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센고쿠 시대 - 시즈가타케(賤ヶ岳) 전투

지식창고지기 2009. 10. 26. 11:18

시즈가타케(賤ヶ岳) 전투


오다 노부나가의 뜻밖의 죽음으로 천하통일 사업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노부나가의 사후 천하통일의 대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완성을 보게된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패망한 후 14일째인 1582년 6월 27일 오다씨의 중신들이 오와리의

기요스성에 모여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信雄], 3남 노부다카

[信孝]를 비롯하여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등의 무장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히데요시는 니죠성에서 피살된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다다[信忠]의 아들

산보시[三法師]를 무릎위에 올려놓고 어르고 달래면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대로 어린 산보시를 오다의 후계자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노부나가의 영지분배에서도 히데요시는 하리마 외에 야마시로, 단바, 가와치를

손에 넣었으며, 이후 야마토나 단고에도 그의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10월 15일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를 위한 성대한 추모의식을 거행하였는데, 여기에

노부다카, 가쓰이에, 가즈마스 등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곧 히데요시에 대한 도전을 표현한 것이었다.


한편 이보다 앞서 가쓰이에는 은밀히 히데요시 토벌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그의

영국[領國] 인 에치젠은 겨울철에는 눈이 많이 내려 군대를 움직이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때문에 양자인 나가하마성주[長濱城主] 가쓰토요[柴田勝豊]에게 명하여 일단 화해교섭을

벌이도록 하여 시간을 벌게 하였다.

하지만 가쓰이에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있던 히데요시는 12월 선제공격에 나서 나가하마

성을 공격하여 가쓰토요를 굴복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기후성을 포위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노부다카가 인질을 보내어 항복해오자 히데요시는 일단 야마자키성으로

철군했다.


1583년 3월 가쓰이에는 아직도 눈이 수북이 쌓인 기타노쇼에서 출병하여 오미로 진출하였다.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히데요시는 즉시 군사를 출동시켜 비와호 북쪽의 시즈가타케[賤ヶ岳]

에서 가쓰이에군과 대치하였다.


한편 기후성에서 일단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던 노부다카는 히데요시군과 가쓰이에군이

대치하는 상황을 보고 히데요시측의 오가키성을 공격하였다.

급보를 접한 히데요시는 급히 오가키로 출동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쓰이에군이 공격을 감행해 왔고, 이리되자 히데요시는 점차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우물쭈물할 겨를이 없던 히데요시는 밤새 강행군하여 이른아침 시즈가타케에

도착하여 가쓰이에군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에 거듭되던중 차츰 전세는 히데요시군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에치젠의 성주로서 가쓰이에의 통솔하에 있던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는 죽마고우였던

히데요시를 맞이하고 오히려 향도가 되어 기타노쇼의 가쓰이에 본성을 포위했다.


가쓰이에는 혼신의 힘을다해 분전했으나, 끝내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다음날, 총공격이 시작되자 천수각(天守閣)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불을지른 후

" 이 가쓰이에가 할복하는 모습을 잘 보아두었다가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하라 " 는 말을

남기고 오이치를 비롯한 12 명의 애첩과 30 여명의 시녀들을 모두 죽인 후 할복했다.


히데요시는 이어 가가, 엣츄까지 평정하고 이땅을 나가히데와 도시이에에게 나누어 주었다.

노부나가의 3남 노부다카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차남 노부카쓰에게 기후성을 명도하고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