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만든 인도의 타즈마할. 세계 건축의 걸작이다. | |
'주말&엔'은 여행전문가인 장순복 대륙항공여행사 대표의 세계 명소 기행을 2주일에 한 차례씩 연재한다. 더 넓은 곳을 보기 위해 지구촌 곳곳을 누빈 장 씨는 세계의 명소들을 보면서 느낀 점과 역사적 배경 등을 독자들에게 소개할 예정이다.
'왕관모양의 궁전'이란 뜻의 타즈마할은 인도북부 아그라의 야무나 강가를 배경으로 서 있다. 고혹적이면서 웅장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다.
타즈마할 경비대는 입구에서 항공기 탑승수속대 수준의 보안시스템을 갖추고 여행자의 가방과 온몸을 수색한다. 라이터까지 보관시킬 정도로 검문이 엄한데, 너희가 안오고 배기겠느냐고 배짱 내미는건지 매년 입장료를 올리고 있다. 타즈마할 대문에서 타즈마할까지의 거리는 100m. 문을 통과하는 순간 우아한 아름다움에 순간적으로 넋을 빼앗긴다. 타즈마할을 보기 위해 인도에 왔다는 여행자들의 기대를 충분히 보상해줄만큼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인도를 상징하는 타즈마할은 사랑으로 완성한 영혼의 안식처, 시간의 뺨에 흐르는 눈물, 인류역사에 남겨진 사랑의 판타지, 시공 속에 드리워진 사랑의 대서사시, 허망한 역사의 골육상쟁속에 피어난 순애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표현으로 대변된다.
타즈마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즈마할을 만든 무굴황제 샤자한이 왜 타즈마할을 만들게 됐는지 알 필요가 있다. 육친 간의 왕권 도전은 어느 왕조에서나 있어왔지만 인도의 이슬람왕조(1526~1857) 무굴제국의 역사 역시 골육상쟁의 바이블이다. 무굴제국을 창시한 바브르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점령한 뒤 1526년 인도의 델리 왕조인 로디조(1451~1526)의 아브라힘왕을 델리북부의 파니파투전투에서 물리친 뒤 왕조를 세운다. 바브르의 장남 후마윤은 왕이 된 뒤 아프간 출신들의 장군과 동생들에게 축출되어 1540년 페르시아로 도망간다. 이후 1555년 왕권을 되찾았으나 이내 죽고 그 뒤를 이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아크바르는 영토확장 및 지배체제의 탁월함으로 대제라 불리웠지만 아들 제항기르의 반란으로 빛을 잃는다. 제항기르의 셋째 아들 샤자한 역시 반란을 일으켰다 패한 뒤 제왕기르가 죽자 왕위다툼이 벌어졌을때 왕비 뭄타즈마할의 친정아버지 아스프칸의 지원으로 35세때 왕위에 오른다.
페르시아 공주였던 뭄타즈마할은 동갑내기 샤자한의 두 번째 아내였는데 20살때인 1612년에 결혼, 미모와 지혜로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남편이 원정갈 때마다 동행하는 일이 많았는데 1631년 전쟁터에서 열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다 죽게된다. 뭄타즈마할 왕비는 숨을 거두기 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황제로부터 4가지 약속을 받아낸다. 자신을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줄 것과 재혼할 것, 아이들에게 애정을 기울일 것과 기일마다 무덤을 찾아줄 것 등이다.
데칸의 전투가 일단락되자 샤자한은 아내가 죽은 이듬해(1632년)부터 무려 22년 간 공사를 진행한다. 이란의 건축가인 이스타드 우사가 설계를 맡고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중국의 기술자와 더불어 인부 20여만 명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한 여인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인 타즈마할을 만든 샤자한은 국가재정이 바닥났음에도 불구하고 검은색 타즈마할을 또 지으려다 셋째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쫓겨난다. 샤자한은 아그라성 포로의 탑에 8년 동안 갇힌 채 왕비의 묘를 사무치게 바라만보다 죽는다. 알람기르(세계의 정복자)란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 아우랑제브는 형과 동생까지 죽이지만 그도 아들의 반란을 겪은 후 병을 앓다가 죽었으니 무굴제국의 역사는 피바람의 연속이었다.
샤자한은 그의 사랑을 찬란하고도 신비롭게 표현하고자 아름다운 타즈마할을 남겨 인도의 별이 되었다. 세상사람들이 탄성을 지를만큼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기 위해 오늘도 타즈마할은 인파로 넘친다. 보름달 밤에 타즈마할을 볼 수 있다면 그는 신의 선택을 받은 여행자다.
장순복·대륙항공여행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