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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室町 > 난, 민란 - 요시쓰구의 난과 아카마쓰가의 몰락

지식창고지기 2009. 10. 20. 12:32

요시쓰구의 난과 아카마쓰가의 몰락


1394년 쇼군직을 물려받았던 요시모치[足利義持]는 요시미쓰 생전 요시모치보다는 그의

동생인 요시쓰구를 지나치게 총애 하였기에 요시미쓰 사후의 결과는 불보듯 뻔한 결과였다.

요시모치는 요시미쓰가 생전에 원했던 태상천황[太上天皇]의 시호를 거절하였고,

요시미쓰가 살던 호화 저택도 두서너채 만을 남기고 모조리 난젠사, 겐닌사[建仁寺]에

기부해 버렸다.

그러자 요시모치와 동생인 요시쓰구와의 반목은 갈수록 심해졌고, 그러던중 요시쓰구가

요시모치를 물리치고 장군의 자리를 잇고자 하는 야욕을 품게 되었다.


한편, 당시 관동공방이었던 아시카가 모치우지와 관령 젠슈 와 불화가 붉어져 나왔는데

1416년 이를 호기로 여긴 요시쓰구는 관동관령인 젠슈와 연락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그 이듬해 요시모치의 대대적인 공격에 패하여 젠슈는 자결하고 요시쓰구는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10년후 요시모치가 휴계자의 지정을 미처 하기도 전에 급사하므로 바쿠후의

관령과 유력한 슈고 다이묘들은 제비뽑기로 다음 쇼군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선출된 자가 바로 요시쓰구의 동생이었던 요시노리[足利義敎]였다.

하지만 그는 본래 출가한 몸이었으므로 이름을 요시노리로 고치고 쇼군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 무렵 관동공방인 모치우지는 은밀히 쇼군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요시노리가

쇼군의 자리를 이었음에도 축하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요시노리를 환속장군이라 부르며 멸시하였다.

요시노리가 모치우지의 이같은 행동을 모를 리 난무하였다.

1432년 요시노리는 후지산[富士山]여행에 나섰는데 주목적은 관동의 슈고 다이묘들에게

쇼군의 위엄을 보이고 모치우지의 동정을 탐지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지금까지 관동공방 모치우지를 잘 섬겨오던 관동 관령 노리자네[上憲實]는 모치우지

의 지나친 행동을 극구 간하였으나 그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자 자신의 영지인 고즈케로

돌아와 버렸다.

그러자 모치우지는 노리자네를 공격하였고, 급박해진 노리자네는 곧바로 교토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요시노리는 즉시 대군을 파병하여 관동을 공격케 하였고, 가마쿠라는 사방에서

공격을 받아 패색이 짙어져갔다.

1439년 2월 모치우지는 체념끝에 자결함으로써 모토우지 이래 4대 1백년간 관동에서

권세를 누렸던 가마쿠라부가 멸망하였다.


요시노리는 주의깊고 냉철한 사람이었으나, 다소 독선적이며 통솔력이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는 궁중내부의 일까지 간섭하기도 하였으며, 아시카가 일가에 많은 딸을 출가 시켰던


히노가[日野家]는 유독 보호하였다.

뿐만아니라 히에이산의 엔랴쿠사와  영지경계로 분쟁이 일자 돌연 잇시키,도키등을

파견하여 히에이산을 토벌하여 본당을 불살라 버렸으며, 이후 히에이산 토벌의 공을

인정하기는커녕 사소한 잘못을 들추어내어 잇시키와, 도키등을 참수하였다.

이런 편파적인 요시노리의 행동은 슈고다이며들에게 불만의 싹을 틔우게 되었고, 이는

급기야 하리마,비젠,미마사카의 슈고를 겸하고 있던 아카마쓰가 요시노리의 제거를 노려

1441년 6월 자신의 저택에 요시노리를 초대하여 한 마리의 말이 달려드는 것을 신호로

사방에 매복해 두었던 부하로 하여금 그 목을 치게 하였다.

요시노리는 그 자리에서 참살되었으며, 이같은 급보를 접한 바쿠후의 관령 요리유키는

8세였던 요시노리의 아들 요리카쓰[足利義勝]를 쇼군으로 세워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하였고, 1개월 후 야마나씨에 명하여 아카마쓰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야마나씨는 아카마쓰의 영지를 하사받아 호소카와씨와 어깨를 견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