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요시마사

지식창고지기 2009. 10. 20. 12:36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滿


1358. 9. 25 ~ 1408. 5. 31.

일본의 쇼군[將軍].


할아버지인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1305~58]가 1338년에 세운 아시카가 바쿠후

[足利幕府]를 정치적으로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후 1573년 아시카가 바쿠후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를 요시미쓰가 살던 교토의 한 구역의

이름을 따서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라고 한다.

1368년 쇼군이 되자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황실의 관료제 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381년 내대신(內大臣)이 되었으며 좌대신을 거쳐 1394년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올랐다.

그는 통치기간에 완전한 문민정치를 확립했다.


1392년 요시미쓰는 다카우지의 교토 장악으로 야기된 남북조(南北朝) 체제를 종식시켰다.

일찍이 고다이고 천황[後醍? 天皇 :1318~39 재위]과 그 추종세력들이 다카우지에 쫓기어

나라[奈良] 남쪽의 요시노 산[吉野山]으로 도망가 남조를 세웠으며, 다카우지가 교토에

또다른 황실인 북조를 세움으로써 남북조시대가 성립되었다.

요시미쓰는 고대부터 전해내려온 황실의 보물인 삼종(三種)의 신기(神器)를 교토로

반환한다는 조건 아래 남조와 북조가 번갈아가며 천황에 즉위하도록 하여 남조와 화약을

맺었으나 이 약속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요시미쓰는 지방에 대한 완전한 지배체제를 확립하지 못하여 지방 무사들의 반란을 여러

차례 다스려야 했다.

그러나 15세기초 남서부의 봉건영주들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일찍이 이들 소유의

해적선들은 중국 해안에 출몰하면서 600년간 지속되어오던 중국과의 공식적인 무역을

중단시켜왔다. 

이후 중국과의 교역 재개는 요시미쓰 치하에서 1392년부터 시작된 75년간의 문화적

부흥기에 대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궁정생활이 화려해지고 선승들이 정부 내 고위관직에 임명되었으며 웅장한 사원과 궁전들이

축조되었다. 

유명한 것으로 긴카쿠 사[金閣寺]가 있는데, 1394년 요시미쓰가 아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은퇴한 뒤 교토의 북서쪽 외곽에 건축한 것이다.

 

 

아시카가 요시마사

足利義政


1436. 1. 20 ~ 1490. 1. 27


일본의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 제8대 쇼군[將軍:1449~73 재위].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는 데 기여했으나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물의를 일으켜 결국

오닌[應仁]의 난(1467~77)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수도 교토 주변이 파괴되었으며 훌륭한 건축물들이 손실되었다.

또한 외곽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약화되어 1세기 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무로마치 바쿠후의 제8대 쇼군으로 13세때 쇼군의 자리에 올랐다.

요시노리가 아카마쓰에게 피살된 후 7대 장군으로 취임했던 장남 요시카쓰[足利義勝]마저

8개월만에 병사하자, 그 뒤를 요시마사가 이었다.


쇼군의 자리가 이같이 급속도로 교체될 무렵 무로마치를 받들고 있던 중신들도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요시마사는 25세에 종일위 내대신[從一位內大臣]이 되었으며 우대장[右大將] 관직을 겸하였다.


요시마사는 지나치게 소심하였으나, 그와는 반대로 부인인 히노 도미코는 여장군이라 할

만큼 과감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정치에 관여하는 범위도 요시마사보다 더 방대하였다.

또한 그녀는 고리대금과 투기에 까지 손을대어 재산 축재에도 상당한 열을 올렸다.

한편 1459해부터 61년까지 일본은 전국에서 장마, 홍수 등의 천재가 잇달아 일어나 농사를

망치고, 설상가상으로 알질까지 유행하여 많은 백성들이 죽어 나갔다.

그러자 백성들의 요구가 거세어졌고, 바쿠후에서는 이를 수용하여 무려 13회에 걸치는

도쿠세이령[德政令]을 발표하였으나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


1465년 11월 20일 아들이 없었던 요시마사는 그의 동생 요시미[義視]를 후계자로 정하고

그 후견인으로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를 삼았다.

그런데 얼마후 도미코가 아들 요시히사[義尙]를 낳으며, 자기 자식을 후계자로 삼기위해

호소카와와 백중세를 이루던 야마나 모치토요[山名持豊] (야마나 소젠)을 후견인으로 삼자,

호소카와씨와 야마나씨의 분쟁이 발발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후계자 분쟁은 비단 바쿠후에서만 있지 않았다.

전국의 슈고다이며들 에게서도 후계자 문제가 터져나온 것이었다.

에치젠, 오하리, 도도우미의 슈고인 시바 요시타케가 1452년 9월에 사망하자 일족인

모치다네의 아들 요시토시가 후계자가 되었으나, 지나친점이 많아 가신들 및 바쿠후와의

충돌이 잦았으므로 시바일가는 그를 추방하였다

그리고 그 후임을 시부카와 요시카도에 맡겼다.

하지만 관령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주선으로 쇼군인 요시마사가 요시토시를 용서하자

시바씨는 두명의 주인이 생겼고, 중신들도 두파로 갈라지게 된 것이었다.

시바씨외에도 가와치, 가이, 엣츄의 슈고인 하타케야마가에도 분쟁이 발생하였다.

하타케야마 모치쿠니는 요시마사를 후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바쿠후의 중신이 되었는데,

아들이 없자 동생의 아들인 마사나가[政長]를 양자로 삼았다.

그후 요시나리가 태어나자 요시나리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자 이에 불만을 품은 마사나가의 부하들은 바쿠후의 관령 가쓰모토의 후원을 얻어

마사나가를 후계자로 삼는데 성공하였고, 요시나리를 추방시켰다.

상황이 이리되자 요시나리는 야마나 모치토요에게 후원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 일은

얼마후 오닌[應人]의 난의 도화선이 된다.


한편 요시마사는 쇼군으로서는 무능했지만 예술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후원을 했다.

은퇴 후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에 유명한 긴카쿠 사[銀閣寺]를 지었다.

이곳에서 그는 다도를 발전시켜 훌륭한 예술로 승화시켰으며 많은 저명한 예술가, 도예가,

노[能] 배우들을 후원했다.

문화가 발달한 이 시대를 히가시야마 시대[東山時代]라 하는데, 오늘날 일본 예술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시대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