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센고쿠 시대 - 천하통일의 완성

지식창고지기 2009. 10. 26. 11:17

천하통일의 완성


시즈카다케 전투에서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를 제거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83년 9월 오사카에 전국을 호령할 웅장한 성의 축성을 명하였다.

1585년 천수각[天守閣]이 완공된 후 몇 년의 기간을 더 거쳐 성 전체를 완성하였다.

성의 규모는 본성과 외곽을 합치면 주위가 13km에 달하는 대규모 성이었으며,

휘황찬란한 황금의 다실[茶室], 금은보화가 가득한 창고와 무기창이 있었으며 요도가와강의

물을 끌어 내외 이중으로 된 해자[垓字]를 둘렀다.


한편 성의 축조공사가 시작된 후 히데요시는 승진을 거듭하였는데, 1582년 참의였던

히데요시는 권대납언, 내대신, 관백을 거쳐 1586년에는 태정대신[太政大臣]의 관직에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기에 이르렀다.


오사카성에 입성한 히데요시는 다이묘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련의 정책(영지전봉[轉封])을

시행하여 싸움에서 공을 세운 다이묘에게 지금까지의 영지에서 완전히 다른 영지로

이동시켰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기내지방을 완전히 세력권에 넣었으나, 아직도 기이,

이지미의 남부와 사국, 구주등지는 손이 미치질 못했다.

히데요시가 이들지역에 대한 평정에 대해 골몰할 무렵 뜻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충돌이었다.


이에야스는 일찍이 동국에 눈을 돌려 다케다[武田]씨가 멸망한 후 가이와 시나노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1584년 3월 노부카쓰가 히데요시를 배반하고 기요스성에서 이에야스와 강화를 체결

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상대로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은 지구전으로 발전하였는데, 이에야스는 고마키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항전하고

있었는데, 히데요시군의 노부테루가 이에야스가 없는 틈을 노려 미카와[三河]로 진격하여

나가구테까지 진출하였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재빨리 뒤에서 추격하여 노부테루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히데요시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패전이었다.

그는 공격목표를 바꾸어 이번에는 이세의 노부카쓰를 공략하였다.

그런데 노부카쓰를 원조할 줄 알았던 이에야스가 원조는커녕 관망만 하고있었다.

그사이에 노부카쓰는 다시 히데요시와 강화를 체결하고 말았다.

사태가 이같이 급변하자 이에야스도 언제까지나 히데요시를 상대로 싸울 수 만은 없었다.

이에야스 자신의 힘이 히데요시에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으며, 히데요시 또한 동국[東國]의

지배에 대하여는 너그럽게 보아 넘겼기에 두사람은 결국 강화를 체결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 강화를 체결한 다음해인 1585년 자신의 명에 따르지 않던 기이,

이지미, 사국, 엣츄 등을 잇따라 토벌하였다.

당시 구주에서는 시마즈[島津]씨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여 1586년 무렵에는 북구주

지방의 대명들이 모두 위협을 받고 있었다.

1587년 3월 히데요시는 친히 2만 5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구주를 공략하였다.

시마즈씨는 있는 힘을 총동원하여 최후까지 항전하였으나, 승산은 없었다.

5월에 이르러 사쓰마의 다이헤이사[太平寺]에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는 머리를

깎고 히데요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히데요시는 시마즈에게 사쓰마, 오스미, 히유가의 3국을 수여하고 그 나머지 땅은

공이 큰 무장들에 분배해 줌으로써 구주 평정을 완료하였다.


구주평정에 이어 아직 평정되지 않은 관동과 오슈[奧州]지방 공격에 나선 히데요시는 먼저

관동의 호죠씨[北條氏]에게 항복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호죠씨는 항복하지 않고 토착무사들과 힘을 합하여 히데요시에 대항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1589년 11월 천황의 이름으로 호죠씨에게 위협을 가했다.

이에 호죠씨는 크게 분개하여 사가미 각지에서 대포를 만들도록 하는 한편 동원령을 내려

히데요시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죠씨는 히데요시의 군세를 과소평가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호죠씨의 군세는 오다와라성을 위시하여 영지에서 모은 3만 5천이 전부였으나, 히데요시는

22만의 군사와 수만정의 철포를 가지고 있었다.


1590년 3월 마침내 히데요시는 대군을 거느리고 교토를 출발하여 4월에 호죠씨의 본성인

오다와라성[小田原城]을 포위하였다.

호죠씨의 성들은 히데요시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잇달아 격파되었다.

히데요시는 결코 오다와라 공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지속적인 위협을 가해 호죠씨의 성들을 차례차례 항복 받았다.

오다와라성이 함락되기 전 오슈지방의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를 비롯한 다이묘들이

히데요시에 항복해 옴으로써 호죠씨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7월에 이르러 호죠씨는 마침내 히데요시에 항복을 제의하였고, 호죠 우지마사[北條氏政]는

할복하고, 그의 아들 우지나오는 고야산[高野山]으로 추방되었다.


히데요시는 호죠씨의 영지였던 관동을 이에야스에게 넘겨주고 지금까지 이에야스의

영지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로써 노부나가가 혼노사에서 자결한 후 8년만에 마침내 일본 전국이 통일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