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삼국(촉한) - 등지/마대/마등/마량

지식창고지기 2009. 8. 9. 07:18

등지 鄧芝

? ~ 251


촉한의 문신.

의양 신야 사람으로 자는 백묘(伯苗).

후한의 명장 등우의 자손.

강직하고 식견이 뛰어났으며 담력이 있는 한편 구변도 좋았다.

유비를 받들어 정무를 담당했고, 그가 죽었을 때 원한을 잊고, 동오와 수호하여야 되겠다는 판단은 제갈량과 일치한 점이 있었다.

자주 동오 사이에 사신으로 다니며 우호 관계를 계속 지키기에 진력하였다.

관직은 대장군 양무정후에 책봉됨.

공명 1차 정벌에서 조운과 활약, 제갈량의 북정에 참가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중직을 역임하며 국정을 맡아보았다.

천수를 다하고 죽음.

 

 

마대 馬岱

? ~ ? 


촉한의 대장.

서량태수 마등의 형의 아들.

마등이 조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였을 때,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여 변장하고 도망가 이 소식을 고향에 전하였다.

뒤에 사촌 마초를 도와 숙부의 원수를 갚으러 여러 차례 싸웠고, 패한 뒤에도 계속 마초와 행동을 같이하여 촉한의 대장으로서 활약하였다.

제갈량의 신임을 받아 크고 작은 싸움에 계속 참여하여 그때마다 실수 없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제갈양 사후, 양의와 위연의 대립에서 양의의 명령을 받고 도망치는 위연을 추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마등 馬騰

? ~ 211 


서량태수.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으로, 자는 수성(壽成). 농서 사람.


영제 말엽, 탕구우트족의 반란을 진정한 공으로 초평 년간에 정서장군 괴리후에 책봉되었으며, 진서장군 한수와는 형제의 의를 맺고 지냈었다.

장안이 동탁의 잔당들 손에 들어갔을 때도 근왕병을 이끌고 올라왔으나, 날짜를 끄는 통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워낙 본거지가 멀기 때문에 시일을 끄는 것은 식량의 수송 관계로 언제나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조정에 있어서는 조조의 횡포를 미워하여 동승을 통해 의대조를 받들고, 이내 고향으로 돌아가 군사를 길렀다.

적벽대전 후 조조는 설욕차 남침하고 싶었으나, 그의 후방 교란이 염려되던 중 순유가 꾀를 내어 벼슬을 돋우어 서울로 불러 올렸다.

마등 자신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간적을 치려는 계획이었는데, 조조의 응대차로 보낸 황규가 조정 중신 황완의 아들이라, 서로 뜻이 통하였다.

그러나 황규 집안의 사소한 사고로 일은 탄로나 부자가 함께 죽음을 당하고, 형의 아들

마대만이 목숨을 건져 서량으로 도망하였다.

아들 마철, 마휴도 함께 목숨을 잃고, 장자 마초만이 고향에 남아 마대와 함께 조조를

쳐서, 여러 번 곤경에 몰아 넣었었으나 그때마다 성공치 못하고 나중에 유비에게로 가서

활약하였다. 

 

 

마량 馬良

187 ∼ 223


유비의 막하 모사.

본시 유표의 수하였던 이적이 천거하였다.

누대 형주에 살았는데, 5형제 중 눈썹 사이에 흰 터럭이 있는 이가 제일 출중하다 하여, 백미라는 이름이 생기게 한 장본인이다.

양양 의성사람으로 자는 계상(季常).

다른 네 형제도 모두 출중한 가운데, 마속은 그의 아우요, 자를 유상(幼常)이라 하였다.

제갈량과는 유달리 형제같이 친한 사이였으며, 관직은 종사로 동오와 친선을 유지했고,  형주를 맡던 관우의 보좌관이 되었다.

후에 여몽의 계략으로 형주는 함몰되고, 다시 형주를 되찾으려는 유비를 따라나섰으나 결국 패했고, 그 어지러움 속에서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