서 박진감 넘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최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표류라는 뜻밖의 사건을 통해 북경-항주 대운하가 개통된 이후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전 구간을 기행한 기록을 남겼다. 각 지방에 대한 촘촘한 기술은 물론이고 다녀온 길, 만난 사람 이름, 먹을 거리까지 상세히 썼다.
영역본으로 서양에 최부의 표해록을 소개했던 존 메스킬은 "크나큰 곤경에 직면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자기 경험과 원칙을 모든 행동에서 고수한 최부의 모습에 큰 인상을 받았다"면서 "그가 기록한 것 대부분은 현재에도 명나라의 정치문화를 연구하는데 유용하다"고 했다.
▶절강성에서 본 수차 직접 제작
절강성에서 처음 본 수차(水車)를 만들어낸 점도 특이하다. 성종의 긴급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표해록을 탈고한 지 얼마되지 않은 때에 최부는 귀국길에 호송군관에게 들었던 제작법을 기억해 수차를 만들어낸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조선에 수차를 도입해야 겠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이후 연산군때 충청 지방에 가뭄이 들자 최부는 현지로 가서 수차를 직접 제조해 이용하도록 돕는다.
▶표류 직후의 인간 군상 적나라
최부의 표해록에서 눈여겨봐야 할 또하나의 대목은 중국에 표착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바다에 목숨을 내맡겨야 했던 표류 직후 14일간의 기록은 드라마틱하다. 표류 이틀째, 최부는 배 안의 물을 퍼내고 배를 수리하도록 명하지만 군인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관노 오산은 끈으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한다. 출항을 고집했던 안의는 "짠물을 마시고 죽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게 낫다"며 활시위로 목을 매려 했다.
굶주림과 갈증을 이겨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도 이어진다. 배 안의 짐을 모조리 뒤져 술 두 동이를 가지고 입술이 타는 사람들에게 혓바닥만 적시게 하다가 그마저도 바닥이 나자 오줌을 받아 마신다. 얼마 안가서 오줌마저 말라 버린다. 때마침 비가 오자 선실 추녀에서 떨어지는 물을 손으로 받아먹기도 하고, 삿갓으로 거기서 떨어지는 물을 모으기도 한다.
6월 초4일 최부 일행은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 밤 11시쯤 말을 달려 의주성으로 들어간다. 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이다. 그 감격이 오죽했을까 싶지만 최부의 표해록은 국경도시의 초라함을 한탄하는 것으로 끝이난다. "의주성은 정히 중국 사람과 오랑캐들이 왕래하는 요충지에 해당하나, 성의 제도가 협소하고 무너져 떨어지고 성안의 마을이 보잘 것 없어 진실로 가히 한스러웠습니다."
/진선희기자·백금탁기자
어명으로 喪中에 기록
일본어판·영역본 등 해외서 관심
최부가 서울에 도착하자 성종은 그에게 표류일기를 제출하라고 명한다. 5년전에도 최부처럼 명나라에 표착했던 정의현감 이섬의 표류기를 홍문관에서 작성한 사례가 있었다. 예법대로라면 최부는 전라도 나주로 가서 복상(服喪)해야 하지만 임금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길로 남대문 밖에 여러 날을 머물면서 중국에서 견문한 것을 일기로 찬진(撰進)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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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중에 이루어진 최부의 '선택'에 대해선 말들이 많았다. 윤치부 제주대교수는 '한국 해양문학 연구-표해류 작품을 중심으로'란 연구 논문에서 "상을 당한 최부가 아무리 군명(君命)이라 할지라도 한가롭게 일기나 쓰고 있었던 것은 군자의 도리에 어긋나며 상주의 예를 다하지 못했다 하여 끊임없는 시비거리가 되었다"고 했다.
이같은 '산고' 끝에 나온 최부의 표해록은 조선시대에 다섯번이나 간행될 정도로 주목을 끌었다. 일본에서는 1769년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사진)'라는 이름으로 번역됐다. 기요타 기마카네(淸田君錦)가 번역한 글에다 삽화가 곁들여진 이 책은 식자층에서 많이 읽혔다. 존 메스킬이 영역하고 주석을 붙인 '금남표해록역주(Choe Pu's Diary, A Record of Drifting Across the Sea)'도 있다. 이밖에 '성종실록', '패관잡기', '해동잡록' 등 여러 문헌에 그 내용이 축약돼 실려있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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