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무로마치室町 > 난, 민란 - 응영[應永]의 난

지식창고지기 2009. 10. 20. 12:33

응영[應永]의 난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는 나이는 젊었지만 바쿠후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의욕은

대단하였다.

그런 한 방편으로 교토의 무로마치에 대저택을 지어 주위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려했다.

그러나 1397년 요시미쓰가 기타야먀[北山]에 새로운 저택을 짓고 있을때 다른 슈고다이며

들은 앞다투어 인부와 정원수등을 보내왔으나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만은 요시미쓰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런일이 있은 후 항간에서는 요시미쓰와 요시히로사이에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399년 10월 요시히로는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사카이로 들어간후, 여러차례 요시미쓰의

초대를 받았으나 전혀 응하지 않았다.

이는 곧 그 둘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요시히로는 이미

요시미쓰와의 일전에 대비하여 관동공방[關東公方,바쿠후의 장군을 일컬음] 과 요시미쓰에

불만을 품고있던 단바, 오미, 미노의 슈고들, 남조의 유신들과 함께 하기로 사전에 결정 하였다.


마침내 11월 29일에서 이듬해 1월사이 여러차례 요시미쓰의 군대와 요시히로의 군대가

사카이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며, 이 전투에서 요시히로가 화살에 맞아 죽음으로써

요시히로군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이를 응영[應永]의 난 이라 한다.


요시미쓰는 1394년 당시 9세였던 요시모치[義持d]에게 쇼군의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은

바쿠후의 수장뿐만이 아닌, 조정의 신하로서도 최고의 지위인 다이조다이신[太政大臣]에 올랐다.

하지만 야망은 다이조다이신이라는 최고의 지위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1년후에 그 직위를

사임하고 바쿠후와 조정을 통합한 일본의 통일적 지배자가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런 야망의 요시미쓰도 1408년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