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센고쿠 시대 - 천하포무

지식창고지기 2009. 10. 26. 11:24

천하포무
天下布武


이 시대의 전국대명들은 모두 교토로 올라가 천하를 호령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노부나가도 못지 않았는데, 이 야망의 실현에는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이 우선되어져야만했다.

우선 본거지를 떠날 경우 그 틈을 노려 본거지를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했으며,

교토로 진출하는 도중에서도 많은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노부나가는 본거지 공격의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오케하자마의 전투 이후 가이의 다께다씨

[武田氏]와 손을 잡으려 하였다.

또 동쪽에 이웃한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도 협력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뒤를 이은 우지자네[氏眞]는 요시모토 사후 세력이 급격히 쇠퇴하여

부하격인 도쿠가와씨에게 마져 배반당해 호죠씨에게 의탁하여 오다와라로 도망쳐 있었다.


이리하여 노부나가는 배후의 후환을 없애는 데는 일단 성공하였다.

하지만 교토 진출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미노의 사이토 도산[齋藤道三]과 오미의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라는 강력한 적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노부나가는 도산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도산이 그의 아들 요시타쓰[義龍]에게 피살되자 노부나가는 장인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로 미노[美濃]에 출병하였다.

그 뒤 요시타쓰가 병사하고 그 뒤를 이은 다쓰오키[龍興]와도 싸움을 벌여 여러차례

출병하였으나, 쉽사리 무너뜨릴 수 없었다.

다께나까 한베에, 이나바 잇데쓰, 우지이에 보그젠, 안도이가 등의 걸출한 두되들이 도산의

사후에도 미노를 철옹성으로 구축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노부나가는 그의 누이동생 오이치를 오미의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에게 출가

시켜 그와 손을 잡은 후 1567년 8월 사이토씨의 내분을 이용하여 이나바산성을 공략.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9월에는 이나바산성의 이름을 기후성[岐阜城]으로 개명하고 이 성을 근거지로

삼아 교토로 진출할 기회를 노렸다.


오케하자마의 전투이후 교토 진출의 준비를 서둘러온 노부나가는 그후 7년간의 각고 끝에

대부분의 준비를 갖추었다.

노부나가는 미노를 정복한 후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인장[印章]을 사용하였으며,

이로써 천하통일을 위한 발빠른 행보를 시작한다.


노부나가가 이나바산성으로 옮긴지 얼마후인 11월, 교토의 오기마치천황[正親町天皇]으로

부터 한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이 편지에는 노부나가의 무용을 칭찬하고 아울러 황실의 영지[領地]를 되찾아주면 좋겠다는

부탁의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이듬해인 1568년 7월에는 피살된 아시카가 바쿠후의 제 13대 쇼군 요시테루[足利義輝]의

동생 요시아키[足利義昭]가 기후성에 찾아와 노부나가에 몸을 의탁하였다.


이처럼 노부나가는 황실의 신뢰뿐만아니라 아시카가씨로부터도 신뢰를 얻게됨으로써

교토 진출에 더없이 좋은 명분과 기회를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