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무로마치室町 > 아시카가 家 - 아시카가 다다요시, 아시카가 다카우지

지식창고지기 2009. 10. 20. 12:34

아시카가 다다요시

足利直義



1306 ~ 1352. 3. 13

일본의 무사.


1338~1573년에 일본을 통치했던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설립자인 형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이끈 많은 전투에서 군사·행정의 천재로서 활약했다.

1333년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後醍? 天皇]과 손을 잡자 형과 함께 천황 군대를

총지휘했다. 

그러나 1335년 다다요시는 조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광범위한 지지를 모으는 데

성공했으며, 다카우지는 이 반란에 가담하여 반란군의 지휘를 맡아 1338년 수도

교토[京都]를 점령했다.

고다이고는 요시노 산[吉野山]으로 피신했고 다카우지는 자신을 쇼군[將軍]으로 임명하는

데 동의한 천황을 교토에 세웠다.

다다요시는 행정에 서투른 형 다카우지를 대신해 거의 10년 동안 정치를 맡았다.

그러나 결국 다다요시와 다카우지의 가까운 가신들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 다다요시는

요시노 산 주변 지역에 군림하고 있던 고다이고의 추종자들에게 가담했다.

다다요시의 군대가 우세했지만 물자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는 다카우지에게 잡혀 가마쿠라에 감금되었으며 그곳에서 독살되었다고 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尊氏



1305 ~ 1358. 6. 7

일본의 무사.


1338 ~1573년 일본을 지배한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 (또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창시자이다. 


천황정부를 전복하고 바쿠후를 세웠으며 이후에도 천황은 통치권을 계속 행사했으나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다카우지는 천황의 권력을 찬탈했다는 사실로 인해 19세기 왕정복고 운동기에 일본 역사상

악인으로 간주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천황에 대한 숭배의식이 약해지면서 그의

위치는 재평가되었다.


아시카가 가문은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9 ~1333]에 일본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가문으로 부상했다.

이 가문은 호조[北條] 가문에 유력한 가신(家臣)들을 보냈는데 호조 가문은 당시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두고 천황을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로 전락시키고 전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1331년 고다이고 천황[後醍?天皇 :1318~39 재위]이 반란을 일으켜 천황권의 회복을

시도했으나 곧 진압되고 천황은 유배되었다.

그러나 2년 후 고다이고는 유배지에서 탈출해 병력을 정비하고 수도 교토로 진격할 준비를

했다. 

호조측은 다카우지를 교토로 보내 방어를 강화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가마쿠라 이외의 지역에 대한 호조 정부의 통제력은 약화되어 있었다.

다카우지는 천황세력이 강화된 것에 고무되어 갑자기 방향을 돌려 일본 동부 단바

구니[丹波國]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귀환한 뒤 가마쿠라 정부에 대항해 군사를 일으켰다.

다른 유력한 무사들 가운데도 다카우지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마쿠라 정부는

붕괴하고 말았다.

고다이고는 10세기 이래 처음으로 정치와 군사 부문 모두를 통제하는 천황정부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새 정부는 곧 난관에 봉착했는데, 고다이고 천황은 전국적으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할 수 없었고 그를 지원하던 무사들도 이권 분할에 불만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1335년 7월 호조 가문의 일원이 군사를 일으켜 가마쿠라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다카우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을 쇼군[將軍]에 임명할 것과 호조 세력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다.

이같은 요구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다카우지는 가마쿠라로 진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황실은 당시 가마쿠라에 억류되어 있던 모리나가 친왕[護良親王]을 아시카가 가문이

살해했다고 비난하고 또 천황의 허락 없이 가신들을 포상한 것에 대해 비난했다.

이후 전투가 잇따랐으며 다카우지는 동생 다다요시[直義]의 도움을 받아 천황의 군대를

물리치고 교토를 장악했다.

천황 세력도 곧 재규합해 다카우지를 교토에서 몰아냈다.

3개월이 못 되어 다카우지는 다시 대규모 연합군을 이끌고 돌아와 천황 군대를 무찔렀으며

고다이고 천황에게서 통치권을 몰수한다고 선언한 뒤 황실의 다른 계보에서 천황을 옹립

하고 스스로 쇼군이라 칭했다.

고다이고는 나라[奈良]의 남쪽 요시노 산[吉野山]으로 피신한 후 스스로를 진정한 천황

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교토에 있는 북조(北朝)와 요시노의 남조(南朝) 사이의 반목이 1392년까지 계속되었다.


몇 년 후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사이의 반목으로 아시카가 가문의 결속이 약화되었으며

그결과 다카우지는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강화시킬 수 없었다.

아시카가 바쿠후는 1573년까지 유지되었지만 전국의 봉건적인 무사 지도자들과 각지에

산재한 강력한 세력인 불교 사찰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던 것은 초기의 짧은 기간에 불과 했다. 

다카우지는 교양을 갖춘 인물로서 와카[和歌:31개의 음절로 된 시]와 렌가[連歌]를 직접

짓기도 했다.

선종(禪宗) 발전에도 기여하여 교토에 덴류 사[天龍寺]를 건립하는 등 전국 각지에 많은

선종 사원들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