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센고쿠 시대 - 오케하자마 전투

지식창고지기 2009. 10. 26. 11:25

오케하자마 전투
桶狹間


스루가(駿河), 토도우미(遠江), 미까와(三河)와 더불어 오와리(尾張)일부를 영국화 한

요시모토는 다께다 신겐(武田信玄), 호조 우지야쓰(北條氏康)와 동맹을 맺고 배후를 공고히

한 후 상경을 결정했다.


영록(永祿)3년(1560년)5월10일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本)의 선봉 이이 나오모리

(井伊直盛)가 출진, 12일에는 요시모토 본대가 슨푸(駿府)를 출발했다.


스루가(駿河),토도우미(遠江),미까와(三河)및 오와리(尾張)일부에서 선발한 2만 5천의

대병을 이끌고 13일에는 掛川, 14일에는 하마마쓰(浜松),15일에는 요시다(吉田)로 전진해

18일에는 노부나가령의 쿠쯔카케(沓掛)에 도착해 노부나가와의 결전에 눈앞에 두었다.


한편 노부나가는 기요스(淸州)성에 있으며 요시모토의 쿠쯔카케(沓掛)도착 및 다음날의

마루네(丸根), 와시즈(鷲津)공격의 정보를 받았다.

이때 林佐波守등의 중신들은 농성을 진언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전투를 해야 할 때를 잃고 죽어야 할 곳을 도먕치면 자멸한다,

반드시 국경을 넘었을 때 전투를 해야만 한다.’라고 하며 농성책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

하였다.

요시모토의 대군이 마루네(丸根), 와시즈(鷲津)공격에 군대를 보내 본군이 상당히

감소했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장이 되리라고 예상한 장소는 노부나가가 얼마 전에 시찰을 한 곳이고

우쯔케모노(うつけ者 - 바보, 멍청이)라고 불리던 시절 군사 시뮬레이션을 했던

곳이기도 했다.


5월19일 마침내 요시모토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이 새자 마쓰다이라 모도야쓰(松平元康- 후의 이에야쓰(德川家康)〉가 마루네(丸根)를

급습해 사쿠마 모리타네(佐久間盛重)이하의 수비병을 쳐부수고 순식간에 함락시켜 버렸다.

동시에 와시즈(鷲津)를 아사히나 야쓰요시(朝比奈泰能)가 함락시켜 요시모토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연승에 취한 요시모토는 大高성으로 향하면서 자신만만해 있었다.오께하자마(桶狹間)에

도착한 요시모토는 전군에게 휴식을 명했다.

휴식지로 정한 곳은 오께하자마(桶狹間)의 중간에 있는 텐카쿠하자마(田樂狹間)였다.

텐카쿠골짜기(田樂峽)는 구릉사이의 습지였다.

왼쪽엔 숲이 있고 오른쪽에는 진흙밭이 있었다.

본대는 종대대형인 채로 점심밥을 먹었다.

경계병은 있었지만 전망이 좋지 않은 지형이어서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한편 노부나가는 오전11시경 밥을 물에 말아 먹은 후 「인간오십년」의 그 유명한

아쯔모리(敦盛)를 추고 결사의 각오로 출진했다.


오전8시 아쯔다(熱田)신궁에 도착, 따르는 총병사는 200기를 헤아렸다.

이윽고 전승기원에 보내졌던 군세가 합류해 10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오전9시에 아쯔다(熱田)신궁을 출발 도중에 마루네(丸根), 와시즈(鷲津)함락 보고를 받은

노부나가는 전군에게 결사의 각오를 구했다.

하나가 된 노부나가군은 나루미(鳴海)방면에 측면 경계병 300명을 떼어내고 단케(丹下),

센쇼지(善照寺) 방어책의 병사를 합쳐 전진시키고 센쇼지(善照寺)동쪽의 병사를 점검했다.

총병사수 3,000명, 요시모토기습이 준비된 것이다.


이때 노부나가에게 나루미(鳴海)분대의 괴멸의 정보가 날라왔다.

격분한 노부나가는 나까지마(中島)방면의 적을 향해 진군을 기도했다.

그리고 진군하려던 찰나 야나다 마사쯔나(梁田攻網)의 첩자로부터 요시모토 본군이

텐카쿠하자마(田樂狹間)에서 휴식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요시모토의 수색병이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비교해 보면 이는 노부나가군의 정보전의

승리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요시모토의 위치를 파악한 노부나가는 1,000명을 나카지마(中島)부근에 배치하고 자신은

2,000의 병사를 이끌고 요시모토 본진으로 잠행진군을 했다.

전형적인 양동작전이었다.


병사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훈시를 통해 최대의 전략목표를 향해 일치단결하게 하는

뛰어난 작전지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노리고 있던 요시모토군과의 직접적인 대결이 가능해지고 승리의 길이 넓어졌다는 것을

전군에게 심어 주었다.

요시모토군 기습을 시작한 노부나가군은 북쪽의 구릉을 돌아 현재의 東海道를 거쳐 단번에

텐카쿠하자마(田樂狹間)로 진격했다.


정오경 드디어 노부나가군이 텐카쿠하자마(田樂狹間)에 도착했을 때 소나기가 심하게

내렸고 요시모토 군에게로 심하게 몰아쳤다.

요시모토군은 나무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2시전 적의 이런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노부나가는 비가 그치는 것을 보고 곧 총공격을

명했다. 

완전히 기습을 당한 요시모토군은 노부나가군의 공격인지 아군끼리의 싸움인지 구별조차

하지 못한 채로 창끝을 들이대는 노부나가군에게 무너져갔다.

무장을 풀어 놓았던 요시모토군은 더욱 그 혼란이 컷을 것이다.


오후2시경 요시모토의 본기가 노부나가에게 발견되었다.

노부나가의 지시가 전군에게 내려지고 전략목표인 요시모토의 머리를 향해 전군이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윽고 모리 신스케[毛利新介]는 무너져가는 요시모토의 본진에 뛰어들어 요시모토의 목을

잘랐다. 

오케하자마(桶狹間)의 전투는 전형적인 기습작전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전쟁에서든지 정보의 신속성과 정확성이 승패를 가른다는 것을 노부나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역의 사정에 통달하고 있던 것,

비는 우연일지 모르지만 비 때문에 요시모토군이 습지에 빠져 이동이 쉽지 않게 되었다.

이런 기회를 기다려 공격해 들어간 것은 지형의 이점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