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도사 미쓰노부, 도키와 미쓰나가, 묘에

지식창고지기 2009. 10. 20. 11:27

도사 미쓰노부

土佐光信


1434~1525.


일본의 화가.


도사파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대대로 어용화가(御用畵家)로 일해온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1493~96년 궁정회소(宮廷繪所)의 우두머리를 지냈다.

1518년에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어용화가로 임명되면서 도사파의 후원자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이 후원은 그후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도사파가 부흥·보존한 양식은 섬세하고 정확한 윤곽과 다양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야마토에[大和繪]였다. 

이 양식은 고전문학(특히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語〉)에 나오는 장면을 서술적으로 묘사하는 두루마리 그림에 많이 사용되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1492년에 그린 고엔유 천황[後圓融天皇]의 초상(교토의 운류인에 소장),

사원과 신사(神社)의 역사 및 전설을 설명한 두루마리 그림인 〈기요미즈데라엔기에마키 淸水寺綠起繪卷〉(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도키와 미쓰나가

常磐光長


일본의 화가.

12세기 후반 주로 일본 교토[京都]에서 활동했다.

궁정 신하들을 그린 세밀한 두루마리 그림으로 유명하다. 대표작은 들고 다닐 수 있는 60폭의 가로 두루마리 그림인 〈연중행사 年中行事〉(1173)인데, 여기에는 궁정의 여러 구역을 배경으로 궁정 신하들이 다양한 의식과 축제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원본은 1626년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그해 궁정 화가인 조케이가 베낀 20폭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는 1173년 당대의 주요화가인 후지와라 다카노부[藤原隆信]와 함께 궁전의 미닫이문에 '천황 행차' 장면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나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인간의 행동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인 그는 9세기 전반의 고위 공직자인 도모 요시오[伴善男]가 몰락한 이야기를 서술적으로 묘사한 〈도모다이나곤에고토바 伴大納言繪詞〉라는 두루마리 그림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이 그림은 정밀한 윤곽과 색채로 3개의 두루마리에 그려져 있으며,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며 극적인 생동감으로 가득 차 있다.

 

 

묘에

明惠


1173. 1. 8 ~ 1231. 2. 19.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 1192~1333] 일본의 화엄종 승려.

시호는 고벤[高弁]. 신불교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계율을 중시하고 부패한 구불교의 현상을 비판·쇄신하고자 한 화엄종 중흥의 시조라 할 수 있다.


8세에 부모를 잃고 9세에 다카오신고 사[高雄神護寺]에서 진언종 승려인 몬가쿠[文覺]의 수제자였던 숙부에게 사사했다.

16세인 1188년 출가해 밀교 수련만이 아니라 도다이 사[東大寺]에서 화엄종 교리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도다이 사의 학승간에 벌어진 파벌 싸움에 염증을 느낀 그는 진실한 구도의 길을 찾아 1195년부터 기이 구니에 있는 시로카미 봉[白上峰]의 암자에 기거했다.

그후 이론적인 도다이 사계의 화엄종과 대립하면서 약 10년 동안 각지를 돌며 수행하는 한편 130여 권의 화엄경 주석서의 강독에 주력했다.

그곳에서 자연과 일체가 되고자 하는 자연관을 형성했으며 2차례나 인도행을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206년 화엄종 도량인 도가노오[梅尾]로 들어가 고잔 사[高山寺]를 세웠다.

제자가 늘어나면서 승단이 형성되었고 설법회에는 교토[京都]의 수많은 귀족과 서민 신자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만년에 화엄종과 밀교의 일치를 설파하여 '붓코칸'[佛光觀]이라는 새로운 수련방법을 확립했으며 그 교리는 저서 〈뉴게다쓰몬기 入解脫門義〉에서 찾아볼 수 있다.

40세 때에는 〈사이자린 推邪輪〉에서 호넨[法然]의 〈센타쿠슈 選澤集〉에 보리심(菩提心)을 부정하는 교설이 있음을 비난하여 신흥불교에 대한 이론적 비판의 대표자로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묘에는 지나치게 구도에 열중하여 호넨이나 신란[親鸞]과 달리 민중교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