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센고쿠 시대 - 아네가와(姉川)전투

지식창고지기 2009. 10. 26. 11:23

아네가와(姉川)전투


원구(元龜)원년(1570)4월20일에 노부나가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의 공략을 위해 출발했다.

진격로는 22일에 日若州態河, 23일에 佐枾로 와카자(若狹)를 경유해 에치젠(越前)에 이르는

길이었다. 

때때로 노부나가의 상경(上京)요청을 무시했던 아사쿠라(朝倉)로서는 노부나가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북 오미(近江)로부터 직접 에치젠(越前)으로 가는 길은 아사쿠라의 경계하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와카자(若狹)를 통해 에치젠으로 향한 것이다.


佐枾를 출발한 노부나가는 25일에 데쯔쯔(天筒)산을 거쳐 26일에는 카네가자키(金ケ崎)성과

引壇성을 개성시키고 27일에는 코노메(木目)산을 넘어 아사쿠라씨의 본성 이치죠타니

(一乘谷)의 문턱까지 왔다.


그러나 28일 노부나가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동맹관계였던 북 오미(近江)의 매제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가 동맹관게를 단절해

버렸다. 

나가마사는 절세미인인 노부나가의 동생 오이치(お市)와는 부부였다.

노부나가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 소식에 「거짓말이다.」라는 그의 말로 보아 그 당혹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사이(淺井)측에서는 동맹을 맺을 당시 노부나가가 아사쿠라에 대해 군사행동을 할 경우

사전에 아사이가에 양해를 구한다는 하나의 조건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통보도 없이

아사쿠라를 공격해 들어간 것은 명백이 노부나가의 도리에 어긋난 행동인 셈이다.

게다가 아사이와 아사쿠라는 부조 3대를 이어온 동맹가였으므로 의[義]를 택하느냐

인척을 택하느냐의 선택이 따른 문제에서 의를 택한 것이었다.


전국시대의 무대에 천하통일을 위해서는 도덕보다는 목적을 우선시하는 생각의 노부나가와

결과적으로 도덕과 의리를 우선시 했던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를 비교하면 노부나가의

편이 근대적 합리주의에 눈을 떳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나가마사가 배반했다는 정보를 접한 노부나가의 행동은 신속했다.

곧 병사를 수습해 교토(京都)로 향했다.

퇴각을 위한 기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 -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미방어의 도움으로

그 날 안에 쿠치기(朽木)를 넘어 교토(京都)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는 무리였다.

오미(近江)에서 잇키(一癸)가 일어나고 롯카쿠(六角)씨 또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5월9일 교토(京都)를 출발한 노부나가는 요지에 무장을 배치하고 기후(岐阜)로 도주했다.

5월19일에는 도중에 총포의 공격도 받았지만 추격병이 없는 길로 급하게 달렸다.

이 시점에서 보면 노부나가의 가장중요한 목표는 기후(岐阜)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5월21에 기후에 도착한 노부나가는 병사를 정비하고 다시 오미 평정 길에 올랐다.

6월4일 롯카쿠[六角義賢]를 토벌해 남 오미를 평정,19일에는 일시귀국해 기후를 재출발해

도중에 長比,刈安의 양채를 함락시키고 21일에는 아사이씨의 본성인 고다니(小谷)성에

다다랐다.

이 당시의 군세는 2만5천을 헤아렸다.


한편 아사이 나가마사에게는 유리한 점이 2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고다니성이 299m의 높이를 자랑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이고, 또 하나는 노부나가군에

비해 병력에 있어 우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공성에 비해 수성은 적은 수로도 가능하기 때문]


6월22일 노부나가는 일단 고다니성 목전에 병사를 배치하고 安如龍ケ鼻으로 진을 이동한 후

고다니성의 지성인 요코야마(橫山)성을 포위했다.

이 시점에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원군 6,000명도 도착해 오다-도쿠가와의

연합군은 3만4천을 넘었다.


한편 아사이 군에게도 아사쿠라[朝倉景健]의 원군 1만이 도착해 아사이군도 1만8천을

헤아렸다. 

아사이-아사쿠라 측에서도 진중론이 있어 야전을 불가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요코야마성은

오미에서 에치젠에 이르는 요충지에 있어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도 없었다.

양동작전으로 위기감을 적에게 심어줘 자신이 생각한 것으로 승패를 가른다는 노부나가의

전략대로 움직인 것이다.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은 야음을 틈타 6월28일 새벽 오요리(太衣)山에서 野田, 三田村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동은 이미 노부나가에게 간파당하고 있었다.


6월28일 오전4시 아네가와(姉川)의 남쪽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북에는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이, 남에는 오다-도쿠가와의 연합군이 대치했다.

전투는 도쿠가와의 사까이 다다쓰구(酒井忠次), 오가사와라 나가타다(小笠原長忠)의 부대가

아사쿠라군에게 돌격해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편 노부나가군은 아사이와의 전선에서 아사이군의 선봉 이소노 가즈마사(磯野員昌)의

맹공에 의해 노부나가군의 제 2진인 坂井政尙의 부대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윽고 숨돌린 틈도 없는 난전이 되었다.

평야에서의 전투는 중앙부분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지는 위험성이 있었는데, 노부나가군이

이런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다.



한편 도쿠가와, 아사쿠라전선에서는 상황이 변하고 있었다.

총대장 이에야스와 하나된 미까와(三河)무사단이 위력을 발휘해 아사쿠라군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붕괴된 아사쿠라군을 포착한 이에야스는 곧 사가끼바라 이에마사(神原康政)에게 측면공격을

명한 후 이어서 아사쿠라 군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이 좌익에서의 호전이 13단중 11단까지 무너진 노부나가군에게는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도쿠가와군에 원군으로 출진했던 이나바 잇데쓰(稻葉一鐵)가 왼쪽으로 아사이군을 공격하고

요코야마 산성을 포위하고 있던 氏家卜金,安東守就가 오른쪽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예리한 칼과 같은 노부나가군의 공격이 아사이군의 허리를 짤라 대항도 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고다니성을 향해 도주하는 아사이-아사쿠라군을 노부나가의 추격군이 오요리(太衣)산,

토고제(虎御前)산까지 추격했다.

아네가와(姉川)전투에서 노부나가는 얼마간의 전투유형을 보이고 있다.

우선 돌발사태가 발생한 각 전투에서의 곤란한 국면에서 보여준 스피드,

오케하자마(桶狹間)에서도 보이고 있지만 이 전투에서 보인 노부나가의 스피드는

다른 센고쿠 다이묘(大命)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이후 노부나가는 고다니성 공략이 불리하다고 보고 야전으로 유인하기 위해 요코야마성을

공격했다. 

백병전이 되면 반드시 수가 많은 편이 유리하다는 생각으로 아네가와(姉川)를 설정한 것이다. 

야전에서는 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배치에서도 13단으로 구성하고 현실적

으로 반 이상이 파괴되었지만 노부나가 본진까지는 돌파되지 않았다.

동시에 압도적인 수는 최후까지 여력이 되어 아사이-아사쿠라군의 숨통을 끊었다.

승리전으로 동요시키고 상대를 꾀어내고 유리한 곳에서 전멸시킨 이 아네가와(姉川)전투

에서 보인 전략은 나중의 나가시노(長篠)전투에서 보다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아네가와(姉川)전투는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반 노부나가[信長]를 획책해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황한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의 포위망을 좁힐 생각으로 각지에 밀서를 보내었다.

이윽고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原寺)가 병사를 일으키고 뒤이어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아시이-아사쿠라가 오미에 출진했다.

이세(伊勢)의 나가시마(長島)에서 잇코 잇키(一向一癸)도 일어났다.

하지만 아네가와(姉川)전투에서 노부나가는 큰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천정(天正)원년(1573)에는 아사이,아사쿠라,미요시(三好)를 격파하였으며,

천정2년(1574)에는 나가시마의 노부나가 적대세력을 각개격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