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큐의 난
요리토모가 사망한 후 요리이에, 사네토모 두명의 쇼군이 암살되고, 유력 고케닌인 와다
요시모리[和田義盛]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여러 위기가 바쿠후를 덮쳤다.
호죠 마사코와 호죠 요시토키는 이를 극복하고 바쿠후를 지켜 나갔다.
그러나 3대 쇼군인 사네토모가 죽은 후 바쿠후에는 무사들을 지휘할 만한 강한 구심력을 닌 상징적 중심인물이 없었다.
이 시대에도 조정은 엄연히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바쿠후는 전국에 슈고를 두었지만, 사이코쿠 지방에서의 슈고의 힘은 미약했다.
재청관인의 형태로 영내의 유력한 무사를 조직한 고쿠가가 지배권을 쥐고 있었다.
바쿠후의 불안정한 상황을 파악한 조정의 고토바[後鳥羽]상황은 호죠씨의 독재에 불만을
가진 고케닌들에게 호소하면 자신의 수하로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사네토모가 죽은 다음해인 1221년 상황은 바쿠후 토벌작전을 결행하였다.
물론 조정내의 황족이나 귀족이 무력을 행사해도 이길 승산은 없지만 상황은 이전부터
조정의 군사력 강화정책을 진행시키고, 기나이[畿內]지방의 무사와 고케닌 들을
‘북면 무사’,‘서면[西面]무사’등으로 조직하였다.
이들 군사를 총동원해서 바쿠후의 실력자인 호죠 요시토키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것으로 요시토키는 역적이 되었고, 바쿠후에 가담하는 자도 역적으로 몰렸다.
조정에서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혔으므로 바쿠후측의 고케닌은 크게 동요했다.
그러나 여기서 바쿠후 측을 단결시키기 위해 피를 토하는 연설을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호죠 마사코 였다.
그녀는 동요하는 고케닌들을 집결시켜 “지금이야말로 죽은 요리토모공의 은혜에
보답할 때”라고 호소했다.
이 명연설에 감동한 고케닌들은 단결하여 바쿠후를 지키자고 서로 맹세하며 사기를 높였다.
결국 고토바 상황의 기대와는 달리 조정측으로 돌아서는 자는 거의 없었다.
한편 도코쿠 15개국의 군사로 이루어진 대군이 재빠르게 조직되고, 호죠 야스토키
[北條泰時], 도키후사[時房]의 지휘아래 서쪽으로 진격했다.
바쿠후 군과 조정군은 기소강에서 격돌했다.
이른 ‘조큐의 난’이라 한다.
결과는 바쿠후 측의 압승으로 끝나고, ‘조큐의 난’은 겨우 1개월만에 진압되었다.
승리자가된 바쿠후는 어린 천황을 폐위시키고 고토바 상황을 오키에, 준토쿠[順德]상황을
사토[佐渡]에 쓰치미카도[土御門] 상황을 도사[土佐]에 유폐시켰다.
신하인 바쿠후에 의해 천황이 폐위되고 상황이 유폐된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고, 조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계획에 가담했던 귀족들은 상형등의 엄벌이 처해졌다.
바쿠후는 새로운 천황으로 고토바원[後鳥羽元]의 조카인 고보리카와[後掘河]천황을 즉위
시켰다.
이후 호조 야스토키와 도키후사는 조정과 사이코쿠 지방의 고케닌을 감시하기 위한
거점으로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거기에 점령군으로
머물렀다.
바쿠후는 고토바 상황의 장원을 일단 몰수한 후 이를 조정에 기진하였다.
조정은 재산마저 바쿠후의 통제를 받게 된 것이다.
조정측에 가담한 귀족이나 무사의 영지도 몰수되어 바쿠후의 고케닌에게 분배되었다.
이리하여 바쿠후의 권력은 서쪽으로 크게 넓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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