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儒學)의 변천사
유학(儒学)은 소중한 중국의 문화 유산이다. 선진(先秦)시기에 발원한 유학은 오늘날까지 2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유학의 내용과 형식도 변화되고 발전해 왔다. 유학의 발전사는 대략 선진시기, 양한(两汉)시기, 송명(宋明)시기, 근현대(近现代)의 신유학으로 그 단계를 명확히 나누어 볼 수 있다.
선진(先秦)시기 - 사상화한 원시 인학(仁学)
공자(孔子)∙맹자(孟子)∙순자(荀子) 등으로 대표되는 선진 시기의 원시 유학은 ‘유(儒)’를 ‘사(士, 군자)’와 동일시 했다. 중국 제 1대 성현인 공자에게 일찍이 누군가 ‘사’란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가 답하기를 “도덕으로 자신의 행위를 규범짓고, 군주가 내린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자의 대답에서 ‘사’는 ‘관직’의 직분을 지녀야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두 가지 요구 조건-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재능을 포함하고 있다.
<맹자-등문공하(孟子·滕文公下)>편에는 사(士)는 세상에 나와 관직을 책임지고 백성을 위해 일하며 이것은 마치 농민이 농경에 종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다고 기재했다. 이 시기의 ‘유’와 ‘사’는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원시 유학의 주요 내용에는 교육과 ‘사’의 배양을 포함하고 있었고 사로 하여금 인(仁)을 두텁게 하고 현능(贤能)하게 해 관직을 능히 책임질 수 있어 백성을 위해 복을 창조하도록 했다. 결국 모든 내용이 ‘인(仁)’을 둘러싸고 있으며, ‘기소불욕, 물시우인(已所不欲,勿施于人: 내가 싫은 일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라)’ 등, 농후한 이상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순자의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비교적 현실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순자는 도덕과 교육을 중시하면서도 정법제도의 징벌 효과를 강조해 두 가지를 겸비해야 한다고 여겼다. 선진시기 춘추 말에서 전국시기에 제창된 도덕수양설은 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양한시기 - 제도화한 유학
유학은 한(汉)초에 이르러 역사와 문화를 전수하는 과정에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학이 숭상하는 역사적 문헌인 ‘육경(六经)’도 중앙의 인정과 중용을 받았다. 양한시기의 대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는 순자를 이어 각계 학설의 장점을 수렴해 예법(礼法)과 형덕(刑德)의 병용을 기초로 한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学)’을 제창했다. 그는 공자의 저작인 <춘추>에 기재된 각종 예의법도는 한 왕조가 본받을 만하다고 여겼으며 “국가를 지배하는 자는 <춘추>를 배우지 않을 수 없으며, 신이 된 자 또한 <춘추>를 배우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다. 유학과 당시 실재의 사회정치제도를 필연적으로 연결시켜 두었고 유학 문헌을 법제의 등급으로 중시했다.
동한에 이르러 중앙정부가 <백호통덕론(白虎通德论)>을 공포하고 유가학설을 정치제도의 규율로 정식 인정하게 되자 당시 사회는 반드시 도덕규범을 준수해 따라야만 했다. ‘수신’을 주장하고 있던 유학이 규율이 되면서 대중화 논리로서의 도덕수양의 의의와 작용은 약화되고 인간의 자연적 감정을 속박하고 압제하는 틀이 되었다. 한말 현학(玄学)과 불교, 도교가 흥기하자 유학은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주류의 지위를 한동안 벗어났다.
송명시기 - 성리학으로 발전한 유학
송명시기에 이르러 유학은 ‘인’의 본 뜻을 널리 떨치는 한편 제도화의 질곡을 면해 사유변론의 방향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성(性)과 리(理)를 결합한 새로운 학설의 탄생은 유가사상을 정신 영역으로 새롭게 자리잡게 했다.
당대 문학가인 한유(韩愈)의 제자 이고(李翱)는 성리학의 창시자이며 유학을 부흥시킨 주요 인물이다. 그의 저작인 <복성서(复性书)>에서는 원시 유학 속의 ‘인’ 학설은 원리가 비록 존재하지만 원인을 설명하지 않고 더욱 깊히 파고들지 않아 사람을 형이상학적이고 비현실적인 길로 오도하기 쉽다고 했다. 따라서 당시 부흥을 제창한 유학은 결코 제도화한 유학이 아니라 논리(伦理)와 도덕이자 심신의 수양을 다루는 유학이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해야 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등 이론적인 문제에 깊이 파고들었다. 예를 들어 ‘인’을 깊이 파고들어 구체적인 예를 들 뿐 아니라 대량의 원리를 이야기 하게 된다.
북송대 이학자인 정이(程颐)의 저작 <이정집(二程集)>에는 “의리를 알지 못함을 자각하지 못하면 인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을 ‘의리’의 차원까지 끌어올린 예다. 남송의 저명한 철학자 주희(朱熹)의 <사서장구집주(四书章句集注)>는 유가 역사의 이정표라 할 만하다. ‘인’을 ‘이(理)’로 보는 논리를 매우 심도있게 설파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랜 시일을 거쳐 온 유학이 비로소 도덕과 심신수양 차원으로서의 사회적 기능을 회복한 것이다.
민주와 과학사상이 융합된 근현대 신유학
봉건제도의 해체를 따라 유학도 근대에 성행한 서방문화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청말 자산계급 개량파의 지도자 강유위(康有为)는 근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계몽사상가 중 하나다. 그는 전통 유학의 경전을 뒤져 시대의 조류에 부합하는 논리를 찾아냈다. 중국 전통 유학과 서방 근대 사상을 융합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봉건제도가 역사의 무대에서 철저히 사라지자 갈수록 많은 사상가들은 유학을 전통 사상 문화의 유산으로 보고 학문화된 연구를 진행했다. 서방문화의 끊임없는 충격파 속에 중국은 유학을 어떻게 융합시켜 계승하고 발양해 나갈 것인가? 민국 초년에 유학의 운명과 중국의 앞날을 고심하는 많은 학자와 그들의 저작이 쏟아져 나왔다. 유학자 량수밍(梁漱溟)을 선두로 한 슝스리(熊十力), 첸무(钱穆), 펑여우란(冯友兰) 등의 사상가들은 “신유학을 창립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중∙서양 문화의 융합을 전제로 유학의 새로운 해석과 발전을 꾀함으로써 신유학의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그들은 유학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민족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사람들의 도덕수양과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데 적극적인 작용을 하기를 희망했다.
30년대~50년대 초에 유학은 가장 풍성한 활약을 보이며 풍부한 이론적 가치를 지닌 시기를 보냈다. 이 기간 연구해 낸 풍성한 성과는 슝스리 저작의 <신유식론(新唯识论)>, <원유(原儒)>, <건곤연(乾坤衍)> 등을 통해 비교적 완벽한 철학체계를 이루고 있다. 유∙도∙현학 사상과 방법을 통합했을 뿐 아니라 근대 서양의 뉴칸티즘과 베르그송 사상 등의 이론을 널리 채용해 유학은 새로운 발전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유학은 이천여 년을 이어온 중국 문화의 정수로서 그 풍부하고 심원한 사상은 중국과 동아시아 각국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동아시아 지역의 부흥과 함께 갈수록 많은 국가와 국민이 유학에 대해 새로이 인식하고 이를 중시하고 있다. 유학은 동방문화의 대표로서 서방문화와 상호 보완과 융합의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도덕사상으로서 유학이 지닌 인류에 대한 영향력은 갈수록 많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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