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센고쿠 시대 - 나가시노(長篠)전투

지식창고지기 2009. 10. 26. 11:19

나가시노(長篠)전투


천정(天正)원년(1573)4윌12일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향년 53세로 사망했다.

노부나가로서는 최대의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원구(元龜)2년(1571)의 겨울까지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原寺),사쿠라(朝倉),아사이(淺井),

엔랴쿠지(延曆寺),마쯔나가(松長),롯카쿠(六角),나가시마(長島),잇키(一癸),모리(毛利)를 

포함한 반 노부나가 포위망을 이루고,

원구(元龜)3년에는 미카타가하라(三ケ原)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게 완승했을 때의

신겐은 노부나가를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당시는 노부나가의 천하통일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한편 신겐의 사후 노부나가는 신속하게 행동했다.

천정(天正)원년 7월18일에 쇼군 요시아키를 추방하고,8월18일에는 아사쿠라, 27일에는

아사이씨를 멸망시켰다.

신겐의 죽음으로 노부나가를 고립시켰던 포위망을 순식간에 격파한 것이다.


이어 천정(天正)2년 정월에는 가쓰요리가 아케치(明智)성을 포위하고 6월19일에는

동 토도우미(遠江) 최대의 요지인 타카텐진(高天神)성이 함락되기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노부나가의 전략이 숨어 있었다.

신겐의 죽음을 알고 곧 아사이, 아사쿠라를 멸망시키고 가쓰요리를 긴장 시킨후,

가쓰요리가 본거지에서 나오면 두려워 하는 척하여 과신,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미카타가하라(三ケ原)에서 압승했던 다케다(武田)군단의 강력함을 아는 가쓰요리를

자만심의 함정에 빠뜨리고 무리한 전투로 이끌어 내는 것이 노부나가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만약 다케다군단이 정면충돌을 피한다면 노부나가군에게 패전의 가능성은 높았다.

그래서 노부나가가 생각했던 것이 철포(鐵砲)부대의 새로운 이용법이었다.

노부나가는 철포에 대해서 조예가 깊었다.


천문(天文)18년(1549) 장인인 사이토 도산(齋藤道三)을 대면했을 때 철포 500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보듯 어린 시절부터 철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사카이(界)와 오미(近江)國友의 대량 생산지를 가지고 있어 다른 다이묘에 비해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다케다군단의 총포는 가신부담이었던 것에 비해 노부나가는 아시가루(足輕)에게 지급한

것을 보면 이 차이는 실로 큰 것이다.


한편 천정(天正)3년 4월 가쓰요리[勝賴]가 움직였다.

미까와(三河)의 나가시노성[長篠城]을 공격한 것이다.

나가시노는 미까와의 산악지대에 있고 원래 도쿠가와씨의 세력하에 있었으나

원구(元龜)2년(1571)에 다케다령이 되고 천장원년(1573)에 다시 도쿠가와령이 되었다.

전년 6월 신겐이 사망한 곳인 타카텐진(高天神)성을 함락시켰던 가쓰요리는 자신만만해

있었다. 

노부나가군을 얕잡아본 젊은 무사 가쓰요리는 노부나가의 덫에 걸려 들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다케다군 중에서도 가쓰요리의 자신감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코사카 단죠(高坂單正)와 나이토 아키토요(內藤昌豊)가 진언을 했지만 승리에 취한

가쓰요리는 노신들의 진언을 무시했다.

또한 아버지 신겐의 유언도 사후 3년간 영지를 벗어나지 말라 하였으나,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가신들이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이 싫었다.

그러하였기에 전황이 유리한 때의 진중론은 통하지 않았다.


천정3년 4월11일 가쓰요리는 나가시노성을 포위공격하고 5월6일 二蓮木, 牛久保공격후

이에야쓰가 있는 요시다(吉田)성을 공격했다.


노부나가는 5월13일에 대 다케다전에 급히 출진해 筒井順慶와 細川藤孝등에게 철포를

공출시키고 출진, 5월18일에는 나가시노성 서쪽의 지다라(志多羅)에 포진하고 極樂寺산에

본진을 배치했다.

그 수는 3만, 도착한 노부나가는 다케다의 기마대에 대비해 마방책을 설치했다.


한편, 가쓰요리는 오다-도쿠가와 군이 접근하자 19일 밤 나가시노성의 포위공격을 풀고

일부를 토비노즈(鳶ノ菓)산에 배치하고 주력은 칸사가와(寒狹川)을 넘어

시다라가하라(設樂ケ原)북쪽의 淸井壓부근에 본진을 설정했다.


총 병사수는 1만5000명, 여기서도 다케다군 내부에서는 결전 회피론이 있었다.

馬場美濃守, 內藤修理, 山縣三郞兵衛등이 간곡히 가쓰요리에게 전투를 피할 것을 진언

하지만 노부나가를 이기려는 생각만으로 가득찬 가쓰요리는 아도베 오오이노스케

(跡部大炊助)의 주전론을 택했다.


5월20일 밤 오다-도쿠가와의 별동대 사까이 다다쓰구(酒井忠次),金森長近들이

토비노즈(鳶ノ菓)산 (다케다군의 후방교란)으로 향하고 전투는 시작되었다.


5월21일 오전6시 다케다군단과 노부나가군은 蓮子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고지에 위치한 다케다군은 그 유명한 기마부대 「풍림화산」로 돌진해 내려가 노부나가군을

분쇄할 작전이었다.


한편,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각각 3중의 마방책을 蓮子川부근에 나란히 설치하고 3천정의

총포대를 5개로 나누고 마방책의 후면에는 1열로 배치시켰다.

사람간의 간격은 총포를 안전하게 발사할 수 있는 거리인 1.8m로 정했다.



노부나가의 작전은

「적의 기마대가 들어오면 1町의 거리까지 와도 총포를 발사하지 않고 가깝게 다가오면

총포 천장으로 연속사격하고 1단씩 교대로 발사하라, 적이 더욱 강하게 밀고 오면 조금

물러나고 적을 끌여 들여 사격하라」

라고 말한 것과 같이 3천정도의 철포를 천정씩 3단으로 준비해 총포의 장막을 친

작전이었다.


오다-도쿠가와군은 좌익의 佐久間信盛와 우익의 오쿠보(大久保)부대를 다케다군을 꾀어내기

위해 책(柵)밖으로 나왔다.

이것을 본 다케다군의 선봉 야마가타 아키카게(山縣昌景)가 3천여기로 산을 내려왔다.

전투의 불이 당겨진 것이다.

산을 내려온 야마가타가 본 것은 높다란 마방책과 엄청난 수의 철포부대였다.

책에 놀란 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철포 3천정이 불을 뿜고 야마가타의 기마대도 하나씩 쓰러져 갔다.

당황한 야마가타는 마방책의 우측으로 돌격을 시도하지만 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에게

밀리고 말았다.


이 야마가타의 선봉대가 나가시노전투의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2번대 다케다 노부스미(武田信兼), 3번대 오바타 노부사다(小幡信貞), 4번대

바바 노부하루(馬場信晴)등의 이름난 다케다의 명장들이 이름도 없는 아시가루(足輕)의

총포에 쓰러져 갔다.


오후2시경, 노부나가의 총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瀧川一益을 1번대로 한 노부나가군과 맹위를 떨친 도쿠가와 배하의 미까와 무사단이

차례차례 다케다군단을 쳐부수었다.

이윽고 가쓰요리 본진도 무너지고 따르는 기는 6기정도 였다.

이로써 다케다군단은 불과 8시간만에 괴멸되었던 것이다.

이후 가쓰요리와 중신들에게 남은 것은 저택으로 지어진 쓰쓰지가사끼성과 공사중인
니이후 성뿐이었으나, 이마저도 노부다다를 선봉으로하는 다끼가와 가즈마스의 부대가
추격을 거듭. 가쓰요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성을 빼앗았다.
가쓰요리는 그 소식을 접하고서 곧바로 게이린사로 향했으나, 그마저도 여인금지라는
명목으로 숙박을 막아섰다.
그리되니 수십년간 이땅을 지배했던 다케다 가문에 이제 제한몸 뉘울만한 영지조차
사라져 버렸다.

며칠째 제대로된 식사도 취침도 하지못한 가쓰요리의 곁에는 가족과 시녀들, 그리고
평생을 다케다에 충성했던 중신들만이 남아있었다.
가쓰요리의 아내인 오다와라 부인이 먼저 자결하고 뒤이어 가쓰요리가 할복하였다.
가신인 마사쓰구는 남아있던 아녀자들과 아이들을 모두 벤 뒤, 자결하므로 다케다의
패망에 종지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