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스크랩] 한국고대문화가 일본문화의 뿌리 - 미 사학자 코벨

지식창고지기 2009. 5. 2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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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천마총 천마도 - 국보 207호

 

 

 

칠지도 - 백제왕세자가 왜왕에게 하사한 신검

 

 

 [이하 출처 - 신동아]

 

글: 존 카터 코벨, 앨런 코벨
편역: 김유경

발행일: 2005 년 05 월 01 일 (통권 548 호)

쪽수: 324 ~ 339 쪽

 

[발췌]

 

 

[특별기획|역사 모독하는 일본]

존 카터 코벨, 앨런 코벨

일본이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폭로한 서양 학자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2~96) 박사가 그 주인공.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을 벌였다.
1978~86년엔 한국에 머물며 한국미술, 한국불교, 한일 고대사, 도자기 등에 대한 1000여 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 ‘조선호텔 70년사’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저서를 펴냈다.
그의 아들, 앨런 코벨 박사 역시 부여족을 연구하며 한일관계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다음의 글은 1982~83년 존(사진 왼쪽)과 앨런 코벨이 한국과 일본 역사적 진실에 대해 쓴 칼럼을 요약한 것이다


 

 

 

①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 신라의 천마도. 일본의 스사노오노 역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② 백제 근초고왕 때 왕세자가 왜왕에게 하사한, 7개 곁가지가 있는 칼 ‘칠지도’.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씌어진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라(奈良)의 왜(倭) 지배자들은 일단의 학자들에게 사서 편찬을 의뢰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타이왕 이전까지(또는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 천황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해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臣)은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 미코도(素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일본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 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권했다.

한국의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갔다.

석굴암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1980년 나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3대의 영사기로 컬러 슬라이드를 비춰가며

한국·중국·일본의 예술형태를 통해 극동의 세 나라를 비교하는 강연을 했다.

세 나라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을 찾다가 영어의 C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떠올렸다.

중국은 통제(Control), 한국은 무심함(Casual), 일본은 작의적(Contrived)이라고.

이런 대비는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 도자기는 가마와 유약의 사용을 철저하게 관리한 결과 특히 도자기에서 완벽의 경지를 이뤄냈다.

한국의 도공은 언제나 자연스럽기 짝이 없고 무심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에는 도공의 기질과 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일본인들은 15세기 이도다완 전쟁에서 보듯, 이러한 한국적 무심함을 높이 취해서 과도하게 발전시킨 나머지,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의 미를 주려고 한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도자기의 이런 무심함은 솔직함과 통한다.

내가 일본의 교토보다 서울에서 더 편히 지내는 이유는 지극한 미소로 일관하는 교토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서울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

 

...다음해인 1976년 여름에 접한 한국의 풍류는 보다 명확해 보였다.

풍류는 엘리트를 위한 절묘한 음식맛이 아니라 시인 김삿갓이나 기생 황진이가 그런 것처럼

솔직하고 매인 데 없이 사물을 즐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풍류에는 ‘인생은 흘러가는 것, 머잖아 죽음이 올 테니 우리는 살아가야지’ 하는 실존적 느낌의 움직임이 가득했다.

서예에서도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은 차이가 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유명한 선승들의 붓글씨 어느 것이나 그러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한국의 서예는 글씨가 자연스럽게 흐르고 무심한 경지를 보인다.

일본 서예에서는 작의성이 엿보인다.

 

 

영국 사학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영국에서 일본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조지 샘슨 경은 컬럼비아대학 재학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내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한 9명의 위원 중 한 사람이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살아온 조지 샘슨은 저서 ‘1334년까지의 일본사’에

‘이즈모 후도키(出雲 風土記)에 전해지는 일본 고대사의 흥미로운 전설’에 대해 썼다.

‘이즈모 후도키’는 713년에 나온 책이다.

당시 겐메이(元明) 여왕은 각 현에 그 지방의 역사와 지리, 희귀한 일 등을 기록해놓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3군데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라에서 온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던 이즈모(出雲)에 관한 것이다.

이즈모는 적어도 2~4세기 당시에는 일본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샘슨이 후도키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신이 어느 날 살펴보니 한반도 남부에 땅이 아주 넓었다.

그래서 신라 땅을 조금 떼어내 바다 건너로 끌어다가 이즈모 자리에 붙였다.’

 

‘땅 끌어가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빙하시대의 지표이동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샘슨 경은 “이것은 남아돈 땅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주한 것을 민간 설화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침입한 것이 아니라 이주해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신라 사람들이 대규모 이즈모로 이주해 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석기시대 일본에는 인구가 아주 적었으므로, 많은 한국인이 오늘날 미국 이민을 떠나듯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당시 일본으로 가 정착한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오빠이며 일본의 역사서에 ‘맹렬한 남성’으로 기록된 스사노오노는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운데서도 아주 정력적인 남자였던 듯하다.

‘그는 김해에서 바다 건너로 금과 은을 보냈다’고 한다.

또 신라지역인들의 무속적 지도자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히로히토 천황도 1930년대 거동할 때 흰말을 탔다.

1973∼74년 천마총 고분에서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경 신라의 천마도가 발굴됐다.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일본)역사는 620년 성덕태자와 그의 삼촌이자 권력가인 소가 우마코(蘇我馬子)의 합작으로 편찬됐다.

소가 우마코는 한국인 후손으로 일본 내 최고 군사권력자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645년 소가 가문이 권력을 잃게 되자 그가 쓴 역사서들도 불길 속에 던져졌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 책의 일부가 불길 속에서 건져졌다고 한다.

 

두 번째 역사 편찬은 덴무(天武) 일왕 때 시도됐다.

당시 오랜 역사를 모두 기억하는 신하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옛이야기를 모두 글자로 기록하라는 임무가 학자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천황이 바로 죽고 다음 대에 넘어가도록 아무 진척이 없었다.

결국 712년에 와서야 구전 역사를 고사기로 편찬했고 이것이 실존하는 최고(最古)의 일본 역사서가 됐다.

 

이 책은 한눈에도 엉성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한국인들의 놀라운 위력을 입증하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것이기에 이를 완전히 감춰버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몇 년 동안 나는 칼럼을 통해 일본의 미술사가들이 이미 극동의 예술사를 자기네 뜻대로 다시 썼으며, 그에 따라 한국인이 만든 예술품 다수가 일본 예술의 범주에 편입돼버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 내엔 ‘좋은 것은 무조건 일본 것’이라는 사고가 아직(1982년)도 팽배해 있다.

일례로 그들은 진위 여부는 가리지 않고, 7세기 아스카 불교 미술품들도

단지 일본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것이 아닌 일본 것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나는 법륭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아스카시대 불교예술품이

한국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하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왔다.

 

그러자 일본 태생의 한국인 학생 하나는 내 강의를 ‘아집’으로 간주했다.

예술사가인 나는 거만한 일본 미술사가들이 7세기 일본의 중요한 국보급 미술품들이

한국적 진수가 담긴, 한국인 손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나는 1930년대 일본에서 살았고 당시의 지배적 정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안다.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그때와 똑같은 정신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친군국주의, 또는 네오 군국주의라고 불러도 좋다. 본질은 같은 것이니까.

선량한 일본사람들은 1930년대의 그러한 군국주의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던 날 밤, 나는 일본공보관에서 다몬 마에다 관장과 얘기를 나눴다.

미국 FBI 관계자가 1시간 전쯤 그곳에 와 있다가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관장은 책상 유리판 위에서 무슨 서류를 태우고 있었다.

관장은 한마디로 충성스런 일본인이었다.

그는 사상이 자유로운 사람이어서 맥아더 장군은 일본 패전 후 유일하게 그가 도쿄시장으로 나서는 것을 막지 않았다.

관장과 나 두 사람 모두 일본이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 껴안았다.

“이건 무서운 실수요.”

그는 계속 그렇게 말했다.

“군부가 저 잘났다고 그러는 거요. 시민은 그 사람들을 말릴 수가 없어요.”

일본은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1920~40년대의 정신을 되풀이하려는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은 과연 군부의 도전적인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것인가.

 

 

솔직히 나는 중동이 세계문제의 중심이라고 보지 않는다.

석유는 중요한 것이지만 세계는 지난 수천년간 석유 없이도 지내왔고 앞으로 대체연료를 찾아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극동문제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한국은 거기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냐 마냐의 문제는 나이든 한국인들이 걱정하는 감정적 차원을 넘어선 세계적 문제거리다.

정직이 통하지 않고 계속 핍박당한다면 어떻게 평화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역사상 일본 천황 혈통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 역사교과서에 써놓은 것처럼 일본왕통이 서기전 660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4세기 들어 처음 생겨난 일본왕가는 바로 우수한 무기와 기마병을 이끌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한국 부여족이다.

505년에 일시적으로 교체됐으나 부여족은 계속 중요한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다가

6세기 후반에 가서는 통치권을 장악했다.

 

14세기 일본 大화가 80%는 한국인

 

오늘날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왜곡의 맥락에서라면 머잖아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한국인 도공을 ‘초청’해다가

‘일본에 파견근무’케 하고 이들에게 ‘무료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기술을 이곳에 전파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5~6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한 스에키 토기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1000여 년 동안 일본 도공들은 한반도에서 온 도자기 기본을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16세기에 들어 그들은 조선 도자기산업의 새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꼈다.

새 피의 수혈은 뛰어난 기술혁신을 가져다 준 것이기에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한국적 착상에 힘입어 발전을 이룩했다.

 

일본문화사에서 한국의 영향을 모두 제거한다면 남아나는 것이 거의 없다.

적어도 서기전 3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그러하다.

순수한 일본 고유 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는

대궐 사람들 중 누가 제일 한국춤을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였다.

 

일본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14세기 새로운 수묵화의 기법은 사실 조선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수묵화를 그린 화가들 중에 조선 출신의 수묵화가이던 선승(禪僧)들을 다 추려낸다면

일본이 뽐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다.

적어도 일본이 내세우는 14세기 수묵화 대가의 80%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도 조선에서 유입된 사상과 노동력이 일본의 예술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1983년 2월 한국을 찾은 나카소네 총리(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83년 2월 신문은 전두환 대통령과 나란히, 한국을 방문한 나카소네 일본 총리의 사진을 실어 보여주기 바빴다.

나는 수년간 한일 양국에서 생활하며 전형적인 한국인과 전형적인 일본인의 얼굴을 구별해 알아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전 대통령과 나카소네 총리의 사진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나카소네 총리의 얼굴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다케오 후쿠다 전 일본총리는 대중 앞에서 그의 조상이 1500여 년 전 한반도에서 규슈로 이주해온

도래인(渡來人) 혈통임을 공표했다고 들었다.

나는 나카소네 총리의 가계 또한 후쿠다 전 총리처럼 먼 조상이 한반도에서 이민 온 집안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문화사를 공부하는 내가 들은 나카소네의 만찬 연설 중 핵심은

“6, 7세기 일본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해준 기술과 문화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한 부분이다.

이제 일본의 지도자들이 그들이 진 빚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할 때다.

나카소네 총리는 그들이(한국에) 진 문화적·기술적 빚이 6, 7세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그 이전인 5세기 전체, 부여족의 혈통으로 일본 천황자리가 채워졌던 시대까지 걸쳐 있다고 언급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나는 나카소네 총리의 우호적인 말들이 새로 씌어질 일본 교과서에 반영됐으면 한다.

 

 [이상 모두 퍼온 글]

출처 : 청산녹수
글쓴이 : 푸른 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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