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후지와라 미치나가, 후지와라 요리미치

지식창고지기 2009. 10. 20. 10:58

후지와라 미치나가

藤原道長


966 ~1028. 1. 3

일본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중기의 정치가로 후지와라 씨 전성기의 최정점에 선 인물.


그의 통치기에 수도 교토는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며, 857~1160년 일본 조정을 지배하던 후지와라 씨의 권세도 절정에 올랐다.

후지와라 씨의 전임 수장인 가네이에[兼家]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995년 형들이 차례로 죽자 가문의 지도권을 승계했다.

미치나가는 간파쿠[關白] 직위를 차지하지는 못했으나 1017년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임명될 때까지 정상적인 관직들을 두루 거쳤다.

또한 나이란[內覽]이라는 명예직에 임명되었으며 이를 통해 왕실의 비밀문서들을 접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천황의 권한은 여전히 인정되었지만, 실질적인 정권의 중심지는 왕궁에서 미치나가의 행정부(만도코로[政所])로 옮겨졌다.

4명의 천황을 그의 딸들과 강제로 결혼시켰는데, 2명의 천황은 그의 외조카였으며 3명은 그의 외손자였다.


일본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들이 그의 통치기에 탄생했는데, 그 자신도 우수한 시인이었다.

또 바쁜 정무중에서도 23년 동안 날마다 일기를 썼으며,이 일기는 당시의 정치와 세태를 아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그러나 미치나가 통치기에 외곽지방은 심각한 분열을 겪었는데, 지방의 많은 무사 가문들은 중앙정부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치나가는 미나모토 씨[源氏]와 다이라 씨[平氏] 무사들에게 급료를 주고 일종의 보조적인 경찰 역할을 하도록 함으로써 수도의 상황을 한동안 안정시킬 수 있었으나, 후지와라 씨의 세력이 기울어감에 따라 이들 군은 점차 정부 권력의 많은 부분들을 찬탈해버렸다.

 

 

후지와라 요리미치

藤原賴通

992 ~ 1074. 3. 2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중기의 관료.


세 천황(天皇)의 섭정 및 간파쿠[關白]로 있으면서 52년 동안(1016~68) 일본 정부를 지배했다.

그러나 일본의 외곽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친족들 사이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여 강력했던 후지와라 씨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권은 이미 요리미치의 아버지 미치나가[道長] 때부터 약화된 것이었지만, 요리미치 또한 그의 아버지처럼 사치스러운 궁정 관행을 유지했으며 외곽 지방의 동요를 무시해버렸다.

그결과 강도와 폭도가 횡행하고 수도에까지 도적떼들이 침입하여 왕궁을 약탈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방의 대영주들이 더이상 수도로 세금을 보내지 않아 왕실 수입은 고갈되어 궁전들이 황폐해졌다.

1068년 요리미치는 공직에서 물러났음에도,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후지와라 씨 출신 어머니를 두지 않은 고산조 천황[後三條天皇 : 1068~72 재위]이 후지와라 씨로부터 왕실의 지배권을 되찾으려 한 시도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요리미치가 죽은 후 고산조의 아들 시라카와[白河]는 후지와라 씨에게서 권력을 되찾았으며, 시라카와의 뒤를 이은 천황들은 이후 거의 100년간 후지와라 씨를 권력에서 배제할 수 있었다.

요리미치는 교토 근처 우지[宇治]에 있던 자신의 별장을 뵤도인[平等院]이라는 사찰로 바꾸어 꾸몄는데, 그 장식은 일본 불교미술의 정화(精華)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