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일본의 개화기 상황과 인물들

지식창고지기 2009. 5. 20. 21:23

 

 

일본의 개화기


교육- 일본에서는 관리와 일반 백성 사이에 신분상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관료, 지배계층, 백성과 같이 확연하게 계층을 나누지 않았다.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아서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 국민의 절반 정도가 글을 읽을 수 있었다. 19세기 중엽 세계적으로 식자율이 50퍼센트에 달한 나라는 영국밖에 없었다. 식자율 50퍼센트는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것이었다.


개방성- 일본인들은 개항을 좋은 일로 받아들였으며 적어도 당시 막부는 개항에 적극적이었다. 외국인을 배척하는 양이운동도 했지만 외국에 대해서는 대개 적극적이었다.


요시다 쇼인- 일본 근대 사상가. 메이지 유신의 선구자. 페리의 구로후네를 찾아갔다. 쇄국양이를 주장하는 쪽이었다가 얼마 후 개국양이를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 선회. 천황을 중심으로 일군만민제(一君萬民制) 수립을 주장했다. 유럽과 미국으로 인해 입은 손실을 조선과 중국의 영토를 점령해 충당할 것을 강조했다. 즉 서양에서 잃은 것을 동양에서 보충하고 국력을 길러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하자는 이론이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구사카 겐즈이, 다카스기 신사쿠, 아마가타 아리토모 등 모두 도막유신파의 주도적 인물이며, 훗날 메지지 정부가 논공행상을 통해 작위나 관직을 수여할 때도 그의 문하생이 무려 37명이나 포함되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페리의 구로후네에 일본 청년 2명이 몰래 올라갔다. 페리 제독에게 직접 손짓한 후 이 배를 탔다. 미국이 왜 그렇게 강대한지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구경했다. 국법에 의하면 사형이었다. 페리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일본인 두 명의 학구열이 날 감동시켰다. 모든 일본인이 그들과 같다면 일본은 분명 미국처럼 강대국이 될 것이다.”


이후 14년 후 시부사와 에이이치라는 젊은이가 유럽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867년 27세의 시부사와는 일본 대표단 일원으로 프랑스에 도착해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석했다. 신기한 공산품, 사람의 손을 대신하는 방직기계 등 그에게는 서양의 산업화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그는 프랑스를 거쳐 벨기에에 도착했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그를 접견한 자리에서 국가의 발전은 공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철의 사용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일본이 벨기에 철을 수입해 줄 것을 희망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외국 사절에게 자국의 제품을 사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보고, 시부사와는 상공업이 서양국가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 깨달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배웠다. 유교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은 다른 일본인들처럼 상인은 사사로운 이익만을 취하려는 소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벨기에 국왕과의 만남을 계기로 그의 고정관념에 변화가 생겼다. 1868년 11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완전히 새로운 사상에 흠뻑 취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그는 메이지 정부의 재정 관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신정부의 화폐 제도 개혁, 폐번치현, 공채 발행 등 굵직굵직한 정책 입안에 참여했다. 1873년 33살의 시부사와는 이미 국가예산을 총괄하는 자리에 올라 있었다. 유럽에서 쌓은 견문과 천부적인 재능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벼슬길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관직에서 물러나 직접 기업계에 투신했다. 메이지 유신이전 일본에서 상인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관직에서 물러나 상인으로 변신한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적 인물이었다. 그의 이 결정으로 사람들은 장사꾼이 비천하지 않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경제계로 뛰어든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일본최초의 주식제 은행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기업가로서의 거의 전기적인 생애가 시작되었다. 그는 점차 해운, 조선, 철도, 방직, 맥주, 화학비료, 광산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880년대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일본 상공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일생 동안 무려 500개가 넘는 기업을 설립한 시부사와는 ‘일본 현대 기업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사업에 뛰어는 그 날부터 중국의 유교경전인 <논어>를 행동지침으로 삼았다. 곳곳을 돌며 일본인들에게 한손에는 논어를 들고 한 손에는 주판을 든 기업가가 될 것을 호소했다. 그는 의리합일(義利合一)의 경영이념을 제시했다. 


오쿠보 도시미치- 1871년 약 100명의 정부사절단이 요코하마항을 출발해 구미 각국을 돌며 견학했다. 사절단에는 메이지 정부 전체 관리의 절반에 가까운 고위관리 49명이 포함되었다. 이 밖에도 58명의 유학생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중 5명은 일본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었다. 성립된 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메이지 정부는 그해 재정수입의 2퍼센트를 이 사절단에 쏟아부었다. 1년 하고도 10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구미 12개국을 돌며, 100권에 달하는 견학 실록을 작성했다. 일본은 물론 아시아와 서양 세계의 교류사를 통틀어도 이와쿠라 사절단만큼 정부가 거액을 투자하고 고위 관리가 대거 포함되었으며, 또 시찰 기간이 길었던 사절단은 없었다.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끄는 사절단은 구미각국을 돌아보고 처음에는 놀랐고, 다음에는 도취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거의 미쳤다. 그들은 서약의 발달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미친듯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사절단은 서양에서는 근대 과학 지식과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고 유형의 학문을 강조하는 반면 동양에서는 무형의 학문을 강조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동서양의 빈부 격차를 초래한 원인이라 보았다. 다시 말해 일본은 과거 2,000년 동안 꿈속에서 산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탄했다. 사절단은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연설을 듣고 그의 강권정치에 감탄했고, 국가가 나서서 산업발전을 주도하는 독일의 발전모델에 완전히 심취했다. 비스마르크는 사절단에게 “약소국이 자주적으로 독립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군사력을 증강해야 하고 내무와 외교 중에서는 내무를 우선으로 돌보아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귀국 후 일본의 산업화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사절단 부단장이자 동양의 비스마르크를 자처하는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귀국 후 참의 겸 내무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메이지 정부의 실권을 쥐고 현대화를 향한 강하고 빠른 발걸음을 내딛었다. 식산흥업계획에 따라 서양에서 직접 프랑스식 제사공장과 독일식 광산 제련소, 영국식 군수공장을 도입했다. 기계 도입뿐 아니라  많은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기술을 배웠다. 당시 외국인 기술자들의 월급이 최고 2,000엔으로 메이지 정부 고위관리의 3배가 넘었다. 당시 정부 지출 가운데 5분지 1이 기업 설립에 투입되었다. 오쿠보는 공영공장 설립 외에 민간 기업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사업을 직접 경영하다가 민명기업에 매각해 계속 발전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등이 모두 정부로부터 관영기업을 사들여 성장한 기업이다. 정부의 지원 아래 미쓰비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일본은 신속한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선진기술을 배우고, 서양의 생활방식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사용하고, 구정 대신 신정을 설날로 택했다. 천황이 솔선수범하여 쇠고기를 먹고 관리들이 서양식 예복을 입었다. 이발관에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남자들이 서양식으로 머리를 짧게 깍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1,000여년 전 중국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을 본따서 나라(奈良)를 지었던 것처럼, 도쿄의 긴자에 서양식 거리를 만들었다. 서구 양식을 본떠서 거리를 꾸미고 길 양편에 서양식 건물을 지었으며 전차가 지나다녔다. 밤이 되면 가스등이 거리를 환하게 밝혔다. 일본의 면모가 완전히 달라졌다. 메이지 유신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오쿠보 도시미치가 피살된 것이다. 1878년 5월 14일 아침 8시의 일이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의지가 매우 강한 인물이었고 언제나 강하고 결연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타협하지 않았다. 오쿠보 도시미치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전국적으로 적지 않았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그들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사족들은 그를 제거한 후 그가 가지고 있던 정권을 순식간에 손에 넣었다.


부국강병, 식산흥업, 문명개화라는 유신의 3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강인한 성격의 오쿠보 도시미치는 서양의 제도를 도입해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하고 의욕만 앞선 탓에 정부의 재정이 버틸 수 없었다. 문명개화도 너무 성급하게 추진하는 바람에 일본의 전통문화가 완전히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심지어 국민 모두가 영어를 배우고 서양인들과 결혼하여 일본 민족을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가 사망한 후, 개혁을 위한 난제가 고스란히 후임자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넘겨졌다. 이토는 원래 오쿠보의 든든한 조력자였고 그 역시 오쿠보처럼 동양의 비스마르크를 자처했다. 또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친구였다. 당시 이토는 일본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시야가 넓고 성격이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정권을 쥐고 있던 시기, 일본은 개혁으로 인해 불거진 모순이 이미 정치계와 사회에서 표면화되어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거의 나체에 가까운 추한 모습으로 경기를 한다는 이유로 일본의 전통 운동인 스모를 금지했는데 결국 이것이 반대에 부딪치자 천황이 직접 스모 경기를 관람하여 스모를 회복시켰다. 스모 고수의 도전과 민중의 불만 섞인 목소리 앞에서 이토는 국가의 발전방향과 개혁방식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자유민권운동을 중심으로 정부에 헌법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타났다. 헌법제정과 국회설립이 불가피했다. 대세를 거스르면 정부 자체가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토는 대세에 순응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일본최초의 헌법제정을 하되 천황을 중심으로 민중의 권리를 제한하는 헌법을 만들었다. 군대는 천황 직속으로 그 밑에 두었다. 민중은 천황의 신민이었다. 일본은 천황이 다스리는 국가였다. 천황은 헌법 위에 있는 절대적 존재였다. 따라서 의회는 실질적인 힘을 갖지 못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식 헌법 제정을 모델로 했다. 그는 1882년 독일에 방문해 헌법학자인 그나이스트에게서 헌법을 배웠다. 그나이스트는 특별히 매주 세 차례씩 조수를 보내 이토 히로부미에게 헌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비엔나 대학의 슈타인 교수는 그에게 영국, 프랑스, 독일 정치 체제의 역사를 가르쳤다. 8월 어느 날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접견하고 “일본 천황의 이익 차원에서 본다면 국회 소집은 축하할 일이 아니오. 부득이하게 국회를 설립했다고 해도, 헌법에 정부의 예산이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할 필요는 없소. 이토 히로부미 선생이 국회가 예산을 비준하지 않을 경우의 해결책을 준비해 놓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이토 히로부미는 큰 깨달음을 얻었고, 빌헬름 1세의 관점이 일본 헌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경제가 가장 발전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영국을 보며 일본이 훗날 영국과 같은 강대국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영국을 모델로 일본을 개혁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이 때 눈에 띈 것이 독일이었다. 독일을 본받는 것은 비교적 현실적인데다가 일본의 실정에도 맞았다. 일본의 실정을 감안하면 영국의 수준을 따라잡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천황의 윤허를 받아 일본 역사상 최초의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초대 내각의 구성원 10명 가운데, 조슈와 사쓰마 출신이 각각 4명이었는데, 이는 조슈와 사쓰마의 과두 정치를 정규화하는 과정이었다. 이토는 네 차례나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되고, 총리대신은 몇몇 원로들이 돌아가면서 맡았다.


이토는 1887년 12월 17일 헌법 제정을 보장하기 위해 민권 대표 90여명이 원로원에 제출한 요구안을 탄압하기로 결정했다. 1887년 12월 26일 정부는 보안 조례를 발표하고 비밀 결사와 실외 집회, 내란을 조장하는 서적 및 선전물 인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570명을 추려 1-3년간 도쿄에서 추방하고 경찰의 명령에 저항하는 자는 사살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밀령을 내렸다. 추방대상 중에는 명성이 자자한 민권주의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민권운동은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사상이요 자유를 강조했다. 1887년 12월 26일 새벽 일본의 루소라고 불리는 나카에 조민이 도쿄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생후 몇 달밖에 되지 않은 딸을 품에 끌어안고 도쿄를 떠나 오사카로 향했다. 얼마 후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유와 평등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시기에 메이지 정부의 관용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니!”라고 한탄했다. 이로 인해 10년 동안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자유 민권 운동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이토는 일본에 기독교처럼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종교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백성들이 함부로 정치를 논하는 대로 따른다면, 정치가 기강을 잃고 국가가 멸망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라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은 황실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메이지 헌법 제정으로 일본 국민은 천황의 신민이라는 황국사관을 갖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천황을 부모를 모시듯 순종해야 했다. 메이지 정부는 의회의 권력을 최대한 제한했고, 정부를 중심으로 한 정체 체제를 수립했다. 또 민중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은 참정권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토는 주색을 일삼으며 음탕한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인물이라는 평이 있다.



야가가타 아리토모- 이토가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 개조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군제와 지방자치제에 대한 개혁에 착수했다. 1880년대부터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기존의 프랑스식 군제를 폐지하고 독일식 군제를 실시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의 군제를 견학하던 시기에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에서 약소국인 프로이센이 승리하였으며, 비스마르크와 독일 황제가 프랑스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제국건국기념식을 거행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강한 군사력과 군대 조직 방식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앙정부가 통솔하는 제국군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대의 질서로 국민을 조직하여 군국주의의 사회기층조직으로 삼았다.


에토 신페이, 사이고 다카모리- 메이지 유신의 원로였으면서도 개혁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킨 인물들이다. 에토 신페이는 초대 메이지 정부에서 참의와 사법경을 역임했다. 또한 유신 이후 법제 제정에 주력해 나폴레옹 법전을 번역하는 등 일본의 근대적인 법제 수립에 큰 공을 세우고 학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1874년 정한론을 주장하다 오쿠보와 대립 실각했고 제일 먼저 메이지 정권에 대해 폭동을 일으켰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에토 신페이를 대역죄로 죽여 효시했다. 메이지 정부에 대한 최대 최후의 반란으로 세이난 전쟁이 있었다. 그 주모자는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육군대장이었던 그는 조선침략과 사족의 특권보호를 주장하는 무리의 지도자였다. 기도 다카요시도 동일하게 정한론을 지지했지만 내치를 우선하는 점에서는 오쿠보와 일치했다. 약간의 견해차이일 수 있는데 반란까지 일어난 것은 놀랍다. 정부는 5만 군대와 군함 11척을 보내 전투를 벌였다. 반란군은 패했고, 결국 메이지 유신의 일등공신이자 세이난 전쟁의 주동자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스스로 할복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결국 급진적 개혁을 진행하던 오쿠보도 메이지 11년에 암살당했다. 자객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출신의 이름없는 무사였다.


교육을 강조한 메이지 정부- 막부 말기에 일본과 중국에 주재한 적이 있는 한 영국 공사는 “일본이 다른 분야에서는 영국보다 앞서지 않지만, 교육만큼은 영국보다 앞선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현대 국가였다. 그런데 그 나라의 공사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본인은 1904년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90퍼센트가 소학교에 진학했다. 농촌을 포함해 90퍼센트가 진학한 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당시 소학교는 4년제이고, 1907년에는 이를 6년으로 연장했다. 1908년 아동 취학율은 97퍼센트까지 증가했다.


이것은 일본의 전통이었다. 한 예로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시기에 일본에 많은 결식아동이 생겨났는데 그렇게 먹을 것이 없는데도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그토록 사회 전체적으로 교육을 중시했다. 일본은 교육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나라였다. 교육의 목적은 과학기술과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자원이 부족한 일본이 가야할 다른 길은 없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의 개화사상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1872년 <권학편(勸學篇)>을 발표해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한 나라가 독립하려면 신체가 독립해야 하고, 신체가 독립하려면 배움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 사람은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으며 근면하게 배워서 사물을 잘 아는 사람이 귀인이고 부자이며, 배우지 않으면 빈자이자 천인(賤人)이 된다.”라고 그는 강조했다. 또 그는 실용적이지 못한 학문을 배척하고, 실생활에 쓰일 수 있는 실용적인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천부인권의 개념에 입각하여 봉건적인 도덕 윤리를 비난하고 인간의 평등함을 천명했다. 이 책은 80만부나 발행되어 그의 전작인 <서양사정>의 기록을 경신하고 역사적으로 유례없이 많은 발행부수를 기록했다.


그는 도쿄의 시나가와구에서 게이오 의숙(게이오 대학의 전신)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미타에 위치해 있어 ‘미타의 문부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885년 그는 또다시 <문명론개략>을 발표하여 서양 문명의 선진성과 일본 문명의 낙후성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일본인들에게 근대 문명화를 이룩해 일본 문명을 서양문명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훗날 메이지 초기 일본 문명 개화의 경전으로 평가되었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볼테르’라고 불렸다. 오늘날 일본의 1만 엔짜리 지폐에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1885년 그는 <시사신보>에 ‘탈아론’을 발표한다. 그는 처음으로 일본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우리 일본 국토가 아시아의 동쪽에 있기는 하지만, 국민 정신은 이미 고루한 아시아적 정신을 벗어나 서양문명과 가까워졌다. 중국과 조선이 일본처럼 개혁을 실시하지 않는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멸망하고 말 것이다. 또한 그 국토는 선진국들이 서로 나누어 가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주변 아시아 국가를 개화함으로써 아시아 공동 번영의 날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가들과 발걸음을 함께 해야 한다. 중국과 조선이 이웃 나라라고 해서 특별 대우해선 안 되며 서양인들이 그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대해야만 한다.”


그의 탈아시아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일본인들이 아시아 국가를 멸시하는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어쨌든 나카무리 마사나오가 번역한 영국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권학편>은 당시 학교 교과서로 채택되기도 했고, 젊은층의 필독서가 되었다.

 

글쓴이: 큰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