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삼국(위) - 혜강/하안/종요

지식창고지기 2009. 8. 8. 23:45

혜강


233 ~ 262.


중국의 도가·연금술사·시인.

인습에서 벗어난 사고와 행동으로 중국사회에서 주목을 받던 죽림7현(竹林七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위(魏)나라의 유력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고, 위 종실의 사람과 결혼해서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 허난 성[河南省]에 있는 그의 집 근처 대나무 숲에서 유명한 6명의 친구들과 어울려 바둑·춤·술 등을 즐겼다.

자신의 괴벽에 대한 해학적인 묘사와 함께 그의 사상이 섞여 있는 시와 산문들은 도덕과 관습을 벗어나 무위자연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부(富)와 빈(貧), 강과 약, 선과 악의 모든 경계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숙련된 금속세공인이 되고 연금술에 몰두함으로써 당시 손으로 하는

노동을 천하게 여기던 유학자들을 경악시켰다.

그러나 인습을 벗어난 행동과 선동적 성격이 다분한 그의 사상은 불행의 원인이 되었다.

그는 귀공자(貴公子)인 종회(鍾會)에게 무례한 태도로 대함으로써 그의 분노를 샀고 이때문에 반란죄의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3,000명이 넘는 제자들이 그를 대신해서 극형을 받기를 원했으나 그는 평온하게 피리를 불며 처형당했다.

 

 

하안 何晏


193(?)~249. 


중국의 현학가·청담가.

남양(南陽) 완현(宛縣 : 지금의 허난[河南] 난양[南陽]) 사람이다.

한(漢) 나라의 외척 하진(何進)의 손자이다.

어려서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노자와 장자의 학설을 따랐다.

어머니 윤씨가 조조(曹操)의 첩이 됨에 따라 궁에서 자랐으며, 후에 위(魏)나라의 공주와 결혼했다.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가 위나라를 세운 후에 궁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조상(曹爽)이 권력을 잡은 후 그의 심복이 되어 이부상서(吏部尙書)의 자리에 올랐다. 

후에 사마의(司馬懿)에게 살해당했다.

하안과 하후현(夏侯玄)·왕필(王弼) 등은 현학(玄學)을 창도하여 일대 새로운 기풍을 일으켰다. 

하안은 도교의 술어와 개념으로 유가경전을 해석했으며, 또한 유가의 사회윤리를 도가사상에 부화시켰다.

그는 '천지만물이 무(無)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여겼으며, 세계의 본체는 '무'이고 모든 사물의 존재는 모두 '무'에 의존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상의 주장은 '군주는 무위(無爲)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서로는 〈도덕론 道德論〉·〈무명론 無名論〉·〈무위론 無爲論〉·〈논어집해 論語集解>가 있다.

 

 

종요 鍾繇


151~230.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대신·서예가.

자는 원상(元常). 영천(潁川) 장사(長社 :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창거 현[長葛縣]) 사람이다. 

일설에는 쉬창[許昌] 사람이라고도 한다.


조조(曹操)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관중(關中)지방을 수비했는데 그 공적이 탁월했다.

위나라가 한나라를 무너뜨린 후, 정위(廷尉)·상국(相國)·태위(太尉)·태부(太傅)의 관직을 역임했다. 

서예를 익히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는데, 조휘(曹喜)·채옹(蔡邕)·유덕승(劉德升) 등을 본받았으며, 여러 사람의 장점을 폭넓게 수용했다.

명석(銘石)·장정(章程)·행압(行押) 3체에 고루 뛰어났다. 〈상존호주 上尊號奏〉· 〈수선표 受禪表〉 등의 명석서는 예서(隸書)로 힘이 넘치며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

장정서·행압서로는 〈융로표 戎路表〉·〈선시표 宣示表〉· 〈선계직표 薦季直表〉· 〈역명표 力命表〉·〈조원표 調元表〉·〈묘전병사 墓田丙舍〉·〈환시 還示〉· 〈설한 雪寒〉 등의 첩(帖)이 있다.

이 첩들은 모두 후인이 모사한 것에서 나왔으며, 이것들을 통해 그가 예서(隸書)와 해서(楷書)에 더욱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법사상 그는 해서로 발전해가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함으로써 왕희지(王羲之)와 더불어  '종왕'으로 병칭되었다.

왕희지는 일찍이 그와 장지(張芝)를 배웠다.

남조(南朝)와 당대(唐代)에는 그와 장지·왕희지·왕헌지(王獻之) 4명이 함께 서예계의 최고 본보기로 추앙받았다.

진(晉)의 무제(武帝)는 서학박사(書學博士)를 설치하고 종요를 종법으로 삼을 것을 명했다.

서진·남북조 시대에도 모두 그를 배웠는데 북조에는 더욱 두드러졌다.

장쭤[江左]에서는 왕희지 부자가 나왔으나 여전히 종요를 서가의 거장으로 기렸다.

당·송대 이후에 해서·행서(行書)를 쓰면서 고고하고 중후한 멋을 추구했던 안진경(顔眞卿)· 주희(朱憙)·송극(宋克)·예원로(倪元?·황도주(黃道周)·팔대산인(八大山人)·석도(石濤)· 유용(劉墉) 등 저명한 서예가들은 누구나 그에게서 정수를 흡수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저서로는 〈서법십이의 書法十二意〉가 있는데, 양 무제와 장욱(張旭)·안진경 등이 자세한 주석서를 써서 서학(書學)에 공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