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지(平治)의 난
호겐의 난 이후 무사의 세력을 대표하는 두 세력이 등장하였는데, 이가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와 미나모토 요시토모[源義朝]였다.
호겐의 난이 있은 2년후 고시라카와 천황은 니죠천황(二修天皇)에게 양위하고 원정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고시라카와 상황을 측근에서 섬기면서 세력을 확장한 두 실력자가 등장하였는데,
소납언(小納言) 뉴도(入道信西)이고, 또 한사람은 노부요리 였다.
이밖에 니죠천황의 측근 중 권대납언(權大納言) 쓰네무네와 중납언(中納言) 고레카타가 니죠천황의 친정을 획책하고 있었다.
일찍이 보원의 난때 요시토모는 그의 일족을 배반하면서까지 고시라카와 천황측에 가담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웠으나, 포상은 겨우 정오위(正五位)이하인 좌두마(左頭馬)였으나 이와반대로 다이라 기요모리는 별다른 무공없이도 하라마국수에 정사위(正四位)로 포상되어
요시모토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이에 요시토모는 반 뉴도파인 노부요리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뉴도와 기요모리의 타도를 꾀하였다.
1159년 12월 기요모리가 구마노로 참배를 떠난 틈을타 요시토모와 노부요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상황과 천황을 궁궐에 유폐시켰고, 달아나던 뉴도를 붙잡아 참수시켰다.
여행중 급보를 전해들은 기요모리는 크게 놀라 급히 교토로 돌아와 군대를 소집하였고, 그러던중 니죠천황은 궁에서 도망쳐 기요모리의 진영에 감으로써 요시토모는 한층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12월 26일 아침.
기요모리의 3천 군대는 요시토모와 노부요리의 2천 군대를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요시토모는 미나모토씨의 근거지인 동국(東國)으로 도망치던중 오하리(尾張)에서 피살 되었으며, 노부요리또한 체포되어 참수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호겐의 난 이래로 많은 희생을 당했던 미나모토씨는 헤이지의 난 에서도 많은 무사를 잃었다.
이 헤이지의 난이 끝난 후 기요모리는 종일위(從一位) 태정대신이 되어 후지와라씨가
독점해오던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였고, 다이라씨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뿐만아니라 황실과의 유대를 강화키 위하여 둘째딸 도쿠코(德子)를 다카쿠라 천황(高倉天皇)의 중궁으로 삼았으며, 후에 그녀가 낳은 황자는 안토쿠 천황(安德天皇)이 된다.
■ 헤이지의 난 대립구조
상황측 천황측
후지와라 노부요리 ← 원의 근신대결 → 후지와라 노부니시
미나모토 요시토모 ← 겐페이 대결 → 다이라 기요모리
[源義朝] [平淸盛]
※ 노부니시는 살해되었지만 상황과 천황은 기요모리 진영에 가담했다.
미나모토씨의 배반으로 다이라가 승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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