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게이잔 조킨, 구스노키 마사시게,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닛타 요시사다

지식창고지기 2009. 10. 20. 11:18

게이잔 조킨

瑩山紹瑾


1268. 11. 13 ~ 1325. 9. 22.


일본의 조동종(曹洞宗) 승려.

시호(諡號)는 조사이 대사[常濟大師].

조동종의 양대 본산 중 하나인 소지 사[總持寺:요코하마 소재]를 세웠다.


12세 때 조동종의 본산 에이헤이 사[永平寺:후쿠이 현 소재]의 2대 주지인 고운 에조[孤雲懷裝] 아래서 승려생활을 시작했으며 에조가 죽자 다이조 사[大乘寺]의 뎃쓰 기카이[徹通義介] 밑에서 학문을 닦으며 불법을 전수받았다.

고호 가쿠묘 문하에서 공부한 뒤 다이조 사로 돌아와 10년 동안 조동종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쇼가쿠 사[諸岳寺:이시카와 현 소재]의 주지가 되었다.

절의 이름을 쇼가쿠잔소지 사[諸岳山總持寺]로 바꾼 뒤 1321년 절을 조동종으로 흡수했으며 뒤에 고다이고 천황에게 불교의 십문(十問)을 설법했다.

이 절은 나중에 황실의 절이 되었는데 1898년 화재로 타버렸으나 요코하마의 현재 자리에 재건되었다. 

게이잔은 많은 절을 세웠고 조동종의 전통을 복원했으며 조동종 창시자인 도겐[道元]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였다.

조동종을 급속히 발전시켜 일본 전역에 전파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그는 현재 다이소[太祖]라 불리며 조동종의 부흥자로 숭앙받고 있다.

또한 참선과 승려들의 일상 생활에 대한 조동종의 가르침을 설명한 글을 남겼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楠木正成


1294 ~ 1336. 7. 4 셋쓰 구니[攝津國]

일본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사 전략가 가운데 한 사람.



천황에게 희생적인 헌신과 충성을 바친 전설적인 인물로서, 1868년에 황권이 회복된 뒤, 그가 죽은 자리에 훌륭한 사당이 세워졌다.


지방의 소영주였던 그는 1192년부터 일본을 지배해 온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로부터 정권을 빼앗기 위해 1331년에 반란을 일으킨 고다이고 천황[後醍?天皇]편에 가담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바쿠후의 군대가 천황을 사로잡았지만, 구스노키는 산속으로 도망쳐 유격전을 계속했다.


구스노키가 1332년에 나라[奈良] 근처에 있는 지하야 성[千早城]을 점령한 것은 중앙정부에 큰 위협이 되었다.

걱정이 된 쇼군은 모든 병력을 구스노키와 싸우는 데 집중시켰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병력이 약해짐으로써 일부 무사들이 반란군에 가담했다.

구스노키가 엄청나게 우세한 쇼군의 군대에 맞서 지하야 성을 방어한 것은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에 속한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北?親房


1293 ~ 1354. 5. 10

일본의 무사·정치가.


중요한 정치·역사 서 〈진노쇼토키 神皇正統記〉(6권)를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일본은 신성한 통치자들이 대를 계속 이어왔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식의 신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주장을 폈다.


적대적인 봉건세력에게 빼앗겼던 황권을 회복하기 위해 1333년 유배지에서 돌아온 고다이고 천황[後醍?天皇] 고문이 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의 복고적인 천황친정체제(天皇親政體制)는 반란 때문에 얼마 못가 끝이 나고, 고다이고는 교토의 조정에 대항하여 요시노 산[吉野山]에 독자적인 조정을 세웠는데 이로써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가 열리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고다이고와 그의 혈통인 남조(南朝)가 일본 황권의 합법적인 계승자라는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기타바타케는 〈진노쇼토키〉를 집필했다.

1339년에 씌어져 1369년에 간행된 이 책은 후세에 민족주의적인 종교인 신도(神道)가 부흥하는 데 영향을 끼쳤고, 근대에 들어와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대에 기타바타케는 충성심의 본보기로서 뿐만 아니라 남조의 군사적·행정적 지원자로 인정받았다.

 

 

닛타 요시사다

新田義貞


1301 ~ 1338. 8. 17

일본의 무사.


고다이고 천황[後醍?天皇:1287~1339]의 복고적인 친정체제(親政體制)의 부활을 지지하여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1192~1333]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국 이 친정체제는 실패로 끝나고 아시카가 씨[足利氏] 일족이 권좌에 올라 1338~1573년 일본을 지배하게 되었다.


고다이고가 가마쿠라 바쿠후에 항거하여 1331년에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바쿠후의 가신(家臣)이었던 닛타는 천황의 군대를 패퇴시키는 데 가담했으나 이듬해에는 태도를 바꾸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가마쿠라 바쿠후를 무너뜨렸다.

새로 구성된 조정에서 그는 최고실력자의 한 사람으로 부각되었으나 자신처럼 가마쿠라 바쿠후를 배신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와 함께 곧 실각되었다.


고다이고는 잇따른 싸움에서 닛타를 지지했다.

그러나 1335년 수도에서 쫓겨난 다카우지가 1년 만에 지방무사들로 이루어진 육해군 대병력을 이끌고 돌아옴으로써 천황의 군대는 붕괴되었고 닛타는 고다이고와 함께 수도에서 도망쳤다.

다카우지는 교토에 새로운 꼭두각시 천황을 앉힌 반면 닛타는 일본 중남부의 요시노 산[吉野山]에 고다이고를 천황으로 옹립했다.

그결과 북쪽의 교토와 남쪽의 요시노에 자리잡은 2개의 천황 조정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닛타는 1338년 재차 권좌에 올랐지만 몇 달 뒤 습격을 받고 화살에 맞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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