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일본역사 총괄 (1)

지식창고지기 2009. 5. 20. 21:55

구석기 시대

 

 

일본열도에서 확인된 인류의 역사는 약 10만년이 채 안되며, 약 3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 3만 4천년 전에 화북지방에서 나이프형 석기로 불리는 격지석기가 전해져, 일본열도 전 지역에 널리 사용되었으나, 약 2만년 전에 시베리아에서 새로운 세석인(細石刃)이라고 불리는 세석기가 주로 동일본에 확산되었다. 잠시 동안 동일본의 세석인문화와 서일본의 나이프형 석기문화가 병존하였으나, 곧 세석인문화가 서일본에도 확대되어, 약 1만 5천년 무렵에는 나이프형 석기가 일본열도에서 사라지게 된다.

약 1만 2천년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온난화에 의해 대륙과 단절된 현재의 일본열도의 모습로 변하였다. 이후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이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조몬 시대

 

 

약 1만 2천 년 전경부터는 조몬 시대라고 한다. 조몬 시대의 명칭은 이 시대의 토기에서 볼 수 있는 새끼줄 문양의 한자어 승문(繩文) 에 기인한 것이다. 조몬 시대는 초창기·조기·전기·중기·후기·만기의 6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무렵 사람들은 조몬식 토기를 제작하였고, 조몬 시대 조기 이후 정착생활이 진행되어 수혈주거에 살았다. 화살을 이용하여 수렵하였고, 패총을 토대로 알 수 있는 어로, 식물의 채집 등으로 생활을 하였고, 타제석기, 마제석기, 골각기 등을 사용했다. 또, 여성을 본뜬 토우와 남성을 본뜬 남근석 등을 통해 원시신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작물의 재배도 행해져, 후기부터 만기에 이르는 시기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야요이 시대

 

나라 현 야마토코리야마 시 히에다 정에 현존하는 환호집락〈일본국토교통성〉

 

기원전 400년경부터 3세기경까지는 야요이 시대라고 한다. 시대구분 명칭은, 이 시기에 특징적으로 발굴되는 야요이식 토기에서 유래하였다. 덧붙여 야요이식 토기라는 명칭은 토기가 발견된 지역명칭이다.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사회가 정착되어, 규슈 북부에서 일본열도 각지로 급속히 퍼졌다. 농경사회로의 이행으로 각 지역에서는 지역집단이 출현하였고, 농경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지역집단의 규모가 점차 커져갔다. 그 중심부에 환호집락을 조성하였다. 그 당시 건조된 많은 수의 분구묘는 대형지역집단의 수장묘인 것으로 보이며, 이는 집단내에서 신분의 차이가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 일본열도를 왜, 왜국이라고 불렀다. 대형지역집단 중에는 중국과 교류를 하였던 지역집단도 있었고,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나라로 인식했다. 기원전후를 기준으로 100년을 전후하여 중국과 교류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후한서》에 후한광무제노국왕에게 인수(印綬)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인(金印)이 발견되었다.[1] 대형지역집단은 점차 정치적으로 통합하였고, 왜국연합이라고 불리는 정치연합체가 2세기 초에 형성되었다. 연합체의 맹주는 왜국왕이라고 했으며, 초기 왜국왕으로는 기록된 인물이 스이쇼이다. 잠시 동안 왜국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었지만, 2세기 후반 소위 왜국대란이라 불리는 내란이 발생하였고, 그 후 사마대국히미코가 왜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히미코는 위나라와 교류하여 왜국연합의 안정을 꾀했다.

 

고훈 시대

 

 

3세기 중엽에서 7세기까지는 고훈 시대라 한다. 3세기 중엽에 나타난 전방후원분야마토를 중심으로 일본 열도 각지에 확산되었다. 기나이, 산요, 규슈 북부에 병립했던 지역정치집단이 규합하여 야마토 정권을 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 다만, 초기국가 단계가 아닌, 연맹왕국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4세기 후반부터 야마토 정권은 무기, 농기구의 원료인 철을 구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와 교류를 시작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한반도와 중국의 문물이 왜국(倭国)에 대량으로 유입되게 되었다.[2] 5세기에 들어서 야마토 정권은 본거지를 가와치로 옮겨 중국의 남조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중국 사서에는 이 시기 야마토 정권의 수장을 왜의 오왕(五王)이라 하였다. 왜의 오왕은 국내에서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이라고 칭했다. 이는 중국과 다른 별개의 천하관를 가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이 시기 전방후원분인 오진 천황릉닌토쿠 천황릉 등이 조성되었다. 그 규모로 볼때 강력한 왕권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는 야마토 왕권 내부의 정치혼란이 있었으나, 게이타이 천황의 등장으로 야마토 정권에 의한 지배가 서서히 강화되었고, 한반도와의 교류는 크게 후퇴하였다.

 

아스카 시대

 

 

6세기 말에서 8세기 초까지를 아스카 시대라고 한다. 아스카 지방이 정치중심지이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6세기 후반 야마토 정권이 국내를 안정적으로 지배하였고, 오히려 정권내부의 왕위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다. 이 시기 백제에서 불교가 전래되었고, 이후 아스카 문화, 하쿠호 문화 등의 불교문화로 발전하였다. 6세기 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등장으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치권력를 한곳으로 모았다. 왜국에서도 7세기 전반에 걸쳐 쇼토쿠 태자와 소가 가문에 의해 견수사가 파견되었고, 관위 12계의 제정과 헌법 17조 도입 등의 국정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호족들의 저항도 강해 중앙권력화는 벽에 부딪쳤고, 그 후에도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7세기 중엽 다이카 개신으로 중앙권력화 움직임에 일정의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중앙권력화 움직임이 일어난 최대 계기는 7세기 후반 백강 전투의 패배였고, 이로 인해 국내는 국가체제 정비로 일치되어, 중앙권력화가 급진전되었다. 더욱이 진신의 난에서 승리한 덴무 천황은 왕권강화를 철저히 하였고, 천황의 신격화를 꾀했다. 천황의 명칭도 이 시기에 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천황의 실질적 지배를 구현하기위해 율령제 도입을 서둘렀고, 8세기 초 다이호 율령이 제정되었다. 일본이란 국호도 다이호 율령의 제정 전후로 보고 있다.

 

나라 시대

 

도다이지의 금당

 

8세기 초에서 말까지를 나라 시대라고 한다. 나라에 도읍인 헤이조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율령국가체제가 형성 및 심화되었다. 왕토왕민사상을 토대한 율령제는 천황과 관료에 의한 일원적 지배를 지향하였고, 편호제, 반전제, 조용조 등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8세기 전반에 결처 율령제 체제를 강화하여 삼세일신법, 간전영년사재법 등의 농지정책도 율령체제 강화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농민계층의 분화가 시작되었고, 백성들의 도주가 증가하는 등, 율령에 의한 지배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또, 신라를 제후국으로 보았으며, 도호쿠에미시규슈 남부의 하야토를 화외민으로 보는 중화의식이 있었다. 일본은 신라에 조공을 요구하는 한편, 에미시와 하야토인들은 교화의 대상으로 보아 정벌하였다.

문화면에서는《일본서기》,《만엽집》,《풍토기》등이 편찬되는 것 외에도 견당사가 가져온 중국문화를 받아들였고, 귀족중심의 덴표 문화가 꽃을 피웠다. 불교에서는 진호국가사상이 강하여, 도다이지고쿠분지가 호국사찰로 건립되었다.

 

헤이안 시대

 

겐지 이야기의 아사가오

 

8세기 말경부터 12세기 말경까지는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간무 천황이 조성한 헤이안쿄를 도읍으로 했다. 헤이안 전기에서는 농민의 계층분화가 한층 진행되어 전 시대부터 계속되어온 율령국가체제의 한계가 나타났다. 이에 조정은 11세기 초엽 무렵 지방분권적 국가체제로의 개혁에 착수하여 지방의 통치권한을 지방관인 즈료(受領)에게 주고 지방관청인 고쿠가(国衙)를 통해 지방을 통치하였다. 이 즈료·고쿠가 지배체제 아래 수취제인 후묘 체계(負名体制)가 형성되었고, 군사에 있어서도 고쿠가 군제(国衙軍制)로 전환되어 무사계층이 등장하였다. 또, 중앙정치에 있어서 후지와라 가문은 천황의 외척임를 이용해 정계를 장악했으며, 11세기에는 섭관정치를 하기에 이른다.

12세기에 들어서자 국가체계가 변화하기 시작하여 12세기말부터 13세기에 걸쳐 장원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고, 장원·공령제라고 하는 중세적 지배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시기에 어린 천황을 대신하여 상황이 정무를 보는 인세이가 시작되었고, 이원정치의 시작이었다. 이로 인해 헤이안 시대 말기 호겐의 난헤이지의 난이 일어났으며 무사가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고, 무가정권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헤이씨 정권이 탄생하였다.

헤이안 중기에 들어서 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나라 시대에서 보이기 시작한 독자적 일본문화가 전면에 나타난다. 이를 국풍문화라고 한다. 이 시기 히라가나·가타카나가 사용되기 시작했어며,《겐지 이야기》,《침초자》로 대표되는 모노가타리 문학(物語文学) 등이 융성하였고, 밀교말법사상이 널리 퍼졌다. 또, 토착신앙불교가 융화되기 시작하여 사원이 많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