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바쿠후의 역대쇼군
미나모토 요리토모 源賴朝 1192~99
미나모토 요리이에 源賴家 1202~03
미나모토 사네토모 源實朝 1203~19
후지와라 요리쓰네 藤原賴經 1226~44
후지와라 요리쓰구 藤原賴嗣 1244~52
무네타카 친왕 宗尊親王 1252~66
고레야스 친왕 惟康親王 1266~89
히사아키 친왕 久明親王 1289~1308
모리쿠니 친왕 守邦親王 1308~33
문영[文永]의 전쟁과 홍안[弘安]의 전쟁
1266년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쿠빌라이는 중국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동쪽 섬나라인 일본마저 복속시키려 하였다.
마침내 1274년 10월 3일 몽고와 고려 연합군 3만 3천이 9백여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일본을 향해출진하였다.
몽고군은 5일에는 대마도, 14일에는 이키섬을 점령하였고, 19일에는 구주의 하카타만[博多灣]에 육박하여 다음날 상륙을 시작하였다.
구주는 쇼니를 대장으로 삼고 붕고[豊後]의 오토모,시게히데, 히고[肥後]의 기쿠치, 다케자키 등을 출진시켜 대항케 하였으나, 몽고의 신식무기에 밀려 상대가 되지 못한채 다자이후[大宰府]로 후퇴하였다.
그런데 그날밤. 하카타만에 정박해있던 몽고군이 엄청난 태풍이 불어닥쳐, 새벽녘에는 침몰된 배의 나뭇조각과 시체들만 남기었다.
이때 익사자가 약 1만 3천명에 달한다 하니, 일본은 이 태풍의 덕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고, 이를 ‘분에이[文永]의 역[役]’이라 한다.
허나 쿠빌라이는 이것으로 일본정벌을 멈추지 않았다.
1275년 쿠빌라이는 다시금 일본에 사신을 보내었는데, 당시 집권자인 도키무네는 가마쿠라에서 사신의 목을 베었다.
또한 1279년에도 사신을 보내었는데, 이마저 참수하자 쿠빌라이는 대노하여 1281년 5월 3일 몽고, 한인, 고려군 4만과 군선 9백척을 동로군으로, 남송병 10만과 군선 3천 5백척으로 강남군으로 편성하여 출진하였다.
대마도와 이키섬은 함락시키고 하카타만으로 진격하여 시가섬[志賀島]를 점령하였다.
허나 일본군의 완강한 대항에 쉽게 상륙할 수 없었다.
또한 밤이되자 일본군이 작은배를 타고 몽고군 전선에 접근하여 횃물을 집어 던지자 몽고군은 일단 강남군과 합류키위해 다카시마섬으로 철수하였다.
허나 10만병력의 강남군은 애당초 이키섬에서 동로군과 합세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변경하여 히라도로 향하였고, 이로인해 동로군과 강남군의 연락이 끊기어 7월이 되어서야 다카시마섬에서 합류할 수 있었다.
다카시마섬에서 합류한 몽고군은 히카다를 향해 마침내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7월 1일 밤부터 북큐슈 일대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하여 몽고의 대선단이 전멸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겨우 목숨을 구한 몽고군의 잔병은 일본군의 공격에 모두 희생되었다.
이에 겨우 목숨을 구하여 본국으로 돌아간자는 3만이 채 되질 못하였다.
이 전쟁을 고안[弘安]의 전쟁이라 부른다.
이같은 분에이.고안의 역을 합해서 원구[元寇]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일본을 구한 폭풍우는 ‘가미카제[新風]’이라 불리게 되고, 일본은 신의 보호를 받는 신국[新國]이라는 불패신앙을 탄생시켰다.
한편 세 번째 침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바쿠후는 방위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실제로 쿠빌라이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의 원정군을 보낼 심산이었으나, 막상 출발시점에 섰을때 광둥[廣東]과 복건[福建]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그것이 안남[安南]과 코치[베트남] 로도 번져 나갔다.
쿠빌라이는 이로인해 계획을 연기할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일본 정복의 집념을 버리지 않던 쿠빌라이는 1292년에도 고압적인 사자를 보내 왔지만, 그 2년후인 1294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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